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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내 정신으로 살기

반찬이 2008. 10. 19. 16:44

내 정신으로 살기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기 정신으로 산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하고 때로는 반문해 본다. 눈여겨보면 중심을 잡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사는 이가 그리 흔하지 않다. 엉뚱한 것에 기를 쓰거나 남의 장단에 춤을 추다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기 일쑤인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내가 주로 접하는 내담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때로는 나 자신도 남의 눈에 그렇게 비치기도 하니 난감한 일이다.

 

벌써 몇 년 전의 일이긴 하다. 호암 아트홀에서 고(故) 장욱진 씨의 작품 전시회가 열린다고 해 모처럼의 짬을 내 가보았다.

 

그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단순하면서도 질박해 보이는 그분의 작품들은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전시실을 돌다 맨 마지막 방에 가보니 장욱진 씨의 살아생전 모습을 담은 필름을 상영해 주었다. 몇 분에 걸친 상영이었는데 맨 마지막 장면은 그가 돋보기안경 너머로 히- 하고 웃는 모습이었다.

 

70대 노인이 수염도 깎지 않은 텁수룩한 모습으로 마냥 천진하게 웃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온통 주름진 얼굴에 따스하게 웃는 그의 눈빛은 여간 편안하지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방금 전에 보았던 그 미소에 대한 영상을 곱씹고 있었다. 한 노인이 자아낸 미소가 어쩌면 그리도 포근하고 그윽하던지! 내가 종국적으로 기대어 안주하고 싶은 곳이 바로 그렇게 안온한 세계가 아니던가 하는 생각에 마냥 빠져들었다.

 

마침 그날 밤 어떤 철쭉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어떻게 지내고 있냐며 안부를 물으시기에 나는 전시회에 다녀온 것을 말씀드리다 인상적이었던 장욱진 씨의 웃음 짓는 모습에 대하여 언급했다.

 

그런데 그분의 미소가 아름답다는 말을 한 두 번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통화를 하는 사이에 나는 4∼5번 정도는 그 말을 했고, 급기야는 그 미소를 보기 위해 다시 전시회에 가겠다는 말까지 했다.

 

그러자 나의 말을 잠자코 듣고 계시던 철쭉님께서는 “아무래도 장 교수에게 또라이 기질이 있는 것 같소!”라고 퉁명스럽게 내뱉는 것이 아닌가.

 

무심코 재잘거리던 나는 ‘또라이’라는 말에 그만 정신이 번쩍 나고 기분도 상했다. 그리하여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느냐며 뾰로통하게 대꾸했다. 그러면서 이 나이에 뭔가를 그렇게 좋아한다는 것은 순수한 것으로 천진스럽다고 봐줄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철쭉님께서는 인사치레라도 한 발 양보해 주셨으면 좋으련만 도리어 더 정색을 하시며 “아니오! 확실히 장 교수에게는 또라이 기질이 있소. 그렇지 않고서는 어디엔가 그렇게 홀랑 빠질 수가 없소. 설사 좋다 하더라도 한두 번이면 족하지, 뭐 그리 치우쳐서 정신을 못 차릴 정도요.”라고 되받으시는 것이 아닌가.

 

사실 나는 언짢았다. 나의 호들갑을 애교로도 봐줄 수 있을 텐데 그렇게까지 찬물을 끼얹다니. 그래서 시큰둥하게 전화를 끊고 괜히 짜증이 나 이것저것 뒤적이다 일찍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잠이 오지를 않아 곰곰이 좀 전에 했던 그 통화 내용을 다시 되짚어 보는데 어느 순간 “그렇지!” 하고 수긍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혼자 씩 웃었다.

 

이것을 계기로 나는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고 보면 내색은 덜 할지라도 나는 뭔가를 좋아하면 무척 좋아했고, 싫은 것에 대해서는 꽤나 싫어했던 것 같다. 바로 그러한 태도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내 도식대로 처리해 버리는 오류를 수없이 범해 왔지 싶다. 사실, 대개의 것들은 다 거기서 거기 일 텐데 그것을 양극으로 이분화 시킨 것은 순전히 내 마음의 놀음이었다.

 

왜 그랬을까? 있는 그대로 유순하게 바라보거나 대하지 못하고 왜 굳이 호오(好惡)를 가리려 했을까? 결국 미혹했던 마음이 지어낸 행위였지 싶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끌리거나, 또는 싫은 것에 대해서는 자기를 좀 더 이롭게 하고자 취사선택하려는 마음이 내게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만큼 자기 정신으로 주인답게 살아가는지 눈여겨보았다. 아쉽게도 주체성이 확립되어 자기 정신으로 올곧게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적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들 어디엔가 치우쳐서 그것이 옳은 양 고수하다 한 세상을 마치는 것 같다.

 

한 예로, 어떤 중년 부인은 고교 3학년일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고 한다. 음악을 전공하려 했던 자기는 생계가 어렵다고 판단해 아예 진학을 포기했다. 그러나 뒤늦게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가까스로 입학시험을 치르게 되었고, 그 딸에게 어머니는 친척들에게 구걸하다시피 해 첫 학기 등록금을 겨우 대주었다.

 

그 다음부터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아르바이트를 해서 대학을 마친 그는 중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한동안 집안을 돕다 결혼을 했는데, 마침 남편은 경제적 여유도 있고 처갓집에 후한 편이어서 그는 근 20년 가까이 친정의 대소사 일을 처리하며 살아왔다. 친정어머니가 무리를 해서 자기를 그렇게 대학에 보내준 것이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어서 그는 늘 그 보답을 해야 마땅하다고 여겼단다.

 

그런데 근래에 이 부인은 뭔가 모르게 은근히 약이 오르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아직까지 자기에게 기대어 살고 있는 친정어머니를 답답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더구나 집안의 궂은일에 무관심한 동생들 내외가 얄미워 불뚝불뚝 화가 치밀어 오른다는 것이다.

 

이때까지 아낌없이 친정 일에 헌신적이던 이 부인에게 근래에 회의가 든 것은 아들이 대학 입시에 번번이 실패해 삼수를 하게 되면서부터다. 장손인 맏아들이 이렇게 되자 그 부인은 이번에 또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으로 바싹바싹 말라갈 지경에 이르렀다. 본인의 사정이 이런 데도 남동생들은 조카에 대하여 걱정스러워하는 위로의 말 한 마디를 하지 않아 내심 섭섭하던 중인데, 곧 다가올 친정어머니의 칠순에 대하여 그들은 아무런 계획도 없이 으레 누님이 알아서 하겠지 하고 태평이란다. 그러니 그 부인은 속에서 천불이 난다며, 그 동안 그렇게 친정 일에 엎어지듯 산 것이 후회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덧붙이는 말이, 자기 심정이 이렇게 사나워지긴 했지만 대학 입학으로 어머니에게 입은 은공이 있으니 어쩌겠느냐며 또 어머니의 칠순 잔치를 주도하려 했다.

 

그 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에게, 오지랖이 넓어도 한참 넓은 여자라고 되게 몰아붙였다. 주처(住處)도 모르고 어디에 그렇게 엎어져 지내느냐고, 은공에 대한 보답도 정도껏 해야지 언제까지 그것에 매달려 살아갈 참이냐고, 출가외인이 아직도 친정에서 대장 노릇을 하고 있으니 남동생들과 올케들이 제대로 자기 구실을 찾아 하겠느냐고, 시집간 딸이 친정 일에 설쳐대면 인생을 살아도 훨씬 더 산 친정어머니가 말려야 하거늘 어쩌자고 그 어머니는 거렁뱅이처럼 딸에게 기대어 사느냐고, 사람이 나설 때 안 나설 때를 가리지 못하면 얼마나 추한 줄 아느냐고 한참을 뭐라 그랬다.

 

그 동안 효녀라고 칭찬만 들어오던 그 부인은 나의 질타가 너무나 의외였는지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조목조목 설명하는 나의 말에 수긍이 가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상태에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남에게 잘 해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친절도 베풀 자리에 베풀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푼수라고 욕을 먹는다. 더구나 상대가 해야 할 일을 미리 척척 처리해 주면 그는 자기가 설 자리를 잃고 만다. 그 부인의 남동생들이 다 장성했으면 의당 아들로서 해야 할 본분이 있는데, 조금만 뭉그적거리면 다 처리가 되니 책임감을 익힐 새가 없지 않았겠는가. 나아가 대외적으로는 자기 식대로 도취되어 사는 그 부인의 모습 또한 얼마나 이기적이고 못나 보이겠는가.

 

곰곰이 헤아려 보면 치우친다는 것은 다 무엇인가가 잘못된 것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사람이 치우치면 삶의 주인으로서 주체적으로 살아가기보다 남의 장단에 놀아나니 여간 낭패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내 삶을 남의 정신으로가 아니라 내 정신으로 살기 위해서는 정말 정신 바짝 차리고 매사에 균형을 잡아야 하리라.

 

 

 

 


 Together - Giovanni Marradi

출처 : 가톨릭대 상담심리 대학원 원우회
글쓴이 : 장성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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