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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유로워진다는 것

반찬이 2009. 3. 13. 21:05

자유로워진다는 것

장성숙/ 가톨릭대학교, 극동상담심리연구원



  살다보면 가끔 뜻하지 않은 데서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언제 어떻게 주어질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런 기회를 종종 집단상담에서 맞이한다. 그래서 그동안 만났던 참석자들에게 정말 감사한다는 말을 진심으로 하게 된다. 

 

  이번에도 20명 정도의 사람들이 집단상담에 참석했다. 여느 때처럼 나는 시작을 알리면서 참가자들에게 이곳에서만큼은 상대방에 대한 본인의 느낌이나 생각을 솔직하게 언어화시켜보라고 했다. 그렇게 표현함으로써 당당하게 자기목소리 내는 법을 익히게 되고, 동시에 거울처럼 비춰줌으로써 상대방이 깨어나도록 돕게 된다고 말했다.

 

  참석자들 중에는 교직자인 50대 후반의 남자선생님이 있었다. 겉보기에도 무척 착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나는 그분에게 어떻게 해서 집단상담에 참석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선생님은 집단상담을 몇 차례 경험한 적이 있는데 퍽 좋아서 이번에도 수련 삼아 왔노라고 대답했다. 사실 자기는 다른 집단상담에 참석하려고 여기 저기 신청을 했었는데 불경기 때문인지 다들 무산되는 바람에 뒤늦게 신청을 해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와서 보니 의외로 사람들이 많아 놀랐다고만 간단히 말을 했다.  

 

  더 이상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분은 무섭다고 소문난 내가 개최하는 현실역동 집단상담에는 별로 내키지 않아 자기 성향에 맞는 보드랍게 진행하는 집단상담에 가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다른 몇 군데서 성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환불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이곳으로 온 것이다.

 

  그분은 집단원들 중 누구라도 말을 하면 온 정성을 기울여 경청했으며, 또 누가 자기에게 뭔가를 물으면 성심성의껏 대답해주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집단상담의 흐름을 좇는 그분의 자세는 진지했다. 그리하여 아무도 그분을 싫어하지 않는 듯했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나 고지식하고 성실하기만 했기 때문인지 딱히 그분을 좋아하는 사람도 없어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점점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하자, 그분도 어느 시점에서 근래에 겪은 자신의 분심을 표현했다. 오랫동안 수도생활을 하다가 뒤 늦게 나와서 결혼을 하는 바람에 자녀들은 아직 초등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아내가 우울 증세를 보여 불가피하게 변화를 주고자 대학원에를 다니게 하였단다. 그런데 그 대학원이 멀리 지방에 있기 때문에 아내가 그곳을 다니느라 가사 일을 소홀히 하게 되었는데 그러니까 왠지 자꾸 싫은 마음이 들더란다. 그러던 중 아내의 휴대 전화기에 내장된 남자의 사진을 발견하고 이게 누구냐고 묻자, 교수의 사진으로 급우가 같이 공부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준 것이라고 하여 오해가 풀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현재 굳이 원하는 것을 꼽으라면, 아내가 교수를 비롯한 급우들과 장시간에 걸쳐 해외로 졸업여행을 다녀오기로 되어있는데 가능한 한 기쁜 마음으로 보냈으면 한다는 것이다.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긴 했다. 그러나 당사자가 전혀 아내의 상태를 문제 삼지를 않으니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지켜보기나 할 따름이었다. 그러다 내가 그에게 한 말은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당신이 참 진실하고 좋은 사람인 줄은 알겠는데 왠지 재미가 없고 지루해집니다. 당신 부인도 아마 당신에게서 이런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이런 곤란한 말을 던졌는데도 그분은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썩 달가워하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무엇에 근거해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되묻지를 않았다. 즉, 뭔가 자극을 주었는데도 그는 말을 이어가지 않고 그냥 거기서 끝을 냈다. 참 밋밋했다.   

 

  마침 집단에는 이혼을 한 여교사가 교원노조 활동에 적극성을 보이다 지친 상태에서 동료교사의 권유로 참석하게 된 사람이 있었다. 그 여선생은 이런저런 면에서 치우친 모습을 보였고, 집단원들은 많은 피드백을 그 여선생에게 보냈다. 여러 가지 말 중에서도 특히, 이혼을 한 사람으로서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가정이 깨어졌으면 본인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만만치 않게 충격을 받았을 테니까 교원노조 활동 같은 것에 마음을 쏟을 것이 아니라 어머니로서 아이들의 상처에도 각별히 마음을 써야 하지 않겠느냐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러나 그 여선생은 안중에 별로 아이들이 자리하고 있지 않은지 사람들이 왜 자기의 수고를 몰라주느냐 하는 분한 마음을 표출하기에 바빴다. 아이들의 상태보다 자기의 갈증이나 욕구가 우선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다. 나름대로 무슨 말을 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모두 자신의 억울함이나 이기심을 반영하는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어찌 그렇게 말을 못 알아듣느냐고 아우성을 쳤다. 그래도 그 여선생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어느 한 청년이 어렵게 스리 입을 열었다.

 

  “저 역시 부모가 이혼을 하는 바람에 엄청나게 혼란을 겪은 사람입니다. 어머니는 떠나가고 아버지는 속이 상한 나머지 친구들과 어울려 화투를 치다 밤늦게야 돌아오시곤 해 나는 친구들 하고나 정붙이고 살았지요. 그렇게 밖으로 돌아치다 이 나이가 되도록 자리를 잡지 못한 저는 지금 아버지의 근심덩어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아이들이 저처럼 되지 않도록 신경을 쓰세요. 어쩌면 그 아이들은 저보다 더 망가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집단에서 가장 어눌해 보이던 청년이 그렇게 말을 하며 울먹이자 장내는 숙연해졌다. 좀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에 의해 억지로 집단상담에 온 자로서 미적거리던 사람인데 그런 그가 이렇게 뼈있는 말을 한 것이다. 그 여선생의 태도가 얼마나 답답하게 보였으면 그런 호소를 했겠는가.

 

  그래도 그 여선생은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아무런 말도 않고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저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 마음이 드세요?”

 

  “내가 수업 이외에 다른 활동을 다 접고 아이들에게나 몰두하다 스트레스가 쌓여 도리어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면 어떻게 하나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 여선생의 이러한 말에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부모의 이혼으로 피해자가 된 그 청년이 자신의 아픔을 열어 보이며 제발 자기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아이들에게 신경을 써주라는 말을 못 알아듣고 그렇게 초점이 빗나가는 반응을 보이니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한 숨을 푹 내쉬었다. 바로 그때 맞은편에 앉아있던 대학교 1학년생인 여학생이 그 여선생을 향해 내뱉었다.

 

  “당신 같은 사람하고는 정말 상종도 하기 싫어요.”

 

  그러자 그 순둥이 같은 50대 후반의 남자선생님이 경색을 하며 그 여학생에게 물었다.

 

  “아니, 사람을 앞에 두고 어찌 그런 심한 말을 한단 말입니까?”

 

  아직 어린 여학생은 아버지 연배나 되는 그 남자선생님의 질문에 아무런 대꾸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솔직한 자기 심경을 있는 그대로 내보였는데 그런 반격이 들어오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난처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집단상담의 진행자로서 내가 얼른 대꾸했다.

 

  “바깥 사회에서는 남이 들어 기분 나빠할 만한 이야기를 하지 않지요. 속으로는 별의 별 욕을 다 하더라도 겉으로는 좋은 이야기만 하려 하는 것이 사회생활의 매너이니까요. 그러나 여기 집단상담에서는 각자 자기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즉, 깨어나도록 비춰주는 특수한 자리니까 긍정이든 부정이든 가리지 말고 보고 느낀 대로 솔직하게 되돌려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남자선생님의 항의를 차단했다. 그러자 남자선생님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는 진지하게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동시에 장내에서 조금이라도 일리 있는 말이 나오면 연방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그 남자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자기는 일찍부터 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랐다고 한다.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던 어머니는 늘 자기에게 착하게 살라며 부정적인 표현을 삼가도록 하셨단다. 그러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고 자란 자기는 커서 수도원에서 20년 이상을 지내면서도 언제나 착하게 살고자 노력하였단다. 그 결과 자기는 지금 무슨 큰 소리가 나는 것이 극도로 싫고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피드백을 들었는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솔직하게 표현을 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것을 다 억압하다보니까 전반적으로 감정이 죽어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자기가 지루하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부터 배워야 할 것 같다는 것이다. 자기가 늘 자유로워지는 것을 추구해왔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좋거나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함으로써 이룩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전혀 예상치도 않았는데 이곳 집단상담에 와서 큰 것을 얻었다며 그분은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여학생을 향하여 확인하듯 물었다.

 

  “얼마 전에 저 여선생에게 상종도 하기 싫다고 말한 것은 상종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니라 그 순간 그러한 감정이 들 정도로 갑갑하고 싫었다는 말이지?” 

 

  사람들은 와 하고 웃었다. 그렇게라도 확인을 해야 마음이 놓이겠는 그분의 고지식함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 여학생은 씩 웃으며 마치 봐주기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그분이 뭘 염려하는지 알겠는지라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요. 앞으로 상종을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그런 마음이 들 정도로 싫었다는 표현일 따름입니다.”

 

  그러자 그분은 안심이 되었는지 흡족하게 웃었다. 또다시 사람들은 와 하고 웃었다.

 

  젊은 사람들은 솔직하게 표현한다는 것이 순간순간의 감정을 의미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한다. 그런데 왜 어른들은 그렇게 겁을 내고 표현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인지……. 사실 부정적인 표현을 한다고 하여 위험할 것도 없다. 만약 부정적인 표현이 합당하지 못한 것이라면 그에 대한 반격이 있게 마련이다. 표현을 해봐야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이 합당한 것인지 아니면 잘못된 것인지가 금방 드러난다. 합당한 표현이라면 상대방이 깨어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고, 부적절한 표현이라면 내가 시정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아무튼 그분의 일목요연한 설명을 들으면서 나 또한 그분 못지않게 환희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동안 나는 솔직한 표현이 당당함을 향해 가는 걸음마라는 것을 강조해왔다. 그런데 솔직한 표현이 당당함 이상의 ‘자유’에까지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그분의 설명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바로 그 점이 내게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을 준 것이다. 한 때 나도 자유라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얼마나 동경했었던가.

 

  그분 말씀대로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억압에서 풀려나는 것을 의미한다. 억압을 걷어낼 때 우리는 가장 자연스럽고 동시에 자유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저 멀리 있는 이상이 아니라 실생활이 영위되는 바로 여기에서 그때그때 표현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알고 보면 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 손쉬운 것인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 특히, 상담을 실시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상대방을 위한다는 미명아래 나쁜 말은 감추고 좋은 말만 해주려한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상대가 너무 취약할 때는 어린아이를 다루듯 그렇게 접근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그러나 상대가 자기 생활을 꾸려갈 정도의 힘이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말을 가려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쓴 소리를 들을 때 사람은 더 빨리 깨어나며 자신의 실존에 대한 책임을 지려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공감을 강조하는 인본주의적 상담접근에서도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자신의 내․외가 일치하도록 솔직한 반응을 하라고 한다. 그렇게 해야 내담자가 처음에는 다소 놀랄지라도 결국에는 상담자에 대한 신뢰감을 갖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남자선생님은 우리 집단상담에 참석을 하게 된 것이 행운이라며 뜻하지 않게 큰 깨달음을 얻어 간다며 감사를 표했다. 늘 자유를 추구해왔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솔직한 표현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힘주어 말했다. 그분 덕분에 나도 큰 것을 얻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더없이 기뻐했다.
Misty morning on the A37
 

 
출처 : 가톨릭대 상담심리 대학원 원우회
글쓴이 : 장성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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