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대상관계 이론에서 본 용서의 능력
멜라니 클라인과 용서의 능력
클라인의 이론 체계에서 용서를 구하거나 용서를 받아들이거나 용서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당연히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발달과정에서의 중요한 성취물이다.
그녀는 편집-분열적 자리와 우울적 자리라는 개념을 통해서 건강한 죄책감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건강과 병리를 가늠하는 핵심적인 기준임을 밝혔다.
그녀가 말하는 편집-분열적 자리의 주된 특징은 대상에 대해 배려하거나 관심을 가질 수 없는, 따라서 자신의 공격성에 의해 대상이 입은 손상에 대해 전혀 죄책감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발달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아무런 가책이나 책임감을 느끼지 못한다. 또한 이런 개인들은 박해불안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의해 발생한 실제적인 또는 환상적인 경미한 잘못에 대해서도 매우 악의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그것에 대해 보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개인들의 삶에는 용서란 없고 단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복의 법칙만이 존재한다.
편집-분열적 자리에서 죄책감을 느낄 수 있는 능력과 용서를 하거나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은 불안과 대상관계의 성질 그리고 방어기제의 특성이라는 세 가지 요인 때문으로 설명된다.
첫째 이 시기에 유아의 자아는 죽음 본능으로부터 나오는 멸절에 대한 공포로 인해 박해불안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이러한 박해불안의 상황 하에서는 생존에 대한
절박한 관심 때문에 대상의 운명이나 대상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이 시기의 대상관계는 부분대상과의 관계로서, 유아는 대상을 철저하고
무자비하게 이용하고 착취할 뿐 대상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과 배려를 갖지 않는다. 따라서 유아는 자신이 대상에게 어떠한 손상을 입힌다고 해도 그 결과에 대해서
아랑곳하지 않으며 결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셋째 이 시기의 유아의 자아는 투사적 동일시, 부인, 분열 등의 원시적 기제들을
사용함으로써 내부 및 외부의 현실들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고 관계를 맺기보다는 마음대로 왜곡하는데, 그 결과 대상의 현실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 세 가지 요인은 모두 유아의 초기 자아가 생명 본능과 죽음 본능이라는 두 가지 정신적인 세력들을 다루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연스런 현상에 속한다. 초기 자아는 죽음 본능에서 오는 세력과 생명 본능에서 오는 세력을 각각 대상에게 투사함으로써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을 만들어내고, 이 둘을 분열시켜놓는데, 이로 인해 자아 또한 분열 된다.
호의적인 상황에서 자아는 차츰 분열을 극복하고 통합을 향해 나아가는데,
그와 동시에 대상 또한 부분 대상에서 전체 대상을 향해 나아간다. 전체 대상의
출현은 대상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고, 이는 다시금 자신의 공격성과 그것의 결과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다주는데, 그 결과 불안의 성질이 박해 불안에서 우울 불안으로 바뀌게 된다. 우울 불안은 기본적으로 대상의 안위에 대한 염려로 채워지는 불안이다. 그와 동시에 자아는 원시적 방어기제의 사용을 포기하고 보다 성숙한 방어기제를 사용하게 된다.
클라인은 이러한 핵심적인 발달이 생후 4개월에서 6개월경에 발생한다고 보고,
이를 우울적 자리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유아는 최초로 죄책감을 경험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 시기에 유아는 자신이 그토록 무자비하게 공격했던
대상이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었음을 인식하면서, 대상이 입은 손상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데, 그와 동시에 초기 형태의 초자아가 지닌 가혹성으로 인해
죄책감은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으로 느껴지고, 그 결과 편집-분열적 자리로의 퇴행이나 조적 기제(manic defense: 대상에 대한 평가절하, 심리적 고통에
대한 전능적 부인 그리고 승리감 등을 특징으로 하는 복합적 방어기제)를 사용함으로써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회피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도피에 안주할 경우,
편집증이나 양극성 우울증과 같은 병리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유아의 자아가 현실 대상의 도움으로 좋은 내적 대상을 형성하고,
그 결과 초자아의 가혹성을 완화시킴으로써 우울적 자리의 고통을 직면하고
애도할 수 있다면, 드디어 회복충동의 출현과 함께 상처 입은 대상을 온전히 회복시키고, 병리적 성질의 초기 죄책감이 상처 입은 대상을 고쳐주고 치유하고
책임지고자 하는 성숙한 죄책감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발달적 자리에서 개인은 진정으로 대상과 자신을 용납하고,
진정으로 건강한 죄책감을 느낄 수 있고, 진정으로 용서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클라인에 따르면, 용서와 관련해서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첫째 부류는 아예 용서받을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편집-분열적 자리에 속한 사람들이고,
둘째 부류는 용서를 갈구하지만 결코 용서받는 기쁨과 해방을 누리지 못한 채 끊임없이 죄책감에 시달리는 초기 우울적 자리에 고착된 사람들이며,
셋째 부류는 죄책감을 느끼되 그것에 압도되지 아니하고 그것을 창조적인 충동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용서받고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숙한 우울적 자리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클라인에게 있어서 심리치료의 목적은 죄책감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죄책감을 보다 성숙한 형태의 죄책감으로
발달하도록 도움으로써 마침내 용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 치료자는 환자의 불안을 완화시키고, 좋은 내적 대상의 형성을
도우며, 원시적 방어기제를 포기하고 성숙한 방어기제를 발달시키도록 환자를
돕는 과제를 갖는데, 이러한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해석이라고 보았다. 환자의 불안과 그 불안의 근저에 있는 환상을 해석해줄 때 환자는
압도적인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자신을 그토록 깊이 이해해주는 치료자를 좋은 내적 대상으로 내사할 수 있으며, 이러한 좋은 내적 대상은 다시금 불안을
감소시키고 나아가 원시적 방어기제 대신에 성숙한 방어기제를 사용할 수 있도록 촉진시킨다는 것이다.
클라인의 이론 체계에서 용서의 능력은 결국 한 개인의 내면세계 안에 형성된 좋은 내적 대상의 힘에 달려있다. 좋은 내적 대상이 충분히 확립될 때에만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으로 나뉘어 있는 부분 대상관계의 상태를 벗어나 전체 대상관계 안으로 진입할 수 있고, 그럴 때에만 대상에 대한 관심의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고,
투사적 동일시 같은 원시적 정신기제를 보다 성숙한 공감능력으로 발달시킬 수
있다.
투사적 동일시는 가장 원시적인 정신기제로서 부분 대상관계 상태에서 진행되는 정신의 상호작용 방식이다. 여기에서 자아의 부분들은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고
대상에게 투사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투사된 부분을 동일시함으로써 대상을 점유하고 통제하기 때문에, 자아와 대상의 경계는 붕괴되고, 마구 대상을 침범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결국 이것은 대상관계를 파괴시키고 나아가 용서의 기반을 붕괴시킨다. 자아와 대상 간에 구분이 무너지고 혼동이 발생한다면, 용서의 가능성은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용서란 진정한 의미에서 대상관계 안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투사적 동일시는 폭력적이다. 아니 이 세상의 모든 폭력의 본질은 투사적 동일시이다. 여기에서 나와 너의 다름은 존중되지 않는다. “너는 내가 생각하는 너일 뿐이며, 당연히 나의 통제를 받아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나는 너를 파괴시킬 것이다”라는 논리가 지배한다. 이러한 폭력이 지배하는 곳에서 용서란 가능하지 않다.
그 둘은 결코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투사적 동일시는 발달할 수 있고, 그럴 때 그것은 공감능력이 된다.
공감에서 자아는 잠시 동안 대상의 입장에서 느끼고 생각할 수 있으며, 대상을
이해할 수 있지만, 결코 대상을 지배하거나 조종하려 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대상의 모습을 인정하고 존중해줄 수 있다.
그러므로 치료자는 치료과정에서 환자의 투사적 동일시를 반복해서 지적하고 해석함으로써 그것을 공감능력으로 변화시키는 과제를 갖는데, 이 또한 근본적인
의미에서 용서받고 용서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형성하는 과제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클라인은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방해물로서
시기심의 작용을 꼽았다. 이는 대상이 내게 무언가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 대상이 지닌 좋음 그 자체가 내게 상처가 되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과도한 시기심에 노출된 유아에게 있어서 엄마의 젖가슴은
자신이 갖지 못한 좋은 것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용납되거나 용서받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고갈되거나 오염되거나 파괴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도한
시기심은 대상과의 좋은 경험을 파괴하기 때문에 좋은 내적 대상의 형성을
방해하며, 결과적으로 용서능력의 발달과정을 가로막는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시기하는 모든 대상들로부터 외면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회피한 채로 살아간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용서받을 것도 없고 용서할 것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그들이 나보다 좋은 것을
가졌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 없고 또 그들이 지닌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들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클라인에 따르면, 최초의 발달과정에서 유아가 극복해야 할 과제가 바로
엄마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시기심을 극복하고 좋은 내적 대상을 건설하는 것이며, 이것이 또한 치료자가 환자와의 치료과정에서 담당해야 할 근원적 과제이다.
유아는 엄마의 젖가슴을 시기하여 환상 속에서 그것을 파괴하지만 현실의 젖가슴은 그 파괴를 견디고 계속해서 좋을 젖가슴으로 남기 때문에 유아는 시기심을 극복하고 좋은 젖가슴을 내사할 수 있는 것처럼, 환자는 치료자의 좋음을 시기하여
치료자를 공격하고 파괴하지만, 치료자가 그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좋은 대상으로 살아남아서 그러한 사실을 해석해주기 때문에 마침내 좋은
내적 대상의 형성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클라인의 이론을 용서의 맥락에서 풀어본다면, 유아는 먼저 자신의 공격을 용서해주는 엄마를 경험하는 것을 통해서만 용서의 능력을 발달시키며,
환자 또한 자신의 공격을 용서해주는 치료자를 경험하는 것을 통해서만 용서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우리가 먼저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자신을 잘못을 모르는 채 또는
방어한 채 계속해서 우리를 공격하는 이웃을 먼저 용서할 수 있을까?
내가 용서해야지 하고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과연 용서가 되는가?
물론 그것은 어렵다. 용서란 대상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요, 상호성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용서란 만남이요, 사건이요, 의사소통이요,
은총이지, 의지를 가지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클라인에 의하면, 우리는 적어도 우리를 공격하는 대상에 대해
똑같은 방식으로 보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 자신으로 살아남을 수는 있다.
그리고 그처럼 우리를 공격하고 파괴하고자 하는 대상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노력할 수는 있다. 대상이 이러한 공감능력을 만나고 경험하게 될 때,
그의 투사적 동일시는 차츰 공감능력으로 발달할 수 있게 되고,
대상에 대한 공격 충동의 죄책감으로 발달하고, 그 죄책감이 마침내
용서의 능력으로 발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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