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관심 속에 진행 중인 '과학과 종교의 대화'가 세 번째 서신 교환을 시작한다. 김윤성 교수는 종교가 '만악의 근원'인양 간주하는 태도가 과연 사실에 부합하는 것인지, 또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인지 묻는다. 김 교수는 "종교가 전쟁, 테러 같은 악에 연루된 때에도 많은 경우 종교가 유일하거나 직접적이거나 핵심적인 원인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김 교수는 이어서 "무신론적 신념에 근거해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운동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무신론 운동이 종교와 종교인 비판에 지나치게 골몰하는 모습은 염려스럽다"며 "이런 태도는 과학의 성과를 인정하지 않고 무신론을 악의 근원으로 매도하는 독선적인 종교인의 태도와 별로 다르지 않다"고 덧붙였다. 김윤성 교수는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종교학과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인공지능과 영혼', '생명 논의와 모호성의 윤리' 등의 논문과 <거룩한 테러>, <다윈 안의 신> 등의 번역서가 있다. 이 글의 초고는 2007년 4월 작성되었다. <편집자> |
신재식 선생님과 장대익 선생님께
두 분 편지 잘 받아 보았습니다. 윌슨과 데닛, 두 석학과의 만남에 관한 장 선생님의 생중계도 잘 들었고요. 학기가 본격화하여 강의며 연구며 이런저런 일들로 정신없이 지내는 저로서는 마냥 부럽기만 하네요. 아무튼 덕분에 도킨스, 데닛, 윌슨이 같은 무신론자이면서도 종교를 대하는 입장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전사 도킨스와 전략가 데닛, 그리고 협상가 윌슨이라…. 꽤 그럴듯한 구분이네요. 그런데 솔직히 말해 저로서는 이런 차이가 과연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세 사람이 똑같이 무신론적 신념을 공유한다는 사실은 그대로일 테니까요.
형이상학적 신념으로서 무신론
방금 저는 '무신론적 신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신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형이상학적 신념이고 다른 하나는 실천적 신념이죠. 전자는 실재의 궁극적 본질에 대한 견해와 관련되며, 후자는 세계를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운동과 관련됩니다. 저는 도킨스, 데닛, 윌슨을 비롯한 많은 무신론 과학자들에게 무신론은 이 두 가지 모두의 의미에서 일종의 신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그들의 무신론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형이상학적 신념입니다. 물론 무신론에는 형이상학적 차원만 있지는 않습니다. 방법적 차원도 있죠. 과학은 자연이라는 물리적 실재를 설명할 때 실험과 관찰이나 수학적 증명처럼 경험적 검증이 가능한 방식만 사용해야 합니다. 신이나 초자연처럼 경험적 검증이 불가능한 요소를 끌어들인다면 그건 더 이상 과학이 아니겠죠. 자연을 설명할 때 자연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상정하지 않는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과학에서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올바른 과학이라면 그 설명에서 신이나 초자연을 일단 배제해야 합니다. 이론 체계는 간결할수록 좋다는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 : 흔히 '경제성의 원리'라 불리는 이 원리는 중세의 여러 학자들이 거듭 제시한 것으로 14세기 영국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이자 철학자인 오컴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 : 1249-1835)이 특히 자주 강력히 제시했기에 그의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 필자) 원리는 과학의 과학다움을 판별하는 주요 기준인데, 이에 따르면 자연에 대한 과학적 설명에 신이나 초자연을 끌어들이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죠.
물론 과학자들 중에는 무신론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교의 신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연에 대한 과학적 설명에 종사하는 한 그들도 (신과학이나 또는 신 선생님이 정확히 비판하신 유신론적 과학을 추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대개는 자신이 마치 무신론자이거나 불가지론자인 것 같은 태도로 작업을 합니다. 이들에게 신앙은 과학과 별개의 문제이거나 과학적 작업 이후에 시작되는 개인적 문제일 뿐이죠. 사실 그래야 하고요. 이 점에서 방법론적 자연주의의 일환으로서 무신론 내지 불가지론은 과학의 불가피한 토대인 셈입니다.
그런데 무신론이 자연적 실재의 특성이나 원리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재의 궁극적 본질에 대해 서술하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여기서부터는 경험적 검증이 가능한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죠. 무신론은 방법적 차원에서는 과학의 핵심 토대지만, 실재의 궁극적 본질에 대한 견해에서는 그저 여러 선택지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이제 방법이 아닌 신념의 문제가 되는 거죠. 신이나 초자연이 있다고 보든 없다고 보든, 적어도 우리가 사는 이 물리적 세계에서는 어느 쪽에도 확실한 경험적 증거란 없습니다. 신이나 초자연에 대해 누가 어떤 생각을 하건 그건 모두 경험적 검증과 무관하게 각자의 지식과 선호에 따라 전제되는 특정한 형이상학적 신념일 뿐입니다.
물론 증명의 부담 면에서 무신론자보다는 유신론자가 어깨가 좀 더 무거운 것이 사실입니다. 보이지 않는 대상에 관계된 한, 증명의 부담은 그것이 없다고 보는 쪽보다는 있다고 보는 쪽에 있으니까요. 하지만 세상에는 어떤 형태로든 신이나 초자연을 믿고, 비록 남에게 증명해 보일 수는 없어도 때때로 신이나 초자연을 경험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게다가 세계적으로 그 수는 여전히 압도적으로 많죠. 신이나 초자연에 대한 우리들 각자의 생각이 무엇이든, 그런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현존 자체는 일단 인정해야 할 겁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무신론자도 증명의 부담으로부터 결코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실제로 오랫동안 많은 무신론자들이 신이나 초자연이 없음을 증명하려 부단히 애써 온 것도 이 때문이죠. 고대 그리스의 이오니아학파 철학자들에서 근대의 데이비드 흄,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카를 마르크스, 오귀스트 콩트 같은 사상가들, 20세기 전반기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켕, 정신 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그리고 현대의 칼 세이건 같은 과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무신론자들이 그랬습니다.
도킨스도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그는 <만들어진 신>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던 과거 유신론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시도들을 하나하나 격파한 후에, 신을 끌어들이지 않고도 우연, 자연 선택, 창발성만으로 얼마든지 생명의 출현과 진화나 자연의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따위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따라서 신이 없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단언합니다.
신 존재 증명의 시도들을 격파하는 그의 작업은 흄이나 러셀이 이미 했던 작업에 과학의 옷을 살짝 덧입힌 것이기에 좀 진부하긴 합니다만, 어쨌거나 신 존재 증명의 시도가 모두 실패했다는 건 맞습니다. 이는 무신론자뿐만 아니라 심지어 유신론자들도 이미 오래전에 인정한 바죠. 인간의 사유와 논리로 간단히 증명될 정도의 존재라면 애초에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신이라고는 할 수 없을 테고, 설령 궁극적인 무언가가 정말 있다고 쳐도 그것이 꼭 인격적 신이라는 보장도 없으며, 무엇보다 그 인격적 신이 꼭 그리스도교의 신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죠. 눈치 채셨겠지만, 방금 이 말은 흄이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Dialogue Concerning Natural Religion)>(1779년)에서 자연의 정교함 뒤에는 설계자가 있으며 그가 바로 신이라는 식의 '설계 논증(design argument)'을 비판하면서 한 말을 빌려온 겁니다.
그런데 일전의 편지에서도 썼듯이 신 존재 증명의 시도들이 실패했음을 보여 주었다고 해서 이로부터 바로 그러니까 신은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무신론자인 데닛조차 도킨스가 신 존재 증명을 격파하는 데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한다고 불평한 것도 이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무신론자들은 신 존재 증명의 실패를 입증하는 일보다는 신을 전제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 주거나,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신이라는 상상의 존재에게 투사되는지를 보여 주거나, 신이 있다면 도대체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지 반문을 던지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신이 없음을 증명하려 해 왔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신이 없음을 증명하려는 이러한 시도들은 신이 있음을 증명하려는 시도와 마찬가지로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똑같이 동어반복이기 때문이죠. 둘 다 애초의 전제를 반복하는 순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쪽은 신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해 신이 있다는 결론으로 끝나고, 다른 쪽은 신이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해 신이 없다는 결론으로 끝나죠.
이런 형이상학적 문제를 이 자리에서 더 길게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무신론과 유신론 중에 어느 쪽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도 없고, 결코 끝나지 않을 싸움에 말려들 생각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무신론의 형이상학적 차원을 다소 장황히 다룬 것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무신론의 또 다른 차원, 즉 신념적 차원과 밀접히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실천적 신념으로서 무신론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무신론은 실재의 궁극적 토대에 대한 견해로서 형이상학적 신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운동과 관련된 실천적 신념이기도 합니다. 이 실천적 신념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형이상학적 신념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도대체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지 하는 윤리적 물음은 두 신념을 이어 주는 고리들 중의 하나죠.
많은 무신론자들은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신 따위는 없다는 증거이며, 진보를 저해하고 신의 이름으로 악행을 조장하며 정당화하는 종교야말로 악의 근원이자 악 자체라고 비난합니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외에도 무신론의 고전인 버트런드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1927년)나 최근의 문제작인 샘 해리스(Sam Harris)의 <종교의 종말(The End of Faith)>(2004년)도 이러한 견해를 피력한 대표적인 무신론 책들이죠.
별도의 책을 쓰지는 않았지만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인 스티븐 와인버그도 이런 견해를 표명해 온 대표적인 무신론자의 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처음 편지를 주고받던 때에 장 선생님께서 그의 말을 인용하셨죠? "종교가 있든 없든 선한 일을 하는 착한 사람과 악한 일을 하는 나쁜 사람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착한 사람이 악한 일을 하려면 종교가 필요하다."(<뉴욕타임스> 1999년 4월 20일)
와인버그의 이 유명한 말은 짧지만 강렬하고 인상적이죠. 도발적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제 생각에 그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우선 선과 악이 종교의 유무와 별 상관이 없다는 말은 분명 맞습니다. 종교가 있는 사람들 중에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있고, 종교가 없는 사람들 중에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착한 사람이 악한 일을 하려면 종교가 필요하다는 말은 논리적 비약이고 아무 근거 없는 독단일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와인버그는 우주의 출현과 진화는 순전한 우연의 산물일 뿐이며 거기에는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고 따라서 우주에 인격적 신이 끼어들 여지란 없다고 보는 전형적인 무신론자입니다. 그런 그에게 종교가 때때로 악에 연루되기도 한다는 사실은 종교를 공격하고 신이 없음을 주장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빌미가 되지요.
물론 역사와 현재 속에서 종교가 악과 밀접히 연루된 경우는 적지 않습니다. 역사 속의 수많은 전쟁과 학살 그리고 지금도 진행 중인 수많은 테러와 지역 분쟁에서 종교가 바탕에 깔려 있는 경우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죠. 하지만 그러니까 종교가 이런 전쟁, 학살, 테러, 분쟁의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종교가 이런 일들의 배경이나 원인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종교가 연루되지 않거나, 연루되더라도 별 영향력이 없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전쟁이나 테러 같은 악에 종교가 연루된 때에도 많은 경우 종교가 유일하거나 직접적이거나 핵심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종교는 그저 전쟁과 테러를 야기하는 복잡하게 얽힌 많은 원인들 중의 하나일 뿐이죠. 예를 들어 사람들은 흔히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의 핵심에는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의 대립이 있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은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이 말한 '문명의 충돌' 이론의 대중적 판본이기도 하죠.
하지만 종교학자 브루스 링컨(Bruce Lincoln)은 <거룩한 테러(Holy Terrors: Thinking about Religion after September 11)>(2003년)라는 책에서 이런 식의 단편적이고 이분법적인 통념을 비판합니다. 그렇다고 링컨이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가 <화씨 9/11>(2004년)에서 신랄하게 풍자한 것처럼 부시의 석유 욕심 따위를 들먹이는 건 아니고요. 링컨은 빈 라덴과 부시의 연설문, 테러범들의 지령문과 편지,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의 발언, 언론 기사 등에 대한 치밀한 담론 분석을 통해 빈 라덴과 부시의 대립이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단지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대립만은 아님을 밝혀냅니다. 거기에는 종교, 정치, 문화, 경제의 온갖 요소들이 근대적 욕망과 뗄 수 없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종교적 요소는 실질적으로 중요해서라기보다는 대중 동원의 정치적 수사 차원에서 도드라지게 만들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물론 링컨이 9·11에 대한 종교학자들의 견해를 대변하지는 않습니다. 종교학자들 중에는 9·11을 주로 종교적인 대립으로 보는 이들도 여전히 많습니다. 하지만 링컨 식의 견해가 중요한 이유는 종교를 마치 무슨 독립적 실체처럼 다루면,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점을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적으로 종교학자들 사이에서는 실체로서 종교 따위는 없다는 견해가 점점 더 지배적이 되어가고 있는데, 정작 다른 학문 분야 학자들이나 대중들은 오히려 종교를 실체화하고 그 영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좀 길었습니다. 다시 와인버그로 돌아오자면, 저는 와인버그가 종교가 악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고 비난할 때 그가 종교에 대한 너무 안이한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전쟁과 테러 같은 악을 양파 껍질 벗기듯 벗겨 가면 그 핵심에는 종교라는 알맹이가 떡하니 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물론 이는 러셀, 도킨스, 해리스를 비롯한 다른 무신론자들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링컨이 제대로 지적했듯이, 그런 알맹이로서 '종교' 따위는 없습니다. 다만 껍질부터 속까지 다른 온갖 요소들과 뗄 수 없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종교적인 것'만이 있을 뿐이죠.
저는 세상의 악에 종교가 연루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종교들 간의 대화 운운하며 종교의 좋은 측면만 말하는 책들보다는 링컨 같은 비판적 종교학자의 책이나 러셀, 도킨스, 해리스 같은 무신론자들이 종교를 향해 쏟아 붓는 독설을 읽는 게 더 흥미진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저는 그렇다고 와인버그나 러셀이나 도킨스처럼 종교가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종교가 악과 관련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그에 못지않게 종교가 인류의 선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한 바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전쟁이나 테러 외에도 성 차별, 인종 차별, 계급 차별, 성향 차별 등 온갖 차별과 억압에도 오랜 세월 종교가 연루되어 온 것 역시 사실입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근대 이전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종교적인 것이 사회의 근간이 아닌 곳은 없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근대 이후에도 종교적인 것들은 여전히 다른 요소들과 복잡하게 뒤엉켜 있죠.
성 차별을 예로 들어보죠. 가부장제는 인류 문명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 해 온 뿌리 깊은 차별적 제도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유전자에 새겨진 본성이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역사의 특정 시점부터 사회적으로 형성된 습성입니다. (본성과 습성은 복잡하게 얽힌 문제이고, 페미니스트들도 생물학적 성별(sex)과 사회적 성차(gender)를 이분법으로 나누는 짓을 더 이상 하지 않지만, 이는 일단 접어 두기로 하죠.) 물론 종교 역시 역사적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고요.
그렇다면 종교와 가부장제의 관계는 어떨까요? 무종교적이거나 무신론적이거나 반종교적인 페미니스트들은 종교는 가부장제의 핵심 원인이며 종교가 사라지면 가부장제도 약화되거나 사라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거다 러너(Gerda Lerner) 같은 페미니스트 역사학자는 가부장제가 종교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가부장제는 무엇보다 권력과 소유의 분배를 둘러싼 성차 정치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물론 역사 속에서 가부장제에 종교가 깊이 연루되기도 했습니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원인이 아닌 결과였을 뿐이죠. 게다가 역사 속에서 종교는 가부장제의 보루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타파에 현저히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중세 마녀 사냥이 가부장제와 종교적 광기의 끔찍한 결탁을 보여준다면, 가부장적 유대 관습을 어기고 여성들도 제자로 받아들였던 예수는 종교가 어떻게 양성 평등의 전망을 열어 주었는지를 보여 주죠. 가부장제는 거대한 사회적 제도이고, 종교는 그 속에서 제도를 강화하거나 파열시키는 요소일 뿐입니다.
계급 차별, 인종 차별, 성향 차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요소들이 뒤엉키며 차별들이 형성되는 과정이 있고, 종교적 요소는 그 속에서 차별을 심화하거나 약화하는 이중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종교는 권력자와 부자의 편이기도 했지만, 약자와 가난한 자의 편이기도 했습니다. 계급 차별과 종교의 관계가 무엇이든, 계급은 그 전부터 있었고, 종교의 존속 여부와 무관하게 앞으로도 한동안 사라지지는 않겠죠.
또 성서에 인종 차별적 구절이 수두룩하고, 노아의 세 아들 이야기가 인종적 우열의 기원 신화로 둔갑해 노예 제도를 정당화한 것은 사실입니다(창세기에서 대홍수 이후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은 채로 자는 것을 보고 차남인 함은 이를 비웃었지만 장남인 셈과 막내인 야벳은 노아의 몸을 이불로 가려주었다. 잠에서 깬 노아가 이를 알고 셈에게는 큰 축복을, 야벳에게는 중간의 축복을, 함에게는 대대로 종노릇 하리라는 저주를 내렸다. 셈족을 중심으로 한 종족 기원 신화에 불과했던 이 이야기는 8세기 아랍 노예 상인들에 의해 인종 기원 신화로 각색되었고, 중세 이후 그대로 가톨릭과 개신교에 스며들었다. 심지어 미국과 우리나라에는 지금도 이런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교인들이 적지 않다 : 필자). 그래서 도킨스나 해리스 같은 이들은 종교가 인종 차별 철폐에 기여하기는커녕 오히려 차별을 조장해 왔다고 비판하기도 하죠. 하지만 당장 개신교의 마르틴 루서 킹이나 이슬람의 말콤 엑스 같은 흑인 지도자들만 떠올려도 종교가 인종 차별 철폐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다고는 하지 못할 겁니다. 피부색에 대한 편견이 타자 인식에 뿌리박혀 있는 한 인종 차별은 종교의 지원이나 저항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지속될 겁니다.
또 그리스도교가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해 탄압과 심지어 살해를 조장하기도 했고, 지금도 가톨릭과 보수 개신교 교단들은 여전히 동성애 혐오를 고수하고 있는 데서 보듯이, 창조의 섭리를 운운하는 종교가 극심한 성향 차별적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 세상을 음양의 조화로 이해하는 종교적 사고도 양성 이분법에 갇혀 동성애에 대한 경멸을 조장해 왔습니다.
하지만 다종교 사회이자 세속 사회이기에 종교의 영향력이 분산되어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 혐오와 성향 차별이 여전히 극심한 것에 비하면, 퀴어 신학이 발전하고, 성적소수자 교단과 교회가 생기고, 게이나 레즈비언 사제와 목사가 증가하고 있는 서양의 혁신적인 개신교 교단들이 훨씬 더 평등적이며 진보적입니다. 결국 종교가 어떤 식으로 관련되든 이와 무관하게 양성 관계가 성과 사랑의 정상성(正常性) 범주를 계속 규정하는 한 성향 차별의 편견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이런 사례들은 종교가 때로 이런저런 사회적 악에 연루되기도 하는 사례들을 들어 종교를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 너무 단편적인 생각임을 말해 줍니다. 사례들을 모아서 구축한 일반화는 반대 사례들에 의해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죠. 종교 비판자들이 종교와 악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를 제시하면, 종교인들이나 종교에 호의적인 사람들은 종교가 선을 증진시킨 반대 사례를 얼마든지 제시할 겁니다. 어느 쪽이든 사례는 무궁무진하죠.
저는 무신론적 신념에 근거해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운동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든 신념에 따라 행동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특히 무신론 운동이 합리성과 인간성의 증진에 기여하는 바는 분명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하지만 무신론 운동이 종교와 종교인에 대한 비판에 지나치게 골몰하는 모습은 좀 염려스럽습니다. 그 비판은 건전하고 유용한 충고를 넘어 흔히 맹목적인 비난이 되어 버리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는 서로 다른 신념의 소유자들 사이의 대화 자체를 가로막습니다. 대화는커녕 갈등만 조장할 뿐이죠.
전략가 데닛과 협상가 윌슨은 유신론자들과의 대화마저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이와 달리 전사 도킨스에게는 유신론자들과의 그 어떤 대화도 불가능해 보입니다. 왜 굳이 유신론자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는 말인가? 도킨스는 아마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과학의 성과를 인정하지 않고, 무신론을 모든 악의 근원으로 매도하며, 무신론자는 물론 자기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의 그 어떤 대화도 거부하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종교인의 태도와 별로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만, 다시 요약하자면, 무신론은 과학적 방법으로서는 필요불가결하고, 형이상학적 신념으로서는 유신론과 나란히 다양한 선택지들 중의 하나이며, 실천적 신념에 따른 운동으로서는 합리성과 인간성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신념이 맹목적이 되어 다른 신념들에 대한 비난과 매도로 치닫는다면, 그것은 차이와 다양성의 공존을 모색해야 하는 우리 시대의 당면 과제에 기여할 바가 별로 없습니다.
무신론의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고립된 개인들에 불과했던 무신론자들이 결집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고, 이론 투쟁이자 사회적 실천으로서 무신론 운동의 역사는 아직 시작 단계에 있습니다. 이런 계몽적 시기에 싸울 대상을 설정하고 비판적 대립각을 세우는 일은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겠죠. 하지만 무신론 운동이 좀 더 진전된다면 비판과 비난을 넘어 대화와 소통의 창구를 마련할 수 있는지 여부가 그 운동의 미래를 좌우하게 되리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종교 연구자들이 과학에 별로 관심이 없는 이유: 역사적 맥락
무신론 이야기는 이쯤하고, 이제 종교인들이나 종교학자들은 과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장 선생님의 물음을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그리스도교와 관련해서는 신 선생님께서 자세히 설명을 해 주셨으니, 저는 종교학에 관련해, 그리고 그리스도교를 살짝 포함해 여러 종교들에 관련해 몇 자 적어 보겠습니다.
비교적 간단한 종교학자들, 아니 종교 연구자들의 경우부터 이야기를 해 보렵니다. 잠시 옆으로 새자면, 제가 '종교 연구자'라고 한 것은 '종교학자'라는 용어가 너무 협소하기 때문입니다. 영어로 'history of religions'라고 불리던 좁은 의미의 종교학은 현상학이나 역사학의 방법을 활용해 문헌 분석에 치중하던 진영을 주로 지칭해 왔습니다. (영어권에는 우리처럼 한자를 조합해 만든 '종교학'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죠.)
하지만 종교는 종교학 외에도 역사학,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등 여러 분야에서도 꾸준히 연구되어 왔고, 특히 지난 수십 년간 이 분야들 간의 경계는 아주 희미해졌죠. 따라서 지금은 종교에 관한 다양한 학문적 연구들을 포괄하는 '종교 연구', 영어로 'religious studies', 'study of religion', 'academic study of religion' 같은 용어가 더 자주 쓰입니다. 제가 이제부터 할 이야기도 좁은 의미의 '종교학'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종교 연구'에 관련됩니다. (포괄적인 종교 연구의 모든 분야를 다 다루기는 힘든 일이니 일단은 인류학과 종교학 위주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아까 제가 간단하다고 말한 건 종교 연구 진영에서는 최근까지도 종교와 과학이라는 주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종교 연구가 거쳐 온 역사적 과정에 있습니다.
좁은 의미의 종교학 또는 현대적 의미의 학문적 종교 연구는 19세기 후반에 고대 문헌을 다루는 문헌학에서 출발했습니다. 종교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영국의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Friedrich Max Müller, 1823∼1900년.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연작 시집 <겨울 나그네>와 <아름다운 물레방앗간 아가씨>를 쓴 독일 시인 빌헬름 뮐러(Wilhelm Müller)의 아들로 영국으로 이주해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가르쳤다. 학문적 저작 외에도 자전적 소설 <독일인의 사랑>이 잘 알려져 있다 : 필자)는 산스크리트 어를 전공한 고대 인도 문헌 전문가였죠. 그에게는 그리스도교 중심주의나 오리엔탈리즘의 혐의가 짙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그의 전체 학문적 노작들과 특히 1873년 저서 <종교학 입문(Introduction to the Science of Religion)>은 특정 종교에 매몰되지 않고 여러 종교들을 비교하며 유적 범주로서 '종교'의 보편적 특성을 파악하려는 종교학의 기본 원칙을 확립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그가 남긴 "하나만 알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는 말은 지금도 종교학의 금과옥조로 여겨질 정도죠.
하지만 뮐러 식의 종교학은 하나의 흐름을 형성할 정도로 발전하지는 못했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종교 연구는 주로 인류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Edward Burnett Tylor, 1832∼1917년)는 그 핵심 인물이죠. 인류학은 주로 '미개 사회'로 여겨지던 소규모 부족 사회를 연구하는 학문이었고, 따라서 타일러의 관심도 '원시 종교'에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종교의 기원을 알아내겠다는 거였죠. 그는 현지 조사는 하지 않고 다른 이들이 작성한 다양한 현지 조사 자료를 가지고 일반 이론을 세우려던 이른바 '안락의자 인류학자'였는데요, 어쨌든 그는 긴 연구 끝에 종교의 기원은 '정령 숭배'(animism)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데 타일러는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년) 식의 사회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있었죠. 사회 진화론은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사회 영역에 적용하면서 서구 중심주의로 치우쳐 약육강식과 적자생존 개념을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 둔갑시킨 사상 체계입니다. 그렇기에 타일러는 부족 사회를 인류의 진화와 진보의 초기 단계를 보여 주는 화석으로 여겼고, 정령 숭배를 미개한 원시인들이 사물의 인과 관계를 잘못 파악한 사고의 오류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단정해 버렸죠.
이후 사회 진화론에 근거한 타일러 식의 종교 이론은 지나치게 주지주의적이며 서구 중심적이고 제국주의적이라는 비판 속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대신에 20세기 전반기 인류학에서는 사회 진화론을 거부하는 상대주의적 분위기 속에 부족 사회를 그 자체의 고유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관계의 총체 속에서 파악하려는 경향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20세기 전반기 종교학계는 크게 두 진영으로 양분되었습니다. 하나는 철저한 역사학 방법에 따라 사료를 분석하며 종교들의 역사를 서술하는 역사학적 종교학이고, 다른 하나는 판단 중지와 감정 이입을 중시하며 종교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현상학적 종교학이죠. 물론 둘 다 사회 진화론을 거부하고 종교를 진화나 진보의 기준에 따라 파악하지 않으려 한 점은 비슷합니다.
문제는 바로 이 대목입니다. 인류학과 종교학에서 사회 진화론이나 진보의 서사가 거부된 것은 이 학문들이 서구 중심주의를 벗어나기 시작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와 더불어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까지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분위기가 만연하게 된 것이죠. 인류학은 기원이나 진보보다는 사회와 문화에서 종교가 지닌 기능이나 의미에 더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또 종교학에서는 통계 연구에 근거한 사회학적 종교 연구, 프로이트 식의 정신 분석학적 종교 연구, 행동 심리학이나 실험 심리학에 열중하던 심리학적 종교 연구를 '환원주의'로 비판하면서 종교 경험의 고유성에 집착하는 분위기가 점점 강해졌죠.
루마니아 출신으로 1945년 이후는 프랑스에서, 1956년 이후 평생 미국에서 활동한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년)는 그 정점에 서 있던 인물입니다. 20세기 후반 들어 엘리아데의 막강한 영향력 속에 종교학에서는 '성스러움'은 다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고유성을 지닌다는 생각이 지배하게 되었고, 공감적 태도 및 해석학적 방법에 따라 종교를 '종교 그 자체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인류학과 종교학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종교에 대한 자연과학적 연구는 별로 환영받지 못했고, 종교와 과학에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도 별다른 학문적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되었죠.
종교 연구자의 과학 보기: 메타적 관심과 분리주의
한편, 종교 연구 진영에서 과학이나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미약했던 데는 역사적 맥락 외에도 다른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로 종교 연구 자체의 학문적 속성입니다. 인류학과 종교학은 그것이 과학적 진리든 종교적 진리든 '진리' 자체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신'이나 '초자연' 같은 비경험적 실재에도 별로 관심이 없죠. 인류학과 종교학은 메타적인 학문입니다. '진리' 자체보다는 '진리에 관한 주장들이나 담론들', 또 '신'이나 '초자연' 자체가 아니라 '신에 관한 생각', '초자연에 관한 담론', '신이나 초자연을 상정하고 행해지는 실천'이 주요 관심사죠. 진리니, 신이니, 초자연이니 하는 형이상학적 문제는 인류학과 종교학의 학문적 관심 바깥에 있습니다.
물론 모든 인류학자와 종교학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특정 종교의 신자나 인류의 보편적 종교성을 중시하는 학자들 중에는 자신의 실존적이고 종교적인 관심을 그 학문적 작업 속에 끼워 넣으려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아니, 적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사실 아주 많죠. 특히 인류의 보편적 종교성을 중시하는 경향은 주류 종교학계를 오랫동안 지배해 왔습니다. 지난 한 세대 동안 인류학과 종교학에서는 좀 더 철저한 학문성을 추구하면서 이런 경향을 탈피하려는 흐름이 크게 대두했죠. 인류학은 문제가 비교적 덜했지만, 종교학은 종교학 자체가 종교화되는 데 대한 위기의식이 매우 심각했기 때문에, 종교학의 탈종교화 내지 세속화가 종교학의 학문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관건으로 부각되어 왔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국내외 종교학계는 종교적인 성향의 종교학자들과 비종교적이고 세속적인 성향의 종교학자들이 종교학의 정체성과 학문성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며 대립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과학이나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관심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적인 종교학자들은 진리, 신, 초자연, 성스러움 등에는 직접적인 관심을 갖지만, 환원주의를 거부하는 분위기 때문에 과학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또 세속적인 종교학자들은 진리, 신, 초자연, 성스러움 자체에 아예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에 대한 논의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 종교와 과학 논의에 역시 별로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그들은 사회, 문화, 역사의 맥락에서 진리 주장들이나 신과 초자연에 관련된 담론과 실천을 둘러싼 관계와 권력의 역학 구조에 더 많은 관심을 둡니다.
종교 연구자들이 과학이나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관심이 적은 이유는 또 있습니다. 과학과 종교를 나름의 고유성을 지닌 별개의 영역으로 분리하는 태도가 바로 그것이죠. 물론 이런 태도는 다른 과학자나 종교인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무신론자인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1941∼2000년)는 과학과 종교는 "중첩되지 않는 교도권(non-overlapping magisteria, NOMA)"을 지니며, "각기 인간의 삶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고유한 영역의 주인"이라고 봅니다. 과학이 사실적 지식의 영역이라면, 종교는 가치와 의미의 영역이라는 거죠.
개신교 신학자 랭던 길키(Langdon Gilkey, 1919∼2004년)도 비슷한 방식으로 과학과 종교를 분리합니다. "과학은 객관적 자료를 설명하며, 종교는 우리의 내적 경험과 존재에 대한 물음을 다룬다. 과학은 '어떻게'를 물으며, 종교는 '왜'를 묻는다." 이와 비슷하게 많은 종교 연구자들도 과학과 종교를 두 개의 언어 또는 두 개의 게임으로 보아 양자를 분리하는 입장을 취합니다. 이들에 따르면 과학과 종교는 애초에 역할이 다르기에 서로 만나거나 부딪힐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서로 각자의 길을 가면 그만이라는 거죠.
그런데 이런 식의 분리주의들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제각기 특정한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굴드의 분리주의에는 사실과 의미를 분리하고 종교를 의미의 영역에 국한함으로써 종교가 감히 사실의 영역을 넘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사실의 문제는 과학이 전담할 터이니, 종교는 가치와 의미를 찾는 데나 신경 쓰라는 거죠. 비록 도킨스보다 부드럽기는 해도 굴드 역시 철저한 무신론자입니다. 그리고 도킨스가 전투적 방식으로 종교와의 대화를 거부한다면, 굴드는 분리를 통한 타협이라는 온건한 방식으로 종교와의 대화를 회피하죠. 거부든 회피든 대화가 없기는 마찬가집니다. 이와 상반되게, 길키의 분리주의는 과학을 사실의 영역에 가두려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과학은 자연의 원리를 탐구하는 본분에나 충실해야지 인간 삶에 관련된 가치와 의미에는 함부로 관여하지 말라는 거죠. 여기서도 과학과 종교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필요 없고, 사실상 대화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종교 연구자들의 분리주의에도 역시 특정한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는 우리가 세계를 파악하는 관점을 크게 상식적 관점, 과학적 관점, 미학적 관점, 종교적 관점으로 나누고, 이들 네 관점은 서로 구별되며 각기 고유성을 지닌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과학과 종교를 이런 식으로 구분하죠. "종교적 관점은 일상적 삶의 실재들에 대한 물음을 제기할 때 세계의 소여성(world's givenness)을 그럴듯한 가정들의 소용돌이 속으로 해체시켜 버리는 제도화된 회의주의에 의존하지 않는다. 반대로 종교적 관점은 더 넓은 비가정적 진리들로 여겨지는 것에 의존한다." 기어츠는 과학이란 단지 그럴듯한 가정이자 제도화된 회의주의에 불과하기 때문에 세계와 인간 삶에 관련된 실존적 물음에 답할 능력이 없는 반면, 종교는 가정의 수준을 넘어서는 진리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에 이런 물음들에 답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거죠. 기어츠는 종교를 상징 체계로서 문화의 일부로 파악하는 해석학적 인류학자인데요, 그는 과학을 그 한계 안에 묶어두는 한편 가치와 의미를 문화로서 종교의 독점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데 기어츠의 이런 분리주의는 상징이나 문화에 관한 협소한 이해에 근거합니다. 흔히 상징은 어떤 고유한 의미를 담고 있는 상자 같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의미란 상자 속에 이미 들어 있던 고정된 내용물이 아니라, 상자를 여는 순간 그 행위가 만들어 내는 효과일 뿐입니다. 그런데 기어츠는 상징과 의미를 실체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죠. 문화와 종교를 상징체계로 보는 그의 견해도 역시 이런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그는 문화를 다양한 의미들의 총체로 봅니다. 하지만 문화는 단지 의미의 영역이 아닙니다. 문화는 의미를 구성하는 행위의 영역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복잡한 관계의 그물 속에서 상이한 집단들 사이에서 담론과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역동적인 장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보면 과학을 의미, 가치, 상징, 문화, 종교 등으로부터 떼어놓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과학을 의미와 분리하려 해도 과학은 언제나 의미의 영역에 개입하곤 합니다. 또 온갖 가치와 이데올로기가 과학에 스며들기도 하죠. 과학은 설명의 모형으로 상징을 활용하기도 하고, 과학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과학은 종교를 비롯한 다른 많은 문화적 요소들과 더불어 문화의 엄연한 일부로서, 다른 문화적 요소들과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역동적인 상호 작용을 주고받습니다. 하지만 기어츠는 과학을 애써 문화나 종교로부터 격리시킴으로써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상호 작용들을 애써 무시합니다. 굴드나 길키가 그랬던 것처럼 기어츠 식의 분리에서도 과학과 종교의 대화란 애초에 불가능하죠.
지금까지 종교 연구 진영에서 과학이나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별로 관심이 없는 이유들을 말씀드렸는데요, 사실 엄밀히 말하면 관심이 전혀 없던 것만은 아닙니다. 역사학적 종교학자들은 특정 시대나 지역의 종교사를 다루면서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다루기도 합니다. 또 이론적 문제를 다루는 종교 연구자들은 종교와 과학에서 은유나 상징이 사용되는 방식을 분석하기도 하죠.
최근에는 생명 공학의 발전이 새로운 윤리적 문제를 야기하면서 과학자들과 종교인들 사이에 치열한 논의가 벌어지자 여기에 직접 참여하거나 논의의 과정과 구조를 분석하는 종교 연구자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주제들은 양자 역학, 상대성 이론, 대폭발 이론, 진화론, 카오스 이론, 인지 과학, 뇌과학 등의 주제가 중심이 되어 온 과학과 종교 논의 지형 전반에서 보면 단지 주변적 위상을 차지할 뿐입니다.
이와 같이 종교 연구 진영에서는 역사적 맥락이나 그 학문적 속성과 방법의 독특성으로 인해 과학과 종교 논의가 별다른 관심거리가 되지 못해왔고, 관심을 보이는 일부의 경우에도 과학과 종교의 주요 주제들이 아닌 주변적 주제들만 건드리고 있는 형국입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좀 상황이 달라지고 있는데요, 특히 인지 과학이 발전하면서 '인지적 종교 연구' 분야가 생겨나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지 과학은 종교와 과학 논의에 참여하고 있는 학자들 사이에서 현재 가장 활발하고 왕성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주제이기 때문에, 인지적 종교 연구의 출현과 발전은 매우 고무적입니다. 게다가 이 논의에는 무신론적, 종교적, 중립적 성향의 다양한 종교 연구자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죠. 이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새로 시작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다음에 함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겠죠.
과학과 종교'들'의 관계 유형
이제 여러 종교들은 과학이나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종교들은 그 종류가 워낙 많고, 종교들마다 과학에 대한 견해도 천차만별이기에 이를 일일이 설명하거나 간단히 유형화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변명하자면 제 답장이 늦어진 것도 사실 이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이참에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들 중에 이슬람이나 불교에 관련된 종교와 과학 논의를 정리해 보려 했었죠. 두 분도 아마 저에게 그런 기대를 하셨겠죠? 그런데 사실 제가 불교 전문가가 아닌지라 이제야 오랜만에 이쪽을 뒤지기 시작했는데, 좀 놀랐습니다. 그동안 국내에서도 불교학자들이나 불자 과학자들의 논문, 저서, 번역서가 생각보다 많이 쌓였더군요. 몇 년 전만 해도 저역서 두세 권과 논문 몇 편이 고작이었는데 말입니다. 게다가 일본어나 영어로 된 논문과 저서까지 치면 읽을거리는 훨씬 더 많아지죠.
또 국내에는 아직 별로 없지만 외국에서는 이슬람과 과학에 관한 연구도 꽤 많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교에 비하면 불교나 이슬람 쪽 논의는 아직 그 양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지만, 일반적 주제에서 세부적 주제까지 상당히 넓고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불교나 이슬람 전문가가 아닌 저로서는 이런 방대한 양의 논문과 책을 섭렵하기도, 복잡한 과학적 지식과 교리적 논의를 수반한 까다로운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아직 제 공부가 모자란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설령 제가 나름대로 이해한 바를 요약하고 정리한들 그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불교와 과학, 이슬람과 과학, 이런 이야기는 어쨌거나 불교 전문가와 이슬람 전문가에게 직접 듣는 게 더 낫겠지요.
그렇다고 종교 연구 진영에서 다양한 종교를 아우르며 종합적으로 정리한 저서나 번역서나 원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좀 난감했습니다. 그러니 두 분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할지 모르겠지만, 종교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만 하는 것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우리나라의 여러 종교들에서 종교와 과학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짚어 보도록 하죠. 저는 그 관계 유형을 무관심, 갈등, 분리, 대화/통합의 네 가지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이 유형화는 존 호트(갈등, 분리, 접촉, 지지)와 이언 바버(갈등, 독립, 대화, 통합)가 제시한 유형화를 빌려와 살짝 합치고, 거기에 무관심이라는 유형을 추가한 겁니다.
우선 무관심은 언뜻 분리와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 좀 다릅니다. 분리는 나름의 이론적 틀에 따라 과학과 종교를 각자의 고유한 영역에 배치하려 하죠. 거기에는 나름대로 과학과 종교에 대한 일정한 성찰이 있습니다. 이와 달리 무관심은 말 그대로 무관심이죠. 과학자들과 종교인들 중에는 과학과 종교 문제에 아예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외 학자들은 대개 그리스도교 위주로 논의를 해 온 데다 갈등을 극복하고 대화와 통합을 추구하는 데 주력하다 보니 무관심이라는 문제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죠. 하지만 무관심은 그 자체로 하나의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는 특정한 태도입니다.
우선 무관심은 과학자나 종교인, 또 종교의 종류를 막론하고 두루 나타나지만, 특히 무관심이 지배적인 것은 유교(儒敎), 무교(巫敎), 그리고 대개의 신종교들입니다. 유교는 과연 유교가 종교냐 아니냐는 논쟁이 벌어질 정도로 종교적 여타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요소가 복잡하게 뒤엉킨 복합적 총체입니다. (유교가 종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한 세기 전부터 지금까지 동아시아에서 줄곧 제기되어 온 오랜 문제입니다. 19세기 말 중국의 근대 개혁가 캉유웨이(康有爲, 1858∼1927년)가 최초로 유교 종교화를 선언했던 것이나, 우리나라에서 1995년에 성균관에서 유교 종교화를 선언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죠.) 게다가 오늘날 유교는 하나의 독립된 종교로서가 아니라 충효와 예절, 가족 제도와 제사 등으로 우리 일상 속에 녹아 있는 가치관이나 관습 정도로만 존재합니다.
종교의 문제는 어쨌든 과학과 나름의 윤곽을 지닌 특정 종교 사이의 문제죠. 하지만 유교는 그런 윤곽이 희미하니 딱히 이런 문제가 제기되지를 않는 거죠. 무교나 대개의 신종교들의 경우는 좀 다른데요, 과학과 종교 논의는 나름의 교리적 체계를 갖춘 종교들에서 주로 이루어지는데, 민간 종교인 무교나 아직 형성 단계 초기에 있는 신종교들은 그런 체계가 미약하기 때문에 이런 논의 자체가 벌어질 기회가 없습니다.
다음으로 갈등은 여러 종교들의 안팎에서 좀 다르게 나타납니다. 일전의 편지에서도 소개했듯이, 센서스 결과를 보면 '종교가 없다'라고 답한 사람이 우리나라 총인구의 거의 절반에 이릅니다. 물론 그들이 모두 무신론자이거나 반종교주의자인 것도 아니고, 그들 중 상당수는 귀신이나 운명을 믿거나 제사를 지내거나 토정비결을 보는 등 일정한 종교적 사고를 하고 종교적 실천을 행하기도 하죠. 하지만 어쨌든 우리 사회에서 종교에 대한 무관심이나 반감의 정도가 매우 높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중에서 무신론자들이나 과학 지상주의적 태도를 지닌 사람들 그리고 반종교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종교란 '미신'과 마찬가지로 비합리적인 것으로 과학과 공존할 수 없으며, 과학이 진보하면 결국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대개 과학이나 종교에 별 관심이 없고요. 어떤 경우든 과학과 종교 논의는 완전히 딴 세상 이야기일 뿐이죠.
종교들의 경우, 그리스도교와 관련해서는 종교와 과학이 양립할 수 없다고 보는 견해가 그 안팎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반면, 다른 종교들과 관련해서는 이런 견해가 주로 그 바깥에서만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그리스도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가 과학적으로 온통 모순투성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죠. 또 그리스도교인들 중에 근본주의적 성향의 신자들은 과학이 오류로 가득하며 오만하다고 여기고는 합니다. 그리스도교와 과학의 관계가 얼마나 다양한지에 대해서는 신 선생님께서 자세히 말씀해 주셨으니 여기서 더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다른 종교들의 경우는 종교마다 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외부자들이 특정 종교가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하며 종교와 과학의 공존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경우는 여전히 많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교와 달리 다른 종교들에서는 종교가 나서서 과학을 거부하거나 공격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신 선생님께서도 지적하셨듯이, 그리스도교에서 유독 과학과 종교의 갈등이 심한 것은 창조주 절대자 신에 대한 생각, 로고스 중심주의, 그리고 문자주의적인 경전 이해 때문이죠. 하지만 다른 종교들에서는 대개 이런 측면들이 그리 심각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갈등의 소지가 그리 크지 않은 거죠.
불교처럼 궁극적 실재를 비인격적인 우주적 법칙으로 본다면 우주의 생성이나 생명의 진화에 관련된 창조주 신의 문제가 제기될 이유가 없습니다. 또 불교에는 방편설이 있어서 경전과 교리에 상식이나 과학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어도 이게 그리 심각하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상징적 수단 정도로 보면 그만이죠. 예를 들어 티베트 불교에는 현실 세계와 초월 세계를 아우르는 우주를 묘사한 만다라가 있는데, 온갖 붓다들, 보살들, 신들이 그려진 것이든 순수한 기하학적 문양으로 그려진 것이든 그 이미지들은 액면 그대로가 아닌 고도의 상징적 장치로 이해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갈 것은 방금 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주로 엘리트적 불교에 해당된다는 점입니다. 불자들 중에도 경직된 문자주의적 신앙을 가진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며, 그들은 불교가 과학보다 우월하다거나 과학과 불교가 상충된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또 대개의 불자들은 무관심 유형에 속하는 경우가 많죠. 애초에 단일한 실체로서 '불교'가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신앙과 실천의 복합체로서 '불교들'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다양한 태도들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점까지 고려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너무 복잡해지니 일단 여기서 접겠습니다.
세 번째로 과학과 종교 각각의 고유한 영역을 인정하는 분리 입장도 종교의 유무나 종류에 상관없이 두루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원불교에는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창시 이념이 있습니다. 이것은 물질과 정신을 실체적으로 구분하는 서구의 경직된 근대적 이분법과는 좀 다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이에 따르면 과학과 종교는 각각 물질과 정신의 영역에 관련되는 것으로 적당히 분리되죠. 원불교에서 과학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얼마나 이루지고 있는지는 아직 살펴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없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물질 개벽과 정신 개벽을 구분하는 것을 보면 논의가 그리 활발할 것 같지는 않네요.
마지막으로 대화 내지 통합 유형입니다. 종교들 바깥에서는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은 아마 없겠죠. 반면에 종교들은 과학과 종교의 적극적인 만남을 추구하고, 그 만남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받아들여 변화를 도모하며, 나아가 과학에 새로운 동기와 전망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물론 종교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신학이나 교학 체계가 정교하고, 과학이라는 거대한 상대와 마주할 수 있는 규모와 세력을 가진 일부 종교들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경우 그런 종교는 주로 그리스도교와 불교죠.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신 선생님께서 자세히 다루어 주셨으니, 저는 두 종교를 비교하며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종교들의 과학 보기: 그리스도교와 불교, 비슷하면서도 다른
"과학은 종교를 오류와 미신으로부터 정화할 수 있으며, 종교는 과학을 우상 숭배와 절대화로부터 정화할 수 있습니다. 과학과 종교는 서로를 좀 더 넓은 세계, 즉 과학과 종교가 함께 번성할 수 있는 세계로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진정한 우리가 되기 위해, 우리가 되어야 할 바가 되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메시지', 1990년)
"과학적 발견들이 우주론 같은 지식 분야들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제공한다면, 불교의 설명들은 때로 과학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분야를 새로운 방식으로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 우리의 대화는 과학뿐만 아니라 종교에도 유익을 제공해 왔습니다. (…) 과학은 물질적 세계를 이해하는 탁월한 도구였으며, 우리 삶이 크게 진보하게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은 내적 경험들에 관해서는 별로 진전을 이루지 못해 보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불교는 마음의 작용에 대한 깊은 탐구를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학문적 차원에서 과학자들과 불교학자들 간의 더 많은 논의와 협동 연구는 인간 지식의 확장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과학과 종교의 협력', 2003년)
두 인용문에서 교황과 달라이 라마의 생각은 아주 비슷합니다. 과학과 종교는 비록 그 역할이 다르지만 이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히 얽혀 있기 때문에 함께 대화할 수 있고 협력해야 한다는 거지요. 두 사람은 가톨릭과 불교의 세계적 지도자들인 만큼 이들의 생각은 가톨릭과 불교에서 과학과 종교의 대화와 통합이 추구되고 있는 지배적인 분위기를 아주 잘 보여줍니다. 물론 신 선생님께서 보여 주셨듯이 이런 입장은 주류 개신교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죠.
그렇다고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세부적인 논의에서마저 비슷한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다르고 교리가 다른 만큼 이들이 과학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내용도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죠. 우주론은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는 대표적인 영역입니다. 특히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우주의 생성과 전개에 관한 주요 이론인 대폭발(Big Bang) 이론에서 견해 차이를 드러냅니다.
대폭발 이론 이전에 과학계에서는 우주가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죠. 당시에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했던 듯합니다. 우주가 영원하다면 창조와 종말을 말하는 그리스도교 교리와 도무지 조화될 수 없기 때문이었겠죠. 그런데 1960년대에 대폭발 이론이 사실상의 정설로 굳어지면서 이는 종교와 과학 논의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가 되었습니다. 137억 년 전에 우주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작은 물질로부터 어마어마한 폭발과 더불어 생겨났다는 대폭발 이론은 우주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신의 창조에 의해 시작된 것이라는 그리스도교 교리와 잘 부합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대폭발 이론은 지금도 계속 발전 중인 이론이며 거기에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시작이 있었다면 끝도 있을까 하는 문제, 폭발의 시발점인 작은 물질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던 것인가 아니면 신이 무로부터 창조한 것인가 하는 문제, 그리고 시작과 끝이 있다면 이는 유일한 일인가 아니면 반복되는 일인가, 우주는 하나인가 아니면 여럿인가 하는 문제들이죠.
우주의 종말에 대해서는 우주가 언젠가는 팽창을 멈추고 다시 수축하기 시작해 결국 블랙홀 특이점이 될 것이라는 대붕괴(Big Crunch) 이론이 나오면서 일단 해소되는 듯했습니다. 우주는 대폭발이라는 시작과 대붕괴라는 종말 사이에 놓은 유한한 피조물이라고 볼 수 있게 된 거죠. 하지만 대붕괴는 우주의 미래에 대한 여러 이론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우주는 점점 팽창이 느려지다 에너지가 다 소진되면 팽창을 멈춘 채 차갑게 죽어버린 상태로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견해도 우주의 미래에 관한 가능성 있는 이론이죠. 두 이론 중에 좀 더 지지를 많이 받는 것은 전자이고, 그리스도교도 이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종말 교리와 잘 부합하기 때문이죠.
대폭발과 대붕괴가 일회적 사건이냐 아니면 반복적 사건이냐에 대해서도 다양한 입장이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대폭발과 더불어 생겨난 것이고 대붕괴와 더불어 다시 소멸할 것이기 때문에 대폭발과 대붕괴는 일회적 사건이라고 보는 이도 있는가 하면, 비록 지금 같은 우주의 모습이 그대로 재연되지는 않겠지만 대폭발과 대붕괴는 무한히 반복될 것이라는 식의 진동 우주론도 있습니다. 또 우주는 지금의 우리 우주밖에 없다고 보는 시각도 있고, 무한히 많은 우주들이 서로 연결된 채로 제각기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과정이 영원히 지속된다고 보는 다우주(multiverse) 이론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물론 대폭발과 대붕괴가 일회적 사건이라는 입장, 그리고 지금 우리의 우주가 존재하는 유일한 우주라는 입장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불교도 대폭발 이론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다만 불교는 우주의 시작과 종말이나 우주의 수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교와 다른 입장을 취하죠. 불교는 그리스도교와 달리 대폭발과 대붕괴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무한히 반복되는 사건이라고 보는 진동 우주론 쪽을 택합니다. 불교는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히 순환하는 우주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또 불교는 우주가 여럿이라는 다우주 이론도 진지하게 수용합니다. 우주가 무한히 많을 수 있다는 생각이 불교 교리와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죠.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대폭발 이론을 비롯한 우주 이론들을 채택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이렇게 서로 사뭇 다릅니다. 이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실재관과 시간관, 그리고 궁극적 실재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시간이든 공간이든 물질이든 실재하는 것은 없으며 다만 공(空), 즉 무한히 서로 얽힌 상호연기(相互緣起)의 관계만이 있다고 봅니다. 반대로 기독교는 비록 고전적 실재론에서 비판적 실재론으로 돌아서기는 했지만, 여전히 시간, 공간, 물질의 실재성을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또 불교는 우주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는 순환적 우주관을 갖고 있는 반면, 그리스도교는 우주는 단 한 번만 생성하고 소멸한다는 직선적 시간관을 갖고 있죠. 그리고 이 모든 차이는 결국 모든 존재의 근본인 궁극적 실재를 비인격적인 우주적 원리로 보느냐 아니면 인격적인 신으로 보느냐 하는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이기도 하죠. 불교는 궁극적 실재를 비인격적으로 보기에 창조자 따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따라서 창조자의 의도나 목적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교는 궁극적 실재를 인격적 신으로 보기 때문에 창조자의 창조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지, 창조자가 우연으로 가득한 이토록 무심한 우주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하는 문제들과 씨름 합니다.
이런 차이들은 우주와 생명계 안에서 인간의 지위, 양자 역학, 진화론 같은 다른 과학적 주제들에 관련해서도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불교는 인간의 고유성 문제에 별 관심을 두지 않지만, 그리스도교에서 인간의 고유성은 매우 중요한 문제죠. 인간에 대한 이해는 곧 그 창조주인 신에 대한 이해와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또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고전적 물질관을 대체한 양자 역학에 대해서도 상이한 해석을 제시합니다. 불교는 양자 역학이 말하는 확률적 실재를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불교적 이해와 결부시키려 하는 반면, 그리스도교는 확률과 신의 관계에 더 많은 관심을 쏟지요. 진화론에서도 불교는 생물계 중심적 입장에서 종들 간의 연기 관계 자체에 관심을 두는 반면, 그리스도교는 인간 중심주의까지는 아니어도 인간이 주요하게 고려되는 방식으로 진화의 과정을 이해하며, 생명과 인간의 진화에 관련된 신의 의도와 목적을 끊임없이 묻습니다.
전반적으로 보면 그리스도교보다는 불교가 과학과의 대화에서 좀 더 문제들을 쉽게 해결해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일부 불자들이 이런 점을 들어 불교가 그리스도교보다 과학에 더 잘 부합한다고 말하는 것에는 별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대폭발 이론에서 우리의 관찰과 추론이 접근할 수 있는 한계인 플랑크 시간(폭발 후 10-43초)과 최초의 특이점(t=0) 사이의 시간에 벌어진 일들을 알아내는 일이나, 대폭발과 대붕괴가 한 번인지 여러 번인지 하는 문제 등을 경험적으로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상이한 이론들이 여러 이유에서 지지를 더 받거나 덜 받는 차이는 있어도 어느 이론도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기는 힘들죠. 물론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우주관 사이에서도 어느 쪽이 옳다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불교와 과학, 그리스도교와 과학 사이의 만남과 대화는 다양한 이론들과 다양한 종교 교리들 사이에서 선택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진화론의 경우도 저로서는 오히려 다윈주의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여 진화의 낭비, 적자생존, 생물들과 인간의 분투와 고통 같은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리스도교의 노력이 좀 더 흥미롭습니다. 불교는 이런 문제들을 상호연기 교리로 간단히 정리할 뿐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이더군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불교와 과학의 만남이든, 그리스도교와 과학의 만남이든, 어느 쪽이나 불교와 그리스도교라는 상이한 종교들 각자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일일 뿐이라는 겁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 그른지 하는 판단은 각 종교에 속한 신자들의 신앙일 뿐 제3자에 의한 과학적 확증도 객관적 검증도 불가능하죠. 비록 과학과의 대화가 시도되기는 하지만 그 대화는 어디까지나 각 종교의 신앙과 교리에 부합하는 한도 안에서의 대화일 뿐입니다. 한편 영원한 과학 이론은 없고 이론이란 계속 수정되다가 언젠가는 새로운 이론으로 대체되기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과학 이론이 바뀐다면 종교인들은 이제껏 축적한 만남과 대화의 성과들을 버리고 다시금 새로이 만남과 대화를 모색해야만 할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에게는 이런 만남의 흔적들을 더듬는 일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그 흔적 속에서 저는 과학과 종교가 교차하는 복잡한 지대에 뛰어들어 진리를 추구하고 의미를 구축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분투들을 봅니다. 인간이 아름다운 것은 이렇게 좀 더 나은 앎을 위해 끝없이 분투하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며칠 걸려 쓴 답장인데도 영 부족하기만 합니다. 과학 공부를 여간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네요. 불교와 그리스도교 같은 개별 종교들에 대해서도 더 많이 공부해야 할 것 같고요.
참, 신 선생님이 잠깐 다루신 창조와 진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우리가 좀 더 진지하게 생각을 나누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창조 과학과 지적 설계론이 한국 개신교를 거의 장악하고 있는 이 특이한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할지…. 두 분께 묻고 싶은 게 많습니다. 이번 주 강의 끝나는 대로 며칠 내로 다시 편지를 드리죠. 봄기운이 완연한 캠퍼스지만 뒷산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은 아직 제법 서늘하네요. 환절기 건강 조심하시고요,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2007년 4월 1일
오산에서
김윤성 드림.
출처;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0712214913&s_menu=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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