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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말과 칼 -`큰산에 기대어`에서-

반찬이 2009. 3. 13. 21:03

말과 칼 

-심연회원-


  말이란 인간이 살아 숨 쉬는 동안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도구이다. 나는 대학이라는 울타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지극히 자유롭게, 그러나 다소 한정된 관계의 굴레를 맴돌며 살아왔다. 언제나 언어의 홍수 속에 학생들과 부대끼고  함께하면서 나는 ‘말이란 명확하고 사실적이며 설득력으로 승부를 거는 것’이라고 가르쳐 왔다. 설득력이란 주관성과 객관적인 합리화가 어우러져야 효력이 발생하고 말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머리 굵은 대학생들에게 강조하면서도 늘 아쉬움을 느꼈었다. 그러던 중 나는 우연치 않게 집단상담을 통해 ‘말의 고수’인 철쭉님을 처음 뵙게 되었다.


  때가 겨울인지라 산골짜기에 공기는 차갑고 살을 벗은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눈은 소복했다. 알싸한 바람을 맞으며 산허리를 굽이굽이 돌아 들어가는 삼동원 연수원의 외진 길목은 마치 현실의 경계를 넘어 심연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문처럼 신비스러운 기분을 주었다.

 

  개인적으로 갈등이 크다거나 시급한 현실적 문제를 안고 참석한 것은 아니었기에 막연히 그저 나 스스로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랬고 더불어 학생들과 좀 더 교감하기 위해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그러면서 낯선 경험에 대한 호기심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낯선 사람들 틈에서 쏟아내는 이야기들이란 그 어디에서도 들어 볼 수 없는 질퍽한 삶의 단면들이었고 나는 거기에 말려들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너무나 멀쩡하건만 그 좁은 공간에서 토해내는 이야기들이란 실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자녀를 심하게 매질하는 어머니, 바람을 피우는 부인, 이 남자 저 남자 정처 없이 만나는 여인, 그리고 성격이 무뚝뚝한 사내들. 모두 제 나름대로의 아픔과 혼란스러웠던 성장사부터 현재 현실에 충실할 수 없는 숨겨진 그림자들까지 각자 삶의 역사들을 봇물이 터지듯 토해내며 절규를 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흔히들 무심코 넘기며 지나치는 일상의 이야기들인데, 알고 보니 그 이면엔 파노라마처럼 굴곡의 인생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내 일이 아니면 무관심하게 듣기도 하고, 기분이 나빠도 그러려니 하고 참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들이 평범한 삶인 줄 알았는데 그저 우리는 껍데기로만 살았나 보다.

 

   천태만상의 생각과 습관들로 길들여진 이면에는 모두가 그럴듯한 사정이 있을 터였다. 자신의 무너진 윤리나 도덕관을 감추려고 애쓰면서도 동시에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환경의 희생자라며 이해해 달라고 애원하는 그들의 눈빛은 간절하기만 했다. 많은 사람들은 혀를 차다가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그들의 변명과 통곡에 함께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서로 그들의 부모가 되어, 자식이 되어, 배우자가 되어 감싸안고자 애를 썼다. 그 방법과 반응도 각양각색이어 누군가의 말처럼 스무 명 남짓의 집단이 곧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말을 실감하기도 했다.

 

  격정적이고 때로는 감동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에도 불구하고 철쭉님의 반응은 싸늘했고 냉혹하기 짝이 없었다. 그 냉소적인 표정이나 냉랭함은 남북이 대치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과 같았다. 진정 억울하다며 아픈 심정을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원망의 소리가 좁은 공간을 뒤흔들어도, 철쭉님은 흔해빠진 위로나 공감의 말은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고 손톱만큼의 동정도 허용하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한 번쯤은 위로와 공감으로 어깨를 토닥여 줄 법한데 철쭉 님은 눈을 감은 채로 묵묵히 듣고만 계신다. 그 많은 사람들이 위로하고 아픔을 함께하는데 철쭉님은 왜 저러실까?

 

  아니나 다를까, 변명을 늘어놓는 사람과 앞뒤 없이 거기에 동참하여 위로와 격려를 주고받는 사람들을 향해 철쭉님은 가슴에 못질을 사정없이 하신다. 찰나에 자신의 정서적인 한계를 깨치지 못하고 자신의 고립된 삶을 되돌아보지 않은 채 변명만 늘어놓는 사람은 철쭉님에게 무참히 깨졌다. 그리고 집단에 참여한 그 누구도 시간이 흐를수록 예외 없이 철쭉님의 이성적인 칼날을 비켜나갈 수 없었다.

 

  말이란 잘 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지옥이오, 한 마디에 웃음이 나고 한 마디에 성나게 된다. 그러기에 말로써 시작하여 말로써 끝을 맺는 상담에서 상담자는 말을 잘 듣고 이해해야 함을 물론 말을 골라 쓸 줄 알아야 한다. 철쭉님은 상대의 말을 가슴으로 느끼고 상식으로 다가가 달관된 화술로 무자비하게 칼을 휘두름으로써 못다한 말, 가려진 말까지도 그 실체를 드러낸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슴이 써늘하다 못해 정신없이 헤매는 사람들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그래도 사회에서는 나름대로 많이 배우고 목에 힘깨나 주며 제멋에 취해 살아온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한말에 자기가 걸려들어 달아날 길이 없게 된다.


  내가 태어나서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이토록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사람은 여간해서 변하지 않는가 보다. 자신의 신념, 행동방식, 그리고 처한 입장에 집요하다 못해 처절하게 매달린다. 자신의 편협한 사고(思考)의 틀을 인정하고, 그것을 깨기가 그렇게 힘든가 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가 동정하고, 자신에게는 특단의 면죄부를 허용하며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철저히 방어했다. 누가 들어도 변명의 여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움도 모른 듯 강변 했다. 간혹 누군가가 자신의 변명에 값싼 동정과 정신없는 공감의 말투를 한마디만 거들어주면 ‘그것 봐, 내가 맞지!’ 하는 식으로 마치 움츠렸던 용수철이 튀듯 다시 못난 과거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갔다.

 

  나는 오늘날까지 공감이나 타인을 이해 한다는 것이 참 좋은 것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공감을 남발하는 것이 독이 된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됐다. 참으로 무서웠다. 사람은 상식으로 무장되어야 하며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알 것 같다. 객관적으로 바르게 초점을 맞추지 못한 공감이나 이해의 한 마디는, 그 좁은 집단의 공간에서도 엄청남 파장을 일으키는 현실을 목격했다. 그래서 옛날 성현들은 함부로 말을 하지 말라고 경각심을 일깨웠나 보다. 그러니 어찌 남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말을 함부로 쉽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철쭉님의 냉소와 냉정함은 깊은 고뇌와 사려깊은 사랑이었음을 깨닫고 감탄했다.

 

  언어는 칼처럼 무서웠다. 상담은 말로써 타인의 감정을 흔들어 사람을 변화시킨다. 말이란 무색무취하고 보이지 않고 잡을 수 없어서 너무 허전하다. 또한 말이란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새로운 생명으로 소생시키기도 하는 무서운 힘을 가졌다는 것을 집단으로 통해서 실감나게 터득했다. 집단에서 만난 철쭉님의 말은 말이 아니었다. 외과 의사가 사용하는 메스였다. 그곳에서 인간은 말이 아닌 칼로써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심리학자 매튜 앤더슨은 상담자를 선별할 때 불평을 듣고 동의해 줄 사람 대신 문제 해결 방법을 제시할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라고 하였다. 철쭉님이야말로 문제 해결의 방법을 제시하는 지혜로운 상담자였다. 가뜩이나 상담이라는 이름으로 비현실적인 내담자를 고상하게 포장된 또 다른 비현실로 인도하는 상담자들과는 다르게 현실에 눈을 뜨게 하고 두 발로 땅위를 걸을 수 있게 하는 진정한 상담계의 어른이라 여긴다. 삶이 암울하고 고단하여 지치고 외로운 자에게 철쭉님은 허기진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는 스승이자 어른이셨다.






 


 




 

출처 : 가톨릭대 상담심리 대학원 원우회
글쓴이 : 장성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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