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ory/성격심리학

Personal Construct Theory and the Psychotherapeutic Interview

반찬이 2018. 12. 3. 20:06

George A. Kelly(1905-1966)은 “개인구성이론“으로 잘 알려진 심리학자로 Kansas에서 태어났다. Iowa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Kelly는 진단적 검증의 이슈라는 그의 첫 작업에 몰두하였다. 그의 경력 두루두루에서 그의 유용한 이론들이 있는 치료적 심리학적 서비스를 제공하고 훈련하는 데에 그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개인구성이론은 성격과 임상적 실제 접근에 있어 큰 충격을 맞게 된다. 그는 과학자로서, 모든 사람 자신의 특별한 방식에서 모든 사람이 주장하는 인간행동을 묘사하는데 과학적 도구의 모델을 사용해 왔다. 중요한 것은 켈리의 주요 저서가 심리학에서 연구되어 확립되어온 인지심리학 이전인 1955년에 출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음에 따르는 인지 사회학습 이론에 대한 토대를 마련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이론의 역사

몇 년전에 내가 치료적 절차에 대한 메뉴얼을 쓰기 위해 처음으로 준비를 마쳤을 때, 그것은 심리학자들이 필요로 하는 기초지식을 튼튼히 만들기 위해서, 그들을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다른 과학자들은 그들의 현장에서 기초지식을 튼튼히 가지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었을까? 다른 경우에 우리들에 관한 모든 것은 배짱과 단도직입적인 솔직성을 가진 사실의 최첨단(미개척 영역)을 꿰뚫어보는 사람을 튼튼하게 키우는 것이었다. 근본적이고도 기본적인 원리와 사실을 발견하는 보통사람도 자신의 군더더기 말의 안락함을 뛰어넘는 모험을 전혀 할 생각이 없어 빈혈증세를 보이는 철학자들을 믿지 못한다. 그리고, 아직 여기에 인간 정신에 대한 모든 조망이 어둡다하더라도, 그것이 한 걸음만 나갔더라면 - 우리 눈 뒤에 너무나 가깝게 있는 깊은 동굴과 Delphian mystery안에 그림자처럼 있다. 그리고, 심리학자들은 과학자1)

그러므로, 실제적인 사람, 어떤 것으로서 과학을 바라다봄으로써 자기자신을 상상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실제적인 것이다. 인간존재와 접촉하는 심리학자는 뒤죽박죽되어 어렵게 정의되어진 것으로부터 심리학이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 용어를 함께 조율하는 법에 대해 아는 정도에서 저술하기로 제안하였다. 특히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그가 사회적 관습의 끈으로부터 어떤 것을 매달고 있느냐 보다는 오히려 그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그는 행동한다. 나는 이러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나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의 기본적인 본보기를 거론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약속에서 벗어나 만일 충분히 심리학자들이 참여하고자 한다면, 나는 거대한 잠재력의 궁극적인 성과와 인간 정신의 반(半)의식상태에서 점차적으로 깨어나는 것을 계획할 수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이런 모든 상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매뉴얼은 최소한 그러한 종류인 매뉴얼로써 쓰여진 것은 절대 아니다. 실제적인 일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 마냥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불가피하게 늦어지고, 마지막으로 일반적인 생각이 떠오르며, 나의 도움을 찾는 누구에게 내가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 어떻게 생각하여도, 나 자신의 기묘한 광경을 통하여 나는 항상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를 통하는 것을 제외하고, 내가 미친 듯이 그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 무엇인지 그가 절대 알지 못하게 한다. 이 순간이 멈췄을 때, 모든 심리치료자들이 그가 그것을(현실주의자) 받아들이길 원하는지 아닌지를 선택할 때, 현실주의자가 된다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만질 수 없는 인간 정신과 보증된 진실, 꾸러미로 포장된 사실로서 내담자에게 심리학이 다시 나타나지 않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현실주의”는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에서 좋은 용어는 아니다. 물론 그 용어는 플라톤의(비현실적인) 현실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님은 더욱 명백하다. 아무도 더 이상 그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내담자와 내가 가진 현실주의는 항상 헐겁게 꿈틀거려서 “유물론적인 현실주의”라 불리울지 모른다. 최소한 그것은 과학자, 사업가, 신경증 환자에게는 요즘 상상이 안되는 변화이다.



현실주의와 독단주의

여기에 어떤 일이 벌어졌다. 엄격하고 전문적인 훈련보다 교양과목과 같은 학문의 배경을 가지고 임하는 대다수 치료자들이 내담자 문제에 대해 독선적 해석을 하는 것은 때론 좋은 것이라기 보다는 해가 된다는 사실을 난 곧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단지 고통받는 내담자들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치료자들은 그가 하는 많은 방법과 도구에 영향을 주고자 한다. 독선주의는 단어가 포함된 사고로 대치된, 자유로운 조사를 하는 열정을 숨막히게 하는 정신적 경직을 만들고, 마지막 치료적 면담의 결론에서 성격을 단단하게 봉합하고자 한다.

특히 어떤 엄격한 다른 대안에 대해 심사숙고할 때, 독선주의가 심리치료에서 어디든지 자리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말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 사실은 독선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확고하고도 분명한 점으로써 우리 모두의 유익함을 증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문제이다.

실제로 삐걱거리는 나를 풀어준 것은 다음과 같은 내담자에 대한 관찰이다. 종교적 또는 심리적 변화의 철저한 독단적인 해석과 부딪히는 사람에게 많이 일어나는 심리치료 과정 동안에 자신에 대해 잘 느낄 줄 아는 내담자는 실제적인 현실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 관찰의 뒷부분은 독단적인 개념 - 말의 입으로부터 진실의 단어를 가진 신념 - 과 현대 현실주의 - 자연의 입으로부터 진실의 단어를 가진 신념 - 를 가져온다(같은 단어가 더해졌다). 더 나아가 드러난 진실의 본성에 대한 가정은 과학자에게도 내담자에게도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고 짐작해본다. 그러나, 특별한 두 개의 가정은 우리가 심리치료라고 부르는 최고의 존재론적 모험의 방법에서 공정함을 얻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더불어서 보수fee 중심적인 의료 물질주의는 여기에 묶인 포로가 되어 현재 행복하지 않은 상태를 영구히 하도록 만든다고 확신한다.

존재론에 대한 나의 기본적인 관점은 - 한 사람이 내담자, 심리치료자, 물리학자, 예술가의 역할을 하든지 말든지 그 자체의 과정에 같은 존재론적 과정이 있다고 난 주장한다. - 요 근래에 몇 가지 면에서 변화를 가져왔다. 그 중 나에게 기본적인 확신중의 하나가 남아있다. 아직 그것은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심리학자들을 위해서 중요한 부분으로 보인다. 심리학분야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초점이 있고 본질적인 영역과 과학적 연구 도구도 있는 임상심리학이 그 이유를 말해줄 거라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으로 내가 보는 전통적인 심리학은 아직까지 자기 의식적 과학이고, 주제를 가진 문제에 중요성을 많이 두지 않는다. 과학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더 주의를 기울이는 대신 이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 자신의 직업을 갖고 있는 심리학자들에게 더 잘 어울린다. 심리학자들이 성공적으로 넓혀놓은 영역에 “과학”은 마침내 자신의 도구들을 필요로 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단지 기쁨을 가져다 줄 뿐이다.

독단주의안에서, 나는 확실히 치료에서 독단주의가 나쁘게 작용한다고 처음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설명할 가치가 있는 관점을 내담자가 가지고 있다고 처음으로 인정했다고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만일 한 사람이 전적으로 독단주의를 피한다면, 그는 현실주의에 반대해서, 또한 현실주의를 위해서 자신에게 경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완전히 내담자의 창조적인 노력들을 숨막히게 할 것이다. 두드러진 현실주의를 인정하는 것을 직면하는 내담자는 머리가 둔한 치료자와 맞서는데 있어 서투르게 고정시킬 수 있다. 심지어 자신의 거친 감정과 함께 있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현실주의는 내담자가 죽음의 끝에 도달했다는 확신을 준다.



대안주의

내담자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가능성이 있는 어떤 것을 받아들이며, 개인적 판단을 배제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의해서 또는 수동적인 것에 의해서, 나는 나의 내담자의 치료자로서 그들을 일시적으로 현실의 가장자리로 밀어넣는 것을 회피해왔다. 친숙하고도 모호한 분위기에서 많은 내담자들은 치료자의 선견지명없는 근시안적인 점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각적인 것들을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현실주의자와 같이 행동하고 생각하는 치료자를 위해서도 이것은 좋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현실주의를 함축하고 있는 독단주의를 등지지 않고 나갈 수 있는 한에서만 관계된 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현실주의자가 아니며 - 그 이상도 아니다. - 내담자나 치료자가 누워서 사실을 말하는 내용에 대해서도 믿지 않는다. 이에 대한 정당함은 이론적 관점에 있다. 나는 그걸 보고 개인 구성의 심리학이라고 부르며 철학적 권리를 주장한다.

다른 빛에서 보여졌을 때, (출현)나타난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분명한 것은 없다. 이것은 내담자가 진정으로 심리치료를 시작할 때, 고통받는 사람을 지탱해주는 신념, 믿음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욥기에서 표현된 믿음과 같은 것이다. -주제 발달에 있어 기교를 부린듯한 시행도 너무 많이 있지는 않다. 철학적 전제로써 신념의 상태를 다음과 같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시 구성된다. 이것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구성개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 물론 이것은 현실을 그대로 묘사한 의미일 뿐이다. - 오늘날 구성개념은 반복되어 제시되는 인간 사고의 역사로서 완벽한 것이며, 마지막은 없다.

더구나 이것은 대부분의 심리치료에서 만들어지는 전제이다. 만일 치료자의 마음에 심리치료의 마음이 없어도, 최소한 내담자의 마음에는 이것이 있어야 한다. 사실은 내담자가 치료자에게 자신의 문제나 사실을 갖고 치료자한테 가지만,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에 대해서만 물어본다. (그 외에는 물어보지 않고) 그러나, 이것은 거의 기술적인 충고일 뿐 치료는 아니다. 내담자의 문제가 오히려 장애물이 되어 버리는 것을 내담자 자신이 추측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장애물은 아직은 궁극적인 형태로 되어진 사실이 아니지 않는가? 이 문제에서 나는 아직 자신의 변하는 모습에서 치료자의 도움을 찾는 현실적인 내담자를 만나보지 못했다. 외모나 현실에서 현실주의자는 비슷하게 활발하지 못한 행동방식을 가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치료적 경험이 도움이 되는 것을 찾는 내담자는 자주 “아무리 자기가 도움을 받았어도, 그 전과 똑같다. 그래도 뭐가 다른게 있다.” 라고 말한다.

현실주의의 포기는 몇몇 지도자들에게 경고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사고의 문을 열어젖히는 것과 같고, 그러면,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이 갈망하는 생각은 경첩이 떨어져서 문이 열리는 것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한테 어떤 상상력도 말하지도 않고, 자신에게도 그것이 없다고 믿는다. 자기에게 상상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자기가 언제까지 상상력이 없다고 할 것인가? 아마도 자기가 문제가 생길 때까지 상상력이 없다고 할 것이다. (실은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나중에 알게 될 때까지는 상상력이 없다고 자신이 말하는 것이다. 상상력은 자신의 문제, fact에 대한 상상력) 그러나,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복원이 가능하다 라고 말하는 것은 태도나 의미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해석되느냐에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완전히 반대인 것도 있다. 때때로 다른 세계인 것이다. 몇 몇 재구성은 삶에 있어 풍부하고도 생산적인 새로운 통로를 열어줄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자살밖에 대안이 없는 사람에게 새로운 것을 제공해줄 수도 있다.



이론적 가정

그 다음 단계는 철학적 전제 - 그것을 보고 대인적 구성개념이라고 부른다 - 부터 심리적 가정까지 그를 이끌어준다. 이 가정은 “개인의 과정은 그가 사건을 예견하는 방식에 의해 심리적으로 통로화된다.” 그 다음 진술에는 몇 가지 추론의 요점이 포함되어 있다. “자신의 삶을 사는 개인은 그 다음에 무엇이 오는 지도 알고 있으며, 그가 개인적 구성개념을 가지게 되는 통로도 알고 있다. 그는 실제로 무엇이 어디에서 일어날지도 알고 있다.”

어떤 기준틀에 의해 만일 이러한 노력이 실패한다면, 그의 구성개념을 다시 신중하게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 열린 질문위에 놓여지고, 그가 생각해 놓은 미래는 흔들릴 것이다.

실수를 만들지 마라. 여기 우리는 우리 모두가 어려움을 갖고 있는 정확한 부분이 있다. 만일 우리가 잘 못 이끈 구성개념이 독단주의적 신념에 기초한다면, 신이나 최고 소비에트 회의 같은 곳처럼 그들이 말한 대로 열릴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바꾸고자 하는 대담함을 갖지 못할 것이다. 비슷하게, 독단주의보다도 자연의 원천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면, 현실주의는 선택할 수 없는 부분이며 그냥 적응해야 하고, 문제 있어도 좋은 방법으로 잘 선택하고 잘 교정하게 된다. 또는 만일 우리를 싸움터로 이끈 관념이 전적으로 실수한 것이라면, 만일 우리의 확신의 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가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모든 부분에서 혼란은 시작될 것이다. 어떤 식이든 이런 방식은 안 좋다. 다행히 진로를 벗어나도 항상 다른 대안은 있다. 개인은 그것들의 다른 것을 보지 못한다. 바로 심리치료!



심리치료의 관점

우리는 그것이 교리나 자연과학의 형태로 그 앞에 놓이든지, 자신의 감정이 파도처럼 몰려오든지간에 윤곽있는 실제를 다루는 내담자와 직면하는 심리치료에 대한 관념을 제외시켰다. 대신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무엇이든지 같은 방식으로 실제에 접근하는 내담자를 보았다. 예술가로부터 과학자까지 모든 방식에 있어 방법은 정열되어 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사이에서 내담자는 이미 거기에 있지 않거나 이미 알려지지 않은 창조된 어떤 것을 가정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일에서 운 좋은 내담자는 심리치료사라는 파트너를 갖는다. 그러나, 심리치료사는 그들이 함께 직면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궁극적인 대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문제를 함께 봐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둘이서(혼자하는 것이 아닌) 서로 질문하는 것과 가끔씩 실수하는 위험도 있다. 그 결과, 성실하고도 협동적인 노력을 할 수 있고, (서로 상대방이) 다른 사람이 제안한 것이 무엇인지 각자 이해하고자 한다. 그리고, 자신이 다음을 위해 준비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그 사람을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가설을 연합하여 공식화하였다. 심지어 그들은 함께 실험도 한다. 그들이 함께 결과를 축적하고, 그들의 직감을 교정한다. 그들은 보스도 아니고, 불쾌한 일로부터 거리감을 유지하려는 예의바른 이웃들도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한 그들은 공동협력자들이다.

심리치료실은 가설이 공식화되는 실험실처럼 보호된다. 시험관 크기의 실험이 수행될 수 있고, 실습이 계획되며, 결과가 산출된다. 다른 것들 중에서 면담은 그 자체로 행동안에 실험과 같은 걸로 간주된다. 내담자는 무엇이 일어날지에 대해 보고 말하게 된다. 이런 일을 치료사들이 한다. 그 다음 만일 결과가 그들이 기대했던 바대로 나온다면 서로 물어보고 자기자신에게 되물어본다. 때로 초보 치료자는 도움을 주려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대뇌 사전(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 배운 모든 것)으로 도움을 주려하지 말고, 들을 때에도 내담자의 목소리로(그들의 톤, 감정, 이런 것들이 섞여 있는 목소리) 잘 들어야 한다.

그 단어들 글자 그대로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히 여기지 말고, 대신 다시 회상하라. 그들이 내는 소리가 무엇과 같은지. 한 순간의 내용을 무시하고, 주제를 받아들여라. 내담자가 갑자기 내용을 바꿔서 이야기하는 것을 기억하라. - 그렇게 하여 상상력없는 치료사들은 완전히 냄새나는 곳으로 던져진다 - 그러나, 그는 쉽게 자신의 주제를 바꾸려하지 않는다. 또는 강력한 몸짓 소리, 입과 함께 얼굴 찌푸림, 희망없이 중얼거리는 소리, 단어가 아닌지만 동사앞에 나오는 절규와 같은 음성소리에 대해 생각해보라.  

그러나 다른 시각으로 치료자는 내담자를 돕기 위해 단어를 찾고, 새로운 생각에서 나오는 정확한 단어들을 찾으며 모든 노력을 할 것이다. 적당한 시간에 알기 어려운 생각에 정확히 이름을 붙인 것은 가설의 실험적 검사와 연구를 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것이다. 특히 팀이 - 내담자와 치료자 - 개인적 구성개념을 만들 때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토의하기 전에 더 나아가 우리는 이 이론의 관점으로부터 개인적 구성개념에 대해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인적 구성개념

개인은 다음에 무엇이 올지 도달하고자 하는 것에 의해 그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가 어떤 것에 도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통로가 개인구성개념이다. 그는 앞으로 나타나는 것이 무엇인지는 개인구성개념에 의해서이다. 이렇게 우리는 개인구성개념에 대해서 말한다.  삶의 한 사건은 전적으로 이상하거나 홀로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재발생된 것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인간 특성은 오늘은 어제와 같이 보이게 만들고, 내일은 또 다른 날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우리를 이끈다. 이것은 오늘/내일/어제라는 하루(one's days)들에서 비슷한 점이 무엇인지를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없이, 미래는 정말 혼란스럽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날들이 모두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시간과 햇수 한복판에 그들을 잃어버리는 것이다.(의미가 없다) 날들이 모두 비슷하게 보이지만,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다른 사건other events과 함께 연결되어 있는 어느 한 사건an event2), 이 양쪽을 보존하는 것으로 해석construe3)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이 세계는 자신의 방법으로 우리 각자에게 명령을 내린다. 구성개념constructs과 사건events은 뒤섞여있다. 그 결과 사건events은 구성개념constructs의 정의definition4)5), 主知化6)

구성개념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고, 자신의 대인관계는 특별히 그 중요성을 가진다. 심리치료는 내담자와 주로 관련된 데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한 사람의 소망보다도 항상 소수의 소망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담자가 유용할 수 있는 인간 자원의 패턴을 설정해 놓는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행동이나 기분의 변화를 적용하려고 할 때, 그들은 자신의 위치를 변화할 수 있는 길과 그의 인생에서 찾을 수 있는 대안을 활짝 열어놓는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치료자가 예측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위협에(분명하게 표현되지 않는 위협까지 포함해서) 내담자가 어떻게 반응할지를 통제해준다. 어느 정도의 범위는 심리치료 그 자체를 항상 암시한다.



심리치료에서의 다양한 기법들

내담자와 치료자는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그들의 일을 해 나갈 수 있다. 본질적으로 다양한 방법들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경우나 다른 경우에 있어서도 거의 비슷한 것으로 인간은 항상 곤란한 일을 겪게 된다. (1) 그럴경우, 내담자는 더욱 더 분명한 참조축reference axes으로 위치를 바꾸게 되고, 그들 중 두 사람은 그러한 결심을 하게 된다. 이것이 만일 당신 마음에 들면, 그것을 보고 slot rattling(superficial movement)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그 자리에 있게 된다. (2) 또는 내담자가 준비하는 레퍼토리로부터 또 다른 구성개념을 그들이 선택할 수 있으며, 그것을 바로 가까이에 있는 문제에 적용할 수 있다. 이것은 오히려 직접적인 접근이기도 하다. 보통 내담자는 이미 그것을 시도한다. (3) 그들은 인간 삶의 많은 단계마다 지시하는 모든 것에 의해 언어습득이전에 더욱 뚜렷한 구성개념을 만들 수 있다. 무의식을 긁어 퍼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런 형상 중 몇 가지는 유용하게 발견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사용하는 것은 선호하지 않는다. (4) 그들은 내적 일관성internal consistency을 위해 그것을 검증할 수 있는 구성개념 체계를 정교하게 만들 수 있다. (5) 그들은 예언 타당도predictive validity를 위해 구성개념을 검증할 수 있다. (6) 그들은 어떤 구성개념의 편리성의 범위를 증가시킬 수 있다. 그것은 더욱 일반적으로 적용된다. 또한, 그들은 편리함의 범위를 줄일 수 있고, 그래서 퇴화의 한 종류인 구성개념을 줄일 수 있다. (7) 그들은 reference axes를 순환시킴으로써 구성개념의 의미를 바꿀 수 있다. (8) 그들은 새로운 reference axes을 만들 수 있다. 이것은 모든 것의 야심적인 사업이다.

구성개념을 변경하거나 제자리로 돌리는 것 - 마지막으로 언급된 두 가지 방법 - 은 본질적으로 창조적인 일중 하나이다. 두 가지 방법은 환상, 꿈, 자유연상을 이용하거나 치료적 면담안에 있는 변화와 사람을 끌어당기는 내용의 도입중 하나를 통해 내담자의 구성개념을 (두 가지 방법 하기 전에) 먼저 이완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창조성은 사고의 단순한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순환을 가지고 온다. 이 순환의 두 번째 단계는 새롭게 자리잡거나 새롭게 형성한 구성개념의 타당도와 죄이기tightening가 포함된다.

나는 치료가 어떻게 이루어질지 여덟 개의 제목을 통해서 요약한다. 다른 내용들이 더 첨가되어 사용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심리치료가 개인구성개념 이론의 용어에서 어떻게 계획되는지 그 윤곽을 그릴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전통적으로 불리우는 “인지cognition” (이 용어가 뒤늦게 실제적인 장면에서 조금 사용되는 것을 발견했다.)라는 과정을 제한하지 않음으로써 더 분명하게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