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사상에 대한 가톨릭적 비판(1)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마음에 상처주는 엉터리 사상
그리스도교 죽이기 선동적 언사 난무
반박할 언어 바로 볼 눈 제공할터
도올 김용옥의 칼춤
다시 도올 김용옥 이야기이다. 요즈음 MBC TV의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특강에서 도올은 19세기말 최한기라는 인물의 기(氣) 사상에 기대어 자신의 기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그는 「기」가 우주만물의 운행의 원리이며 모든 존재의 궁극적 근거라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그에게 「기」는 신(神)이다. 기가 신이기 때문에, 창조주(創造主)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엉터리」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몇 주 전 도올은 자신의 강의에서 『그리스도교가 믿는 신은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망발을 해댔다. 당시 강의의 분위기를 잠깐 재연해보면 이렇다. 신존재를 부정하는 대목에 이르자 도올은 칠판에 우주의 경계선을 긋고 핏대를 올리고 침을 튀기면서 말한다.
『어떻게 이 우주 밖에 「창조주」 하느님이 따로 존재할 수 있느냐 이 말야! 도대체 어디…?』
이어서 도올은 마치 그리스도교를 깨부수려고 작정을 한 듯이 유일신 신앙을 나름대로는 조목조목 부정해간다. 그러면서 방청객을 향해 그의 범신론적 무신론을 설파한다. 화면에 비친 방청객의 반응은 이미 비판력을 상실한 추종자의 모습들일 뿐이다.
이 정도는 약과이다. 그 이후의 강의에서 그리스도교를 제물로 삼은 도올의 칼춤은 극에 달했다. 도올은 자신의 무신론을 강변하기 위하여 니체(Nitzsche)를 끌어들였다. 그는 철학사에서 전후맥락과 니체가 차지하는 위상에 대한 객관적인 진술은 생략한 채(이런 식이 늘상 그의 방식이었다!) 그의 「신은 죽었다」는 말만 뚝 떼어 인용하면서 또 다시 그리스도교를 공격하였다. 그는 니체의 「땅에 충실하라(Bleibt der Erde!)는 말에 기대어 내세(천국), 초월, 은총, 믿음, 희망 따위를 말하는 자는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논지의 열변을 토했다. 어느새 니체의 초인(超人)사상은 요즈음 젊은층이 집착하고 있는 몸가꾸기, 수행, 수련에 대한 두둔에 원용되고 있었다. 방청석의 분위기로 보아 하느님, 영혼, 신앙 따위는 이미 설자리를 잃고 있었다.
이렇듯이 도올이 하도 막무가내로 그리스도교를 비판하고 나서니까 몇 년 전 한 네티즌이 인터넷상에 다음과 같은 「도올의 출사표」를 올리기도 하였다.
『지금이요! 천하 13종교 가운데 기독교는 이미 3대를 거쳐 국민종교로 자리매김 하였소! 지금 이를 치지 못하면 우리 유교는 자멸하고 말 것이요! 나는 이걸 치기 위해서는 유교의 재해석에 달려 있다 생각하고 82년 귀국 이래 고전번역 작업에 몰두하였소! 이는 내 필생의 과업이며 내가 동양철학에 들어갈 때부터의 계획이었소! 이 사태를 바꾸지 못하면 내가 태어난 보람은 없는 것이오!』
도올이 이렇게 자신의 의도를 공개적으로 말했다는 것이다. 인터넷상에 오른 글이기에 이 말의 표현 자체의 진위(眞僞)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으나 필자에게는 그의 그간의 행태로 보아 내용은 사실과 능히 부합하는 것이라고 보인다.
그가 저렇게 명백하게 밝힌 바와 같이 도올의 공격 표적이 그리스도교인 것은 틀림이 없다. 이점에서 도올의 생각은 요즈음 알게 모르게 확산되고 있는 신흥영성 계열의 사상과 같은 맥락에 있다. 어떤 이름을 내걸었든지 이들 신흥영성가들은 유일신, 창조신, 인격신을 거부한다.
문제는 도올의 강의가 대단히 선동적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선동적인 강의는 결국 그러지 않아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하에서 죄책감 없이 속 편하게 살기 위하여 「신」의 존재를 부정할 핑계거리를 찾고 있던 20~30대 젊은이(물론 나이 들은 팬들도 포함됨)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고 있다. 도올은 당연히 메시아가 되는 셈이다.
도올 비판에 부쳐
안타까운 것은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 도올의 팬이 제법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정작 도올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 이해하지도 못하고서, 그의 파격적인 언사에 홀려 박수를 보낸다. 그가 그리스도교를 근본에서부터 부정하고, 중세철학의 흐름을 논하는 중에 가톨릭 철학을 언급하면서 당시 가톨릭 사제들을 싸잡아 「서양 신부새끼들」이라는 육두문자를 불사하고, 예수가 「창녀의 소생」(노자와 21세기(3), 65쪽)이라는 막말까지 해가면서 예수 그리스도고 성모 마리아고 간에 닥치는 대로 폄하하는 악취미를 가지고 있는 궤변론자인 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도올의 안하무인격인 「그리스도교 죽이기」 언사에 대하여 그동안 개신교계에서는 다양한 반론의 목소리가 있어왔다. 그러나 가톨릭교회 측에서는 거의 공적인 반응이 없었다. 아마도 『그러다가 제풀에 꺽이겠지』하는 식의 방관이었지 않나 싶다.
그런데 요즈음 필자는 「침묵」이 최선의 방안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피해상이 여기저기서 감지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성균관대 유교학과 학장 이기동 교수가 「도올 논어 바로보기」라는 비판서의 서문에 밝힌 논지에 크게 공감한다. 이기동 교수는 도올의 강의를 「돌팔이 약장수」가 「엉터리」 약을 시중에 유포시키는 것에 비유한다. 『엉터리 약은 몸을 상하게 한다. 그러나 엉터리 사상은 마음을 상하게 한다. 마음이 상하는 것은 몸이 상하는 것에 비해 그 해로움이 더욱 심하다』(7쪽)
이에 필자는 앞으로 몇 번에 걸쳐 도올의 사상에 대한 가톨릭교회 사목자로서의 소견을 밝히고자 한다. 대체로 필자는 총론적으로 도올을 비판해 볼 것이다. 각론 즉 서양철학, 신학, 동양철학(그중에서도 노자, 유교, 불교) 등의 영역을 넘나들며 「럭비공」 튀듯이 그가 한 발언들에 대한 평가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필자와 같이 책을 읽다가 「이건 안닌데」하는 생각이 들고, TV 강의를 듣다가 「저건 아닌데」하는 마음은 들지만 통쾌하게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위해 할 수 있을 만큼만 식별을 위한 「정보」를 드리고자 한다. 그의 쾌도난마식 그리스도교 죽이기 작태에 대해 통분하고 있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반박할 「언어」와 문제를 직시할 「눈」을 제공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도올 사상에 대한 가톨릭적 비판(2)
기철학은 그의 사상이자 종교
우주=기=도라는 명제를 교조화하고
노자 독선주의에 빠져 파쇼적 강요
도올의 가설적 시나리오
도올은 1980년대 초반부터 포문을 연 이래 줄기차게 그리스도교를 비판해 왔다. 나중에 확인해볼 터이지만, 그의 그리스도교 비판은 큰 틀에서 보면 하나의 가설(假設)적 「시나리오」를 입증하려는 의도로 압축될 수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모든 신앙전통은 교회 기득권층(성직자, 수도자, 철학자 등등) 일당들이 작당해서 2000년 동안 서로 입을 맞춰 꾸며낸 기만이요 사기극』이며, 이를 뒤집어 말하면 『그리스도교 신자들이란 저런 날조된 사기극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맹신적 내지 광신적 피해자』라는 가설이다.
이를 입증하려는 그의 저술들에는 현란한 용어, 거창한 이론들이 동원되기에 독자들이 쉽게 현혹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실 그의 논리에는 매우 유치한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에 그것만 드러나면 그의 주장은 여지없이 허물어지게 되어있다. 곧 도올은 인간이 지닌 보편적 이성의 상식적인 판단능력을 불신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2000년간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공간 속에서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살던 이들이 『하느님은 존재하고,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라는 이 「사기극」의 공모(共謀)에 동참할 수 있으며, 아무리 무지몽매하다고 전제하더라도 어떻게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2000년간 저 허구적인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만큼 꼼짝없이 기만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은 다 바보요 천치요 영적인 「아편 중독자」였단 말인가?
인류역사를 더듬어보건대, 역사의 심판은 냉엄했다. 아무리 그럴 듯한 사상도, 아무리 강력한 세력도 한 두 세기를 지속하며 추앙받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이단사설은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고 사라져야 했다. 억울하게 재판받았던 진리는 또 긴긴 역사 속에서 반드시 복권되었다. 그런데 2000년은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그래서 이 기간의 시험을 거쳐 살아남은 종교를 세계 4대 종교라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인류는 오늘날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불교, 유교의 진리성을 공히 인정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도올의 학문적 배경
그리스도교에 대한 도올의 언사에는 시종일관 반감, 혐오, 증오심이 깔려있다. 그는 왜 그리스도교에 대해 이처럼 무조건적인 억하심정을 갖게 되었을까? 그의 학문적 배경을 살펴보면 얼핏 짐작이 간다.
도올의 이력에 나타난 학문여정은 이렇다. 1948. 6. 14 천안출생/ 고려대 생물과, 한국신학대학, 고려대 철학과 졸업/ 대만 타이완대학 철학과(?74석사)/ 일본 도쿄대학 중국철학과(?77 석사)/ 미국 펜실바니아대학(박사)/ 미국 하버드대학(?82 철학박사)/ 원광대학교 한의학과 졸업 (90~96)
가히 「편력」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다채로운 학과를 섭렵하였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이는 그의 학문적 관심이 얼마나 방대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배경에서 그는 수많은 저술과 강의를 소화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통한다. 「노자와 21세기 上下」, 「노자철학 이것이다 上下」, 「여자란 무엇인가」, 「노자:길과얻음」,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 등의 저작을 통해 무시할 수 없는 고정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또한 그는 흥행성이 있는 인기강사이다. EBS 특별강연 「알기쉬운 동양고전 노자와 21세기」(1999년), KBS1 TV 「도올의 논어이야기」 강의(2000년 10월~2001년 5월), EBS 「도올, 인도를 만나다」 강의(2002년 8월~12월), MBC 「우리는 누구인가」 강의(2004년 1월~현재)를 통해 「박해」와 「찬사」를 동시에 받아왔다.
전혀 전후 상관성이 없어 보이는 이런 학문여정과 저술 및 강연활동에는 그 나름의 일관성이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그의 기철학(氣哲學)을 정립하고 설파하기 위한 여정이었다고 말한다. 기철학은 그의 모든 주장의 대전제이며 핵심이며 목표이다. 그는 그의 기철학의 출발점이 체험적 깨달음이었다고 말한다. 어려서부터 관절염을 심하게 앓던 그는 어느 날 소변을 보다가 자신과 우주가 하나로 느껴지는 체험을 했다고 술회하였다. 또 그는 어느날 새의 울음소리를 듣다가 자신의 안팎이 하나로 통하는 체험을 했다고 밝혔다. 이런 체험들이 그의 일원론적 기철학의 기초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의 기철학은 그의 사상이자 종교가 된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는 자신이 창도한 기철학의 맹신자이며 증거자라고 말해야 옳다. 이는 필자의 결론이 아니라 「도올의 콘택트렌즈」(개혁주의신행협회)에 게재된 김호환 목사의 분석에 의거한 것이다. 김목사는 서울 대학원 철학과?총신대학신학대학원 졸업,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미국 퍼스픽웨스턴 대학?애쉬랜드 신학대학에서 각기 철학과 신학을 전공으로 철학박사와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은 보기 드문 학자이다. 이 책에서 그는 그의 튼튼한 학문적 기반 위에서 도올의 사상을 객관적으로 파헤치는데 성공했다. 그간 나름대로 도올의 사상을 파악해 왔던 필자는 김목사의 견해에 100% 동의한다. 김목사의 분석에 따르면 도올은 노자(老子)의 도(道)사상에서 바로 자신이 내세우는 기(氣)의 실체를 구명할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는 우주가 노자의 주장대로 『그렇게 있었던(What was so of itself) 것 같이 지금도 진행하고(It is doing so of itself)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진행할 것(It will be so of itself)』(노자와 21세기(上), 227쪽)이라고 믿는다.
문제는 도올이 「우주=기(氣)=도(道)」라는 이 명제를 교조(敎條: dogma)화하여 이를 파쇼적으로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목사는 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도올은 우리를 논리적으로 설득한 적이 없다. 소위 기독교의 지난 과거의 선교의 문제점이라고 본인이 지적했던 「제국주의적 선교주의」(imperialistic missionism) 태도에 대해 자신이 정통 기독교에 보낸 냉소만큼이나 자신이 지금 행하는 태도, 즉 자신의 노자 이해를 진리의 척도로 생각하고 다른 종교나 기독교에 대해 무차별적인 자기 방식대로의 대입(代入)과 비난을 삼가지 않는 것은 동일한 제국주의적 발상임을 깨달아야 한다』(김호환, 도올의 콘택트렌즈, 22쪽)
바꾸어 말해서 도올은 그리스도교의 구원독점주의와 독선을 비판하면서 그보다 더하게 「노자」 독선주의에 빠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도올은 그의 일원적 기철학에 반하는 모든 사상은 그것이 불교이든, 유교이든, 기독교이든 모두를 적으로 간주하고 싸잡아 비판한다.
도올 사상에 대한 가톨릭적 비판(3)
기철학 변증에 모든 사상 이용
통합적인 조명 피하고
부분적인 원용 일삼아
왜곡하는 오류에 빠져
스타메이킹의 속셈
지난 번의 논지를 종합해보면, 도올은 이미 「결론」을 갖고 학문을 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 결론이란 『우주를 설명하고 인간 존재를 해명할 수 있는 마지막 언어는 기(氣)』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기철학이다. 어떤 새로운 정보도 그에게는 이 결론을 변증하기 위한 시녀에 불과하다. 요즈음 MBC TV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최한기」라는 인물을 세계적인 사상적 선구자로 띄워주고 있는 것도 자신의 「기철학」 홍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종강을 목전에 두고서 동학(東學)의 창시자 「최수운」을 세계적인 성현(聖賢)으로 과장하여 추켜세우는 것도 결국은 동학사상이 그의 「기철학」 개진에 걸리적거리는 서학(西學)을 깨부술 「꿩 잡는 매」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도올의 끊임없는 스타메이킹(starmaking)의 진짜 이유이다.
지난 6월 7일자 MBC TV 특강에서 궁극적으로 그의 표적은 서학, 곧 그리스도교 신앙(엄격한 의미에서 서학은 천주교를 의미하지만 이날 도올은 서학을 기독교와 같은 범주로 언급하였음)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사람은 얼마나 될까.
도올은 동학의 경전에 해당하는 용담유사를 풀이하던 결론부에서, 아니나 다를까, 최수운의 성경(誠敬)과 시천주(侍天主) 개념이 서학에서의 초월신을 부정한 대안적 신관이었다고 극찬하였다. 곧 뜬 구름 잡는 초월세계의 신이 아닌 인간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내재적 신(이것이 그의 기철학에 쓸모 있는 부분!)을 얘기하는 최수운이야말로 얼마나 위대하고 얼마나 솔직한 종교가이냐 하는 식의 열변이었다. 도올은 이 대목에서 목소리를 높여가며 수운과 대조를 이루는 인물로 동시대 중국의 황제 홍수전(1814~1864)을 언급하였다.
잠깐 강의의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도올은 이 중국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종교로 받아들이고 호화생활을 하던 어느 날 비몽사몽 중에 천당에 갔다 왔는데 거기서 「예수와 그의 부인」을 보았다는 둥 횡설수설하다가 마침내는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는 3류에도 못 미치는 야사를 늘어놓는다.
여기서 그는 얼렁뚱땅 얘기하는 듯 하면서 두 가지 왜곡된 정보를 청중들에게 주입시킨다. 첫째, 「예수와 그의 부인」 얘기를 의도적으로 반복하면서 『예수는 부인이 있다』더라 하며 무책임하게 세뇌시킨다. 둘째, 봐라, 그리스도교라는 것이 멀쩡한 사람을 돌게 하여 있지도 않은 천당을 가봤다는 허황된 말이나 하게 하고 결국에는 자살을 방조하지 않았느냐 하며 「그리스도교 신앙=허구적 환상」이라는 등식을 주입시킨다. 도올은 끝으로 그리스도교를 믿던 저 중국황제는 호화생활을 하는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최수운과 동학교도들은 박해와 순교를 당할 만큼 민중의 편에서 진실된 삶의 자세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로 마무리를 짓는다.
60분간의 매직쇼는 그리스도교 곧 서학을 「타락한 지배자를 위한 허황된 종교」로 낙인찍고, 최수운을 「민중의 고난을 대변한 위대한 세계적 종교가」로 둔갑시키고, 이로써 도올 자신의 「기철학」이 설 자리가 더욱 튼튼해지면서, 우레와 같은 갈채 속에서 막을 내린다.
금기된 접근법
왜 도올은 최수운의 비교대상으로 그와 동시대를 산 한국 그리스도교인(천주교인-당시 개신교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음)들을 거론하지 않았을까? 당시의 정치적?사상적 질곡으로부터 해방과 평등을 꿈꾸며 천주신앙을 받아들여 그보다 더 처참하게 순교한 수 만 명의 천주교 순교자들을 굳이 모른 채하고서 왜 꼭 남의 나라 황제의 엽기적인 일화만을 언급하며 천주신앙에 대해 비아냥거려야 했을까?
학문에서 가장 비겁한 것이 「삶의 자리」(Sitz im Leben)가 전혀 다른 것들을 동일한 잣대로 비교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도올은 최수운의 민중적 수난을 치켜세우면서 동시대 한국 천주교인들에게서는 시비 걸 것이 없으니까 슬그머니 「삶의 자리」를 중국으로 옮겨서 꼭 3류 저널리스트들이 하듯이 「스캔들」 하나를 침소봉대하였다. 이런 방식은 도올이 걸핏하면 써먹는 치사한 수법이다. 이는 학문적 접근법이라고 할 수 없다.
정당한 학문적 접근이 되려면 일차적으로 비교하는 것들의 범주(category)가 같아야 하고, 이차적으로 각각의 「삶의 자리」가 고려되어야 한다.
이는 도올이 그토록 강조하는 해석학(hermeneutics)의 기본이다. 그런데 도올은 이 규칙을 어기고 있다. 반칙을 하고 있다. 그 결과 독자들로 하여금 유사성(類似性, likeness)을 동질성(同質性)으로 혼동하도록 호도하고 있다. 이점이 바로 김호환 목사가 「도올의 콘택트렌즈」에서 도올의 문제점으로 꼽고 있는 부분이다. 김목사는 도올이 『동질성과 유사성을 오해하지 말라』는 비교종교학의 금언을 깨뜨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도올이 학자라면 마땅히 최수운의 비교 대상으로 비슷한 시대, 비슷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천주교 사상가들인 이벽이나 정약용 쯤을 거론했어야 했다. 여기서도 엄정한 룰이 있다. 한 쪽의 국가대표 1군과 다른 쪽의 국가대표 2군을 비교해도 안 된다. 이 정도만 해 줬어도 도올은 신사였다. 하지만 도올은 그러지 않았다. 동학(東學)에서는 최선의 모범(example)을 갖다 댔고 서학(西學)에서는 최악의 스캔들(scandal)을 뒤져내어 비교하였다. 이는 페어플레이가 아니다. 아니 레드카드를 받아 마땅한 반칙행위이다.
형이상학, 의도적 외면
도올은 자신의 기철학에 반대되는 사상이면 무엇이 되었건 부정하는 입장에 선다.
그러니까 도올이 그리스도교를 그렇게도 독 오른 뱀처럼 물고 늘어졌던 것도 그의 기철학에 그리스도교가 가장 큰 훼방꾼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우주=기」로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창조주 하느님의 존재, 그리스도교의 내세(천국)신앙은 가장 거추장스러운 적이었던 것이다.
그의 적은 그리스도교 뿐이 아니다. 어느 사상, 어느 종교가 되었건 형이상학(形而上學)적 관점 곧 초월, 내세, 추상, 관념을 논하는 모든 발상은 무조건 허구요 기만이요 오류라고 몰아부친다. 이는 그의 일원론적 기철학이 형이하학(形而下學)적 관점 곧 내재, 현세, 구체, 경험만을 실재(reality)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올은 그가 그토록 신봉하는 노자의 도사상에서 발견되는 형이상학적 기술(예컨대 도덕경 25장)을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넘어가고, 불교나 유교 문헌에 제시된 형이상학적 사유를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학문을 하는 데에 이런 처사는 「페어플레이」의 규칙을 어기는 행위에 속한다.
이 점이 도올이 욕을 얻어먹는 이유다. 왜 그가 노자를 논하면 노자 연구가(대표적으로 이경숙, 「노자를 웃긴 남자」)가 들고 일어나고, 그가 불교를 논하면 불교계(대표적으로 변상섭, 「김용옥선생, 그건 아니올시다」)에서 반발하고, 그가 유교를 논하면 유교계(대표적으로 이기동-배요한, 「도올 논어 바로보기」)가 논박하고, 그가 기독교를 논하면 기독교계(대표적으로 김호환, 「도올의 콘택트렌즈」)가 분노하는가?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의 일원론적 기철학을 변증하기 위해서 어떤 영역에서든지 「통합」적인 조명을 피하고 아전인수격으로 「부분」적으로만 원용(援用)하는 접근을 일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국 전체를 왜곡하는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
학문에서 뉴만 추기경의 다음과 같은 말은 백번 타당하다.
『전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부분만을 받아들이는 것은 오류이다』
우리는 사이비 종교라는 것들이 오만가지 「부분」들을 조합해 놓은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도올의 학문적 신뢰성에 대한 각계의 반응
도올의 사상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학문적 체계를 갖추고 옹호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쇼․무지․몰이해․표절․추측…
일본학설 베꼈다 비난도
고전에 대한 관심은 증가
어떤 주제에 대한 한 사람의 주장을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전반적인 학문적 신뢰성을 검토해 보는 것이 참고가 될 것이다. 이에 그간 도올의 강의에 대하여 언론 매체를 통해 쏟아졌던 반응들을 짧게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옹호론
도올의 지지자들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많음에 비하여, 학문적으로 체계를 갖추고서 도올을 옹호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예를 제시할 수 있을 따름이다.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는 도올을 비판한 변상섭씨(아래 참조!)를 재비판하고 도올을 옹호하는 글을 발표했다. 신규탁 교수는 김용옥이 불교의 화두모음인 「벽암록」을 해설한 것에 대해 『경축, 선종사상 최초의 어리석은 바보 출현』이라고 비난한 변상섭씨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일본서적에서는 화두를 공공연히 해설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사람에 의해 화두가 해설되고 있고 학술발표회 토론석에서도 화두해설의 예를 「자연스럽게」 볼 수 있을 만큼 화두에 대한 해설은 이미 공개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화두를 해설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화두를 해설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도 할 수 없다는 양비론적 입장으로 도올을 옹호한다.
-연세대 정외과 함재봉 교수는 학술계간지 「전통과 현대」에서 「도올 김용옥의 해석학과 인문주의」라는 특별기고를 통해 김씨를 인문주의자라고 옹호하고 나섰다. 함교수는 인문주의를 알아야 도올이 동양사상을 재해석하고, 번역과 어학을 강조하며, 종교에 대해 돌출적으로 발언하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나아가 그가 지향하는 시민사회의 윤리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서양 신중심의 형이상학을 배격한 인문주의는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문명, 즉 인문의 위대성을 강조한다고 설명하면서 『다양한 신념과 신앙, 해석을 인정하고 동서양의 고전에 대한 「완전해석」을 바탕으로 엄밀한 토론과 논쟁 속에서 각종 교조주의를 경계하는 열린사회가 도올이 꿈꾸는 인문주의 사회』라고 말한다. 함교수는 도올이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해석인지, 어떤 것이 신의 참된 의도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인지 하는 논의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현대 해석학을 동양사상과 한국사회를 분석하고 재해석하는데 적용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무지한 이들의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도올의 해석학적 입장을 이해하면 도올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도올의 TV 논어강의에 출연하기도 했던 함교수의 주장은 도올이 자신의 비판자들에게 하고 싶은 반론을 대신했다고 볼 수도 있다.
비판론
이상에서 간략하게 요약해 본 도올 옹호론은 도올 비판론에 대한 재비판의 성격을 띄고 있다. 순서상 옹호론을 홀대하지 않기 위하여 앞에 진술했을 따름이다. 그러면 비판론들을 종합해 보기로 하자.
-이경숙은 「노자를 웃긴 남자」에서 도올의 1장부터 10장까지의 해설을 공박한다. 그녀는 도올의 도덕경 번역이 오류투성이이며 도올은 근본적으로 노자를 해석하고 강의할 만큼 도(道)를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고 맹공을 펼쳤다. 그녀는 도올의 고전 강의가 개그 쇼일 뿐이며, 「강아지 풀 뜯어 먹는 소리」라고 일축해 버렸다.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변상섭은 「도올선생, 그건 아니올시다」에서, 「화두(話頭), 혜능과 셰익스피어」와 「금강경 강해」라는 불교관련서적 두 권을 낸 도올에게 『어째서 이러한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를 수 밖에 없었는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그는 그 이유가 바로 『애초부터 선(禪)에 대해 전혀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며 도올의 불교사상을 비판하기 시작한다. 본래 해설을 허락하지 않는 화두를 해설하려한 도올의 의도 자체가 잘못이며, 번역 자체가 「무지와 실수가 합쳐진 걸작(?)」이라고 그는 비판한다. 이밖에 변씨는 방(棒)과 할(喝)이 선사들의 유치하고 치사한 짓이라고 매도하거나, 열반이 죽음이다, 선은 반불교다 등의 언사는 불교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그에 대한 논리적인 비판과 분석을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전직 언론인 서병후씨는 「도올에게 던지는 사자후」라는 저서에서 「화두, 혜능과 셰익스피어」라는 도올의 저술이 존 우(John Wu: 「동서의 피안」의 저자 오경웅)의 「선의 황금시대」 일부를 표절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두 책의 구절구절을 대조하며 이를 입증하고서, 이번에 제기된 「표절」의 문제는 학문의 정직성과 해석학적 엄밀성에 대해 누구보다도 목소리를 높여왔던 도올의 입장에서 쉽사리 넘어갈 수 없을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인하대 철학과 김진석 교수는 「사회비평」지 「철학의 광신적 대중화」라는 글을 통해 도올이 대중적 권력을 얻으려 노자?공자를 이용했다고 공격했다. 김진석 교수는 도올의 노자.공자에 대한 해석이 선험적인 동아시아 중심주의에 기대고 있는 것이며, 동양 사상,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국 고대 사상을 빙자하면서 그것에 기생하고, 동시에 대중과 방송에 기생하는 문화권력 복합체의 성격이 짙다고 비판했다. 그는 대안으로서 동.서양 접근법의 배타적 선택이 아닌 보완적 선택을 촉구한다.
-건국대 성태용 교수는 도올로 인해 중국 고전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된 것은 사실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도올의 강의는 너무나 빈약한 근거를 바탕으로 너무나 거창한 주장을 큰 소리로 외치고 있다고 비판한다. 도올의 강의에는 『…아닌가 싶다』, 『…한 인상을 떨쳐버리기 힘들다』는 식의 발언이 너무 자주 나온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추측이 중요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근거가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성균관대 유학과 이기동 교수는 「도올 김용옥의 일본 베끼기」라는 저서에서 도올의 논어 강의와 공자에 대한 인물설명이 일본학자의 학설을 베낀 것이라고 비난했다. 『한.중.일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받지 않은 시라카와의 「아마도 무당일 것이다」라는 추측성 발언에서 더 나아가 도올은 아예 공자를 무당의 아들이라고 단정했으며, 또 도올에겐 공자의 중심사상인 인(仁)에 대한 설명이 없고 오히려 일본이 강조한 예가 더 많다』고 지적한다. 이는 도올이 결국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한 맹자사상에 기운 한국의 유학에 반대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순자적 경향을 띠고 있는 일본의 책을 베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 밖에도 지면관계상 소개하지 못한 각계의 반응들이 많이 있지만 이정도로 그치고자 한다. 독자들의 균형 있는 조망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말이다.
도올과 뉴에이지
도올의 주장은 내용에 있어서 뉴에이지의 주장과 합치한다. 도올은 내용적으로는 확실히 뉴에이지의 기수이다.
<사진은 뉴에이지 사상을 나타내는 그림.>
도올의 주장은 뉴에이지와 합치
그리스도교 교리 전면 부정
교주의 권위로 추앙 받기도
한 줄이 아까운 지면에 「도올 김용옥」을 어디까지 다루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필자의 고민이다. 다른 주제와의 형평성을 고려할 때 이미 「오버」의 경계선을 넘어왔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것도 사실이다. 그 까닭은 그의 주장들이 근래에 유행하는 뉴에이지 또는 신흥영성운동의 노선과 잇닿아 있기 때문이었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리스도교 비판의 논지들에 있어서 이들은 모두 한통속이기에 그랬다. 도올이 TV 공중파를 이용하여 뉴에이지의 확산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고 있기에 그 폐해의 실상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뉴에이져 도올
실제에 있어 얼마나 서로 연루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으되, 도올의 주장은 내용에 있어서 뉴에이지의 주장과 합치한다. 도올은 내용적으로는 확실히 뉴에이지의 기수이다. 이 사실은 도올이 그간 그리스도교를 향해 어떤 비판들을 쏟아냈는지를 확인하면 금세 드러난다. 도올은 뉴에이지가 하듯이 그리스도교의 모든 교리를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즉, 그리스도 선재설,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 천당 및 지옥 등의 전통신학을 부정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도올은 도발적이고 전투적인 용어를 구사하며 뉴에이지의 그리스도교 비판 수위를 넘어서기도 한다. 예를 들면, 도올은 예수는 「창녀의 소생」(노자와 21세기(3), 65쪽)이며 예수 탄생 이야기는 「신화」(도올논어(1), 24~26쪽)이고, 「세례」는 무당인 예수의 「씻김굿」(금강경 강해, 134~137쪽)이요, 방언은 『도둑놈의 발광』(도올 논문집, 「번역의 이론과 실제」, 233쪽)이라는 등 과격한 표현을 불사한다. 이쯤 되면 도올이 뉴에이지의 영웅적 전사로 불린다 해도 어색할 것이 없을 것이다.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도올의 그리스도교 비판 발언들은 인터넷상에서 안티(Anti) 그리스도교 사이트(대표적으로 http://xbible.glad.to)의 핵심메뉴로 원용되고 있다. 도올은 그곳에서 가히 교주의 권위로 추앙되고 있다. 「도올어록」이라는 묶음까지 등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신존재 부정에 대한 반론
뉴에이지와 마찬가지로 도올은 신존재를 부정한다. 그 논거로서 그는 러셀을 인용한다. 『도대체 신은 누가 만들었는가? (중략) 도무지 이 세계가 원인자가 없이는 생겨날 수 없다고 생각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중략) 문제는 이 세계가 최초의 시작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아무런 필연적 이유가 없다는 데 있다. 어떠한 존재가 반드시 최초의 시작을 가져야만 한다고 상정하는 우리의 모든 관념은 실제로 우리의 상상력의 빈곤에서 유래된 것이다』(도올의 논어(상), 199쪽).
도올은 「최초의 시작」이 필연적으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사고 자체를 문제로 삼는 러셀의 주장이 옳다고 본다. 그러면서 도올은 우주만상이 「최초의 시작」 없이 「스스로 그렇게 있었던 것」(What was so of itself)이라는 노자의 관점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최초의 시작」이란 없다고 하는 러셀과 도올의 주장은 20세기 과학의 쾌거인 이른바 「대폭발(Big Bang) 이론」 앞에서 신빙성을 잃고 만다. 러셀은 빅뱅이론을 몰랐을 때 이 말을 하였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우주가 「대폭발」 곧 「최초의 시작」으로 생겨났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도올은 이미 효용성을 상실한 문장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과학은 첨단 과학 장비와 이론을 동원하여 우주 탄생의 시기와 과정을 관측한 결과 우주는 시공간이 하나로 응축된 어느 한 점(點)에서 탄생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오늘날 이 이론은 많은 과학자들의 연구를 통해서 사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새로운 이론은 과학계에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로써 과학 자체가 우주는 먼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갑자기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이론은 『우주 자체 안에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이지 그 밖에서 원인을 찾지 말아야 한다』는 자연주의 철학(도올의 노선!)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점을 링컨 바넷이라는 과학자는 「우주와 아인슈타인 박사」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기서 피할 수 없는 결론은 모든 만물에는 시작이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어느 때, 어떤 방법이었든 우주의 과정은 시작되었고, 별들에는 불이 붙었으며, 광대한 우주의 장엄한 광경이 존재하게 되었다』
쉽게 말해서 우주 밖에 있는, 자연계를 초월하는 그 어떤 존재가 이 우주를 존재하도록 만들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반론을 제기하는 과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우주 대폭발이 창조주 하느님의 개입이 아니라 「저절로」, 「우연히」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금세 억지 주장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자연계에는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 등의 네 가지 힘이 존재하며 그 힘들은 대칭성과 규칙성 가운데 작용하고 있는데 이런 것들이 우연히 대폭발을 통해서 발생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정밀한 질서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대폭발이 극히 우연하게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과연 이런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오묘한 조화가 가능했겠느냐 하는 것이다.
지구는 24시간 동안 정확히 자전하며, 365일 동안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 수억 년 동안 오차 없이 계속해서 자전과 공전을 하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밤하늘에 보이는 별들은 하나같이 질서정연하게 자신의 궤도를 돈다. 그 수많은 별들이 한 치 씩만 궤도를 벗어나도 우주는 무질서요 혼돈에 휩싸일 것이라고 한다. 누군가의 치밀한 설계에 의해 창조된 일관되고 규칙적인 법칙이 없이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우주 탄생의 비밀인 것이다.
하느님의 존재를 고집스럽게 부인하는 사람들은 한 가지 물음이 해명되면 또 다른 물음을 제기하며 물고 늘어진다. 처음부터 『하느님은 없다』는 결론을 갖고 출발해서 아무리 명징하게 증거를 들이대도 끝까지 마음을 닫고서 버틴다. 하느님을 믿고 안 믿고는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태도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자들, 제 속으로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말들 하면서, 썩은 일 추한 일에 모두 빠져서 착한 일 하는 사람 하나 없구나』(시편14, 1).
불인(不仁)의 하느님과 인(仁)의 하느님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 파라오의 종살이에서 구출해내신 것은 어떠한 억압과 착취, 인권유린도 용납지 않으시는 절대 정의의 하느님이었기 때문이었다.>
도올은 그리스도교의 인격신 부정
중립성 상실한 일방적 주장
절대 정의의 하느님 도외시
이제 도올비판의 막바지에 이르러 그리스도교의 고유성과 관련된 문제 하나만은 짚고 넘어갈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 문제란 다름 아닌 인격신(人格神)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말한다. 도올은 그리스도교의 인격신을 부정한다. 「노자의 하나님」은 「불인(不仁)의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은 조립시화(造立施化)의 하나님, 곧 「조작하여 은혜를 베풀지 않는」(노자와 21세기(상), 244쪽) 하나님이다. 도올의 말을 들어보자.
『노자의 하나님은 불인(不仁)하다. 인간의 믿음과 소망에 답하는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그 모습이 다르다. (중략)노자의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 노자의 하나님은 은총의 하나님이 아니다. (중략)조선의 백성들이여! 21세기의 개화된 민주의 백성들, 과학의 백성들이여! 질투하는 편협한 하나님을 믿겠는가? 소리 없이 스스로 그러하신 너그러운 하나님을 믿겠는가? 노자는 또 말한다. 천지가 불인(不仁)한 것처럼 성인(聖人) 또한 불인(不仁)해야 한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백성들을 어여삐 여기고 사랑하고 베풀고 교화하는 대통령을 좋아할지 모른다. 노자는 말한다. 모름지기 대통령은 은혜를 베풀면 안 되고 백성을 사랑한다 생각하면 아니 된다. 그는 인자하면 아니 된다. 그는 잔인해야 한다. 자기 당이라 편들고, 선거전에 자기에게 괘씸하게 굴었다고 미워하고, 정적(政敵)이라 해서 그 능력이 있음에도 인정치 않고 무조건 음해하기만 한다면 과연 지도자의 자격이 있겠는가? 천지불인! 성인불인!(天地不仁! 聖人不仁!) 그 얼마나 통렬한, 핵심을 찌르는 반어(反語)인가!』(노자와 21세기(상), 244쪽)
이처럼 도올은 「야훼」 하나님은 비개화되고 비민주적인 우매한 백성들, 비과학적인 백성들이나 믿는 「질투하는 편협한」 하나님이라고 맹공을 퍼붓는다. 반면에 노자의 하나님은 「소리없이 스스로 그러하신 너그러운」 하나님으로 숭앙받는다. 전문용어로 표현하자면 도올은 서양에서 18~19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도입된 「이신론」(理神論: deism)적 관점으로 그리스도교의 「인격신」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곧 신을 사랑과 은총을 베푸는 주체인 인격신(人格神)으로서 파악하는 것 보다 묵묵히 우주운행의 원리로만 작용하는 이신(理神)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 개화된 관점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그의 논지가 논리적인 반론이 요구되는 주장이 되지 못함을 안다. 어차피 중립성을 상실한 일방적 선택의 성격이 짙게 스며있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필자 자신도 중립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함을 고백한다. 필자의 입장 역시 이미 확고하게 선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론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필자의 견해를 피력하는 정도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요점은 세 가지이다.
첫째, 인(仁)의 역기능만을 볼 것이 아니라 인의 순기능을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도올이 노자가 믿는 「불인(不仁)의 하나님」을 추켜세운 이유는 만일 하느님이 인(仁)을 베풀면 편협하게 한쪽을 편들어 다른 쪽이 상대적으로 박탈감에 빠지게 되는 위험이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는 인(仁)이 사심(私心 내지 邪心)에서 행해질 때의 극단적인 문제만 부각시킨 것이다. 곧 인(仁)의 역기능만 클로즈업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도올은 인(仁)이 정의(正義: Justitia)에서 우러날 때 발생하는 구원적인 의미를 전혀 외면하고 있다. 곧 인(仁)의 순기능을 도외시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묻고 싶다. 만일 도올 자신이 억눌린 자, 억압받는 자, 막다른 골목에 처한 자, 절망의 늪에 빠진 자가 되어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신음하며 울부짖는 것 밖에 없게 된다고 해도, 아무런 반응을 못하는 이 목석같은 「불인(不仁)의 하나님」을 찬미할 것인가? 그 무감각, 그 무능력을 궤변적으로 칭송할 수 있는가? 단지 불인(不仁)한다고 하여, 가나안 바알의 신당에 놓여 있는 죽어 침묵만을 지키는 다르곤의 신상들(1사무 5, 4) 및 850명의 바알 무당들이 엘리야 예언자와 대적하여 자신의 몸을 자해하며 피 흘리기까지 불러도 대답 없던 무능의 신(1열왕 18, 30~40)을 「스스로 그러하신 너그러운 하나님」으로 찬미할 것인가? 단지 인(仁)을 행하였다고 하여, 에집트 파라오 치하의 잔혹한 강제노역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킨 「야훼」를 「자기 당이라고 편드는」 편협한 하느님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과연 최소한 상식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는가?
노파심에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 파라오의 종살이에서 구출해내신 것은 「질투하는 편협한」 하느님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에 의한 것이건 어떠한 억압과 착취, 인권유린도 용납지 않으시는 절대 정의(편드는 상대적 정의가 아님!)의 하느님이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야훼의 「질투」는 정의이며 진리라는 사실이다. 그동안 도올은 누가 그를 비판해도 대응하지 않았다. 자신은 독보적이므로 누구든 자신과 맞서는 것 자체를 용납치 않는다는 태도였다. 만일 도올이 이런 자신의 「태도」를 성찰할 줄 안다면, 야훼가 왜 「질투」할 수 밖에 없는지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야훼의 질투는 상대적인 것 앞에서 「절대」가 갖는 질투, 우연적 존재 앞에서 「필연적」 존재가 갖는 질투이다. 그것은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분명히 하고 선후고하(先後高下)를 가리기 위한 질투이다. 그러기에 야훼의 질투는 정의이며 진리인 것이다. 자임하고 있듯이 도올이 진정한 「사상가」라면 질투를 「편협」으로 밖에 보지 못하는 한계를 반드시 극복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셋째, 우리 모두는 「신앙이 어차피 선택이라면 한번 신중하게 셈을 해 보라」는 파스칼의 충고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인격신(더불어 천국)을 믿고 안 믿고는 결국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다. 이 점을 간파한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죽은 다음에 하느님(더불어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은 어차피 확률이 1대 1이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확률은 똑 같다. 자 그렇다면 도박을 해보자. 서로 반대 경우가 사실이라면 결국 손해는 누가 보게 되는 것인가? 하느님(더불어 천국)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 세상을 함부로, 엉망으로 살았는데, 죽어서 보니 하느님도 있고 천국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인가, 아니면 천국이 있다고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하느님도 천국도 없는 경우의 사람인가? 결국 누가 낭패를 맞이하게 되겠는가?』
인생은 「천하」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 26) 신앙은 진지하고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체험의 종교, 만남의 종교이다. 일단 신앙을 갖게 되면 넘치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만난다. 착각이나 환상이 아니라 실제로 만난다. 사후에가 아니라 이미 현실로서 만난다. 이는 머리싸움이나 입씨름으로 가름될 문제가 아니다. 마음가짐의 문제이다.
백번 양보해서 설령 그 판가름이 죽은 다음에나 있다고 해도 우리는 선택을 함에 있어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우리는 천재 수학자요 철학자요 영성가였던 파스칼의 충고를 새겨들을 줄 알아야 한다. 『결국 누가 낭패를 맞이하게 되겠는가?』
다원문화-도올 비판 종결
대화의 시대…비난은 어리석은 일
무모한 뒤집기 삼가하고
전문영역의 권위 존중해야
이쯤에서 도올비판을 종결해야 할 듯싶다. 고백하거니와 그동안 도올이 그리스도교와 관련하여 무차별적으로 쏟아냈던 지엽적인 비판들에 대해서는 거의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지면의 제약도 받았고 또 꼭 그래야할 만큼의 가치도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말고」 식의 트집잡기 글들을 수집해놓은 의도적인 왜곡과 폄훼에 일일이 대응한다는 것이 부질없는 노릇으로 여겨지기도 했던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도올이 자신의 전공영역에서는 어떠한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리스도교에 대해 언급할 때에는 공인된 논거를 제시하지 않고 신빙성이 검증되지 않은 「스캔들」 파헤치기식 접근을 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도올의 태도가 객관성을 상실한 감정적인 반감(反感)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았다. 이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김호환 목사의 지적에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공감하리라 여겨진다.
『저는 선생의 언어의 폭력성을 언어가 담고 있는 능력의 한계 때문이라고 줄곧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이해의 폭으로 다 가릴 수 없는, 진실을 가장한 선생의 언어의 콤플렉스는 선생의 정신적 외상(外傷: 필자 삽입)으로 기인한 것이라 탓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가 「창녀의 소생」(노자와 21세기(3), 19~22)이라는 선생의 언어는 진실을 탐구하려는 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정신적 외상에서 형성된 뒤틀린 우월 의식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정신적 외상은 세상을 보는 선생의 눈과 종교관을 지나친 혐오감으로 혹은 편애로 굴절시키고 있습니다.
때문에 선생이 박학다식하게 인용하고 있는 모든 철학 사상이나 종교에 대한 이해에 대해 감탄을 하면서도, 편견과 부정확한 개념 파악으로 얻어진 지식으로 다른 이들을 특이한 자기논리로 비판하고 있는 선생에 대해 세인들이 주는 고충 어린 충고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선생은 화자(話者)가 자신의 주장을 말할 때 자기주장의 분명한 위치를 상대방에게 알려야 함을 잘 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자신의 위치를 자기 편의에 따라 바꾸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이 사용하고 있는 지식의 정보는 그 정보가 지닌 정확한 개념 파악과 주류를 인용하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보가 지닌 공인된 일반적인 지식을 인용하지 않고 오직 그 정보에 대한 지엽적인 것이나 부정적인 가능성 따위를 그 지식의 주류인 양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듣는 이들로 하여금 혼란과 오해를 갖도록 하는 일입니다. 폐일언(蔽一言)하고, 저는 선생에 대한 저의 느낌을 어떤 스님이 쓰신 책의 제목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김용옥 선생 그건 아니올시다!」』(「도올의 콘택트 렌즈」, 183~184쪽).
좀 길지만 한 자 한 자가 필자의 생각과 일치하기에 그대로 인용하였다. 김호환 목사는 한국, 독일, 미국 등지에서 철학과 신학을 깊이 공부한 학자이다. 그러기에 김목사는 소위 입심보다는 전문가적인 안목으로 이런 지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톨릭 철학계의 견해는 어떠할까? 필자는 철학계에서 형이상학 분야의 거두인 정의채 신부께 고견을 청하여 들은 적이 있다. 일생을 철학 탐구에 정진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구축한, 교계 원로이며 개인적으로는 필자의 은사이기도 한 정의채 신부는 다음과 같은 학문적 견해를 피력하였다.
『학문이라는 것은 고색창연한 문화유산과 같습니다. 장구한 역사 속에서 벽돌이 한 장 한 장 쌓여져 건물이 된 것입니다. 세월의 풍상을 겪으면서 지혜가 배어들고 이끼도 끼고 하여 거대한 문화가 창출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철학이라는 것, 종교라는 것, 신학이라는 것들은 책 몇 권 읽고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것들이 아닙니다. 10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대학자들이 「한 우물」만 파서 달성한 경지들이 집성되어 일련의 학문적 전통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노, 토마스아퀴나스, 보나벤뚜라, 칼라너 등이 이룩한 학문체계는 결코 책 몇 권 읽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날 세계적인 지성인들은 모두가 옛날 식민지시대의 정복자적인 접근법을 지양하고 동서융합해서 하나의 세계를 이루려고 대화를 모색합니다. 동이 서를, 서가 동을 비난하는 것은 이제 어리석은 일이며 시대착오적인 발상입니다. 만일 누가 그런 발상을 조장하고 선동한다면 그것은 젊은이들을 후퇴시키는 결과를 자아내는 불행입니다』
결국 정의채 신부는 「학문」 나아가 「전문영역」의 본래적 권위를 존중할 것과 「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셈이다. 새겨듣건대, 이는 21세기 한국 지성을 대표하는 조언이 아닐 수 없다. 맞다. 이는 정곡을 찌르는 지혜다. 신학을 전공한 필자도 「신학」 안에서조차 전문영역이 아니면 감히 언급을 삼간다. 그만큼 조심스러운 것이 학문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도올은 한신대학에서 4년간 삐딱하게 배운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그리스도교의 전문영역을 넘나들면서 전문가 행세를 하는가. 무슨 배짱으로, 무슨 무식으로 그런 무모한 일을 도모하는가. 어쩌자고 가설적 트집거리 몇 개를 가지고서 지금도 예루살렘에서, 로마에서, 곳곳의 대학 연구실에서 밤새워 연구하는 내로라하는 수많은 성서학자들의 학문적 성과를 그렇게 경박하게 뒤집으려 하는 것인가.
이런 식의 무모함은 비단 그리스도교와 관련해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그러기에 고려대 영문학과 서지문 교수와 성균관대 유교학과 이기동 교수는 「논어」 계시편에 나오는 다음의 말로써 도올에게 충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군자는 천명을 두려워하고 대인을 두려워하고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소인은 천명을 몰라서 두려워하지 않고, 대인을 함부로 대하며, 성인의 말씀을 업신여긴다』(「도올 논어 바로보기」, 5쪽).
전문영역 및 전문가의 존중은 생활문화 전반에서도 학문에서도 필요하다. 이것이 무시되면 나라를 망치고 미래를 망친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각 분야 최고의 세계적인 전문가를 배출하는 데 달렸다. 노벨상이 무엇인가? 전문가들에게 주는 상이다. 우리는 우리민족 가운데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되지 못하고 있음을 애석해 할 일이 아니라, 전문가 및 전문영역을 외경(畏敬)하는 풍토가 형성되어 있지 못함을 더 안타까워 할 줄 알아야 한다. 도올신드롬은 한국이 안고 있는 문제를 드러내주는 대표적인 계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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