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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유방암이 폐로 전이된 수녀님 수기

반찬이 2006. 12. 13. 16:48
유방암이 폐로 전이된 수녀님 수기l

유방암이 폐로 전이된 어느 수녀님

(이 글은 대한암학회 투병수기에서 가작을 받은 수녀님 투병 수기입니다.)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 나의 목표라고 장난처럼 말하곤 하였다.
가톨릭 수녀의 목표라고 하기엔 어울리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대학 때 어떤 교수님이 “너희는 굵고 짧게 살기는 텍도 없는 소리니까,
가늘고 길게 살아야 인생의 승리자가 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재미있기도 하고 그럴듯해서 그 때부터 나의 좌우명 아닌 좌우명이 되었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예감이 어렸을 적부터 갖고 있었다.
내가 제일 많이 닮았고 어쩌면 그분의 생의 모든 것이 비슷할 것만 같았던
증조 할머니는 90세까지 사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인생에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
1996년 여름 가슴에 무엇인가 잡히는 것이었다.
비갯 덩어리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를 6개월.
그 다음 봄에 병원을 찾았고 조직검사 결과 수술을 하게 되었다.
내 나이 만으로 30세가 되던 1997년 3월 9일 생일이었다.
유방암은 아주 간단한 수술이라고 주위 분들이 위로와 힘을 주었다.
“감자 하나를 꺼내는 거라고 생각하라며...”
그 말에 전적으로 신뢰하며 아무 걱정도 두려움도 없었다.

그런데 수술을 하루 앞두고 다음날을 생각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10시경 레지던트 선생님이 수술 계획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어느 부위를 얼마만큼 절단할 예정이라고, 마취를 해서 깨어나지 못할 가능성
... 등 여러 가지를 들었는데 제대로 이해되지도 않았고
아무리 잠을 청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수면제를 먹고 자고 싶었지만 수술 때문에 12시가 넘은 시간에는
먹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렇게 긴 밤을 보냈다.

수술을 기다리며 누워 있는데 온 몸이 추워서 떨렸다.
담요를 더 덮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마음으로 ‘별거 아니야~’ 하고 되새겨 보았지만
잠재의식에 두려움이 소리 없이 엄습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수술은 잘 끝났다. 임파선도 조금 잘라 냈다고 한다.
지름은 1.5cm 정도 탁구공 만했다고 한다.
나중에 2기말 정도 된다는 말을 들었어도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달에 2회씩 6개월간의 항암제를 맞기로 하였다.

수술보다 더 어려운 것이 항암제 맞는 일이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고 견딜 만 하였다.
얼굴빛이 노랗게 되고 속이 조금 울렁거릴 뿐이었다.
그런데 횟수가 더해 갈수록 사정은 달라졌다.
얼마나 속이 뒤틀리고, 미식 거리는지
그러다가 토하기를 반복하는데 미칠 것만 같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 만해도 토할 것 같아
기억하기도 싫은 일이 되어버렸다.
12번을 맞기로 했으나 11번을 맞고 도저히 견뎌낼
힘이 없어 주사를 그만 맞고 싶다고 청했다.
다행히 뜻이 전해졌고 한 달에 한 번 진료를 보고
타목시펜을 먹기로 하였다. 그리고 6개월에 한 번씩 Bone Scane과
초음파를 찍으며 체크를 해가기로 하였다.

항암제를 끝내고 그해 가을, 내가 소임을 하고 있던
천안복자여고 도서관으로 다시 돌아갔다.
몸이 예전 같지는 않았으나 그만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여고생들의 젊음의 열기 덕분인지 빠른 시간 내에 내 생활의 패턴으로
자리를 잡고 암 환자란 의식을 하지 않고 일상을 열심히 살았다.

그 다음해는 수녀원에서 일생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종신서원 준비를 위해 집중 수련에 들어갔다.
꽃동네에서 무의탁 할머니들을 위한 목욕, 청소, 식사준비 등
육체적인 봉사활동을 한달이 넘게 체험하면서
삶의 의미를 더욱 깊게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1999년 2월 종신서원을 하고 새로운 소임지에 파견이 되었다.
아직 건강이 다 회복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지만
수도회의 결정에 따라 본당(의정부1동 천주교회)에서 전교활동을 하였다.
처음의 걱정과는 달리 오히려 환자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한 달에 한번 환자들을 위해 방문을 갈 때면 내가 겪은 상태이기 때문에
진심어린 위로를 할 수 있었고, 함께 아파하고 기도하는 시간들이 되었다.
학생들과 체육대회, 소풍, 캠프도 함께 하고 자모회원들과
도봉산, 수락산, 소요산 등반도 하면서 의욕적이고 활동적으로 보냈다.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옛 순교성인들의 삶을 본받고자 실시한
도보성지 순례에 2박 3일간 함께 하면서 건강을 회복하게 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지향을 갖고 참여한 시간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흘리는 땀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다.

성서에 보면 10명의 나병 환자를 치유해 주셨는데 아홉은 그냥 가버리고
1명만이 예수께로 와서 감사를 드렸다는 얘기가 나온다.
배은망덕한 아홉 명 중 한사람이 되지 않도록
나는 자주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수술한지 5년이 지나도 이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병을 이겨낸 것으로 간주한다는 정보를 들었는데
그렇게 무사히 4년 7개월을 보냈다.

2001년 9월 잔 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평상시에는 아무런 증세가 없는데 말을 하면 밭은 기침을 하였다.
기침을 없애기 위해 도라지 삶은 물을 마시기도 하고,
무우즙을 내서 먹기도 하고, 살구씨도 먹었다.
11월이 되어 바람이 차가워져서인지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목이 잔뜩 부어 침을 삼키기 어려울 정도로 편도선이 부었다.

동네 병원에를 갔다.
증상을 이야기 하고 감기가 온 것 같다고 의사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다.
흉부 X-ray를 찍고 필름을 보시더니
조금 이상하다고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하신다.
필름을 복사해 가지고 내가 다니던 가톨릭대학교 성모자애병원
호흡기내과에 가니 필름을 보자마자 입원을 하라고 하였다.

생각지도 않은 일이 발생했다. 입원하여 몇 가지 검사를 더했다.
나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는 느낌이 오기 시작 했다.
"이제까지 잘 견뎌왔는데 무슨 일이 더 이상 생기랴"
하며 불안한 마음을 애써 숨겼다.

3개월만 지나면 수술한지 5년이 되는데...
그러면 병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삶을 살리라 기대 했었는데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처음보는 선생님이 몇 분이 더 오셨다.
새롭게 나를 맡으실 혈액종양내과 선생님들이시란다.

간단히 말하면 암이 폐로 전이 되었다고 한다.
세상에... 세상에...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 남의 일이 아니라
나에게 일어난 것이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이토록 험한 꼴을 당해야 하는가?”
하느님도 원망스럽고 세상도 미웠다.
하느님의 사랑 표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했다.
정말 미치도록 괴로워서 지레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가족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할까?
친구수녀님이 여동생에게 전화를 대신 해주기로 했다.
전화를 하는 사람이나, 전화를 받는 사람이나,
옆에 듣고 있던 사람이나 모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며칠 뒤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과 남동생 가족들이 병원으로 오셨다.

어머니는 내손을 잡으시며 “내가 대신 아파줄 수만 있다면 ...”
하고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셨다.
평소 감정표현을 안하시는 어머니이셨는데, 너무나 우셨다.
내 심장도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런 불효가 어디 있는가?
부모님이 주신 몸을 잘 관리했어야 했는데
이런 병에 걸리고 말았으니 말이다.부모님을 두고
먼저 떠나야 하는 심정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사도직을 하고 있던 본당에서 임기를 3개월 앞두고 짐을 정리하였다.
젊은 수녀가 병에 걸려 본당을 떠나는 것을 지켜본 분들도
자신의 고통처럼 함께 해주셨다.
죽을 위험에 있거나 병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기위해 주는 병자성사도 신부님께 받고 본당을 떠났다.
11월 초였는데도 바람이 몹시 찼다.

이제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주치의 선생님은 말씀하신다.
“수녀님들이 무슨 걱정이 있어요?” 맞는 말이다.
책임져야할 자식이 있나, 챙겨 주어야 할 남편이 있나,
병원비 걱정을 할게 있나, 살아도 하느님의 것이고 죽어도
하느님께로 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가깝게 내게로 와서 두려울 때마다 이 말씀을 생각했다.
24세에 갈멜 수녀원에서 세상을 떠난 성녀 소화데레사도 그의 자서전에서
‘죽음이 나를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데려 가는 것이다’라고 고백하셨다.

죽기보다 싫었던 항암치료를 다시 시작했다.
5년전 보다 더 강력하게...
머리가 한 웅큼씩 빠지기 시작했다. 무섭고 떨렸다. 머리를 밀었다.
수녀가 아니라 스님이 된 것 같았다.
머리카락을 잃은 상실감이 굉장히 컸다.
아무리 부정해도 이제 나는 암 환자가 분명했다.

우울해졌고, 계속되는 설사, 수면제 없이는 잠도 들지 못했다.
백혈구가 떨어 질 때면 촉진제를 맞아야 했고,
온 몸이 몸살기가 있는 것처럼 쑤시고 아팠다.

그러나 가장 큰 고통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하루 하루가 마지막 이라고 사는 수밖에 없었다.
삶도 생각하지 말고,죽음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오늘 만을 생각하며 살 뿐이었다.

‘죽음은 완전한 자유다’라고 본회퍼가 말했다.
모든 것을 내려 놓았다.
내려 놓은 것에 대해 슬퍼하지 않았고 나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은가?

‘그래 나는 결국 한번은 죽을거야...
그 시간이 예상보다 빨리 왔을 뿐이야...’
‘천수를 누리는 사람도 부럽지만, 가는 날을 알고
남은 날을 계획하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군...’

길지 않은 나의 삶을 정리했다.
수녀원에 들어와서부터 썼던 일기장 8권을 불에 태웠다.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살고자 애썼던 흔적들,
인간적인 미움과 사랑으로 몸부림쳤던 기억들을 없앴다.
잘났건 못났건 간에 내 삶의 기록들은 소중했기에 없애기에는 아까웠다.
그러나 내가 없어지고 난 다음에 내 삶의 기록들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아까웠지만 한편으로는 시원했다.

가족들과도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엄마, 하느님이 부르시면 피할 방법이 없어요...”
“그럼, 하느님께 맡길 수 밖에...”
귀엽고 사랑스런 조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학교에 들어가고, 교복 입은 모습, 사춘기를 어떻게 겪을 것인지?
어떤 이성 친구를 만나고 결혼하게 될는지 궁금한 것이 많은데
...포기해야만 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가족 여행을 설악산으로, 양평으로 다녀왔다.
상황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리를 해가면서.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

2002년 새해를 맞았다.
매년 그랬듯이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여느 해와는 다른 목표였다.
1) 병 이겨내기 2) 주님께 모든 것 감사하기
참 어려운 목표이기도 했다.
그해 겨울 몸과 마음이 꽁꽁 얼어붙었다.
때로는 길고, 외롭고, 지치고 힘든 시간이었다.

손 발이 저리기 시작하고, 글씨도 삐뚤빼뚤 이라
일기도 쓰기 어려워 졌다.
하루하루를 어떻게 견뎠는지 그럼에도 대지에 봄은 찾아왔다.
병원 앞에 벚꽃이 아름답고 화사하게 피었다.
벚꽃을 보는 기쁨으로 눈을 떴고, 하루 종일 벚꽃을 바라보았고
내일 또 벚꽃을 볼 수 있다는 희망으로 눈을 감았다.

벚꽃이 모두 떨어질 즈음 8차 항암제를 맞기 위해
심장 초음파를 검사하니 안 좋다고 한다.
입원을 했는데도 앉지도 못하겠고, 눕지도 못하겠고, 서지도 못하겠다.
숨이 찼다.
그동안 잘 견뎌왔는데 이제 올 것이 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욕도 혼자하기 힘들어 졌다.

간호사인 친구수녀님이 근무가 끝나고 피곤한 중에도
나를 위해 시간을 내주어 목욕을 시켜주었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매일매일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염려와 사랑을 주는
수녀님들이 있어 내겐 큰 힘과 위로가 되었다.

‘내일이 아름다운 이유는? 꿈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마다 ‘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며
마지막 기도를 드리지만 아름다운 내일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은총이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하느님으로부터 온 선물 말이다.
결국 꿈은 현실에서 이루어졌다.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16강에 진출하였고
6월18일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들었다.
게임이 끝난 시간은 밤 12시 30분이었고 우리 국민 모두가
그랬듯이 감격과 환희와 기쁨은 나에게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동생이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언니 불가능은 없어,단지 어려운 일이 있을 뿐이야,
언니 병도 나을 거야”

나는 그날 두 번이나 눈물을 흘렸다.
이탈리아를 이긴 감격 때문에,
감동적인 문자를 받고.
이 문자메시지는 지금도 가끔 보곤 한다.
월드컵은 나에게 꿈을 이루어 주었다.
다행히도 우리나라의 시합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축구를 중심으로 나의 컨디션을 조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일이 나에게도 왔다.
9월 3일 주치의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무사히 12번을 맞았다고...”
3개월마다 추적 검사를 하자고 하신다.

항암주사를 맞는 동안 매일매일 삶과 죽음을 왔다 갔다 했다.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평화와 불안이 쉴 사이 없이 교차되곤 했다.

병중에서 의지적으로 노력한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일기쓰기이다.
나약한 내 자신을 만나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질병과 대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둘째는 독서이다.
기도생활에 도움을 주고, 삶과 죽음의 의미를 심화시켰다.
죽음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였다.
또 너무 심각해지지 않도록 유우머를 잃지 않게도 하였다.

셋째는 운동이다.
운동은 곧 생명과 직결된다. 매일매일 걸었다.

넷째는 식사이다.
암에 좋다는 민간요법을 찾아헤매지도 않았고
가리지 않고 열심히 먹었다.


그동안 나와 비슷한 시기에 발병했던 코메디언 이주일씨,
그리고 얼마 전 탤렌트 이미경씨의 죽음을 보았다.
현대의 가장 큰 사망원인인 암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다.
이겨냈다고 생각했다가도 또 발병하기 쉬워서
치료를 다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현실임을 안다.

3개월 후면 항암주사를 끝낸 지 2년이 된다.
아직도 한달에 한번 흉부 X-ray를 찍으러
병원에 가려면 불안하고 초조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암은 곧 죽음이라는 사실이 더 큰 고통임을 체험한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

‘우리가 육체를 지녔기 때문에 가지는 불행은,
우리를 천국에다 매달아 놓는다’ 라는 말을 나를 행복하게 했다.

나는 이 질병(암)을 통해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다라고.
내 자신에 대한 실망과 무능을 통하여,
또 잃어버린 건강에 대한 슬픔 속에서 아픔과 고통의
어둠 속에서 하느님을 향해 나 자신을 깨뜨리고 열어놓을 수 있었기에
은총이고 선물일수 있었다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나는 지금의 일상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한다.
수도원에 5시 기상음악이 울릴 때 오늘 하루를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눈을 뜨고,
도서관에서 책들을 만날 때 반갑고 고맙다.
할머니 수녀님들이 저를 만나면
“기적이야~”하시는 소리가 듣기 싫지 않다.
기적은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며 발생하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행복의 기적을 붙잡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암으로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이에게 말하고 싶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마더 데레사의 기도로 나의 체험을 마치고자 한다.

“주님!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당신에게서
고통스런 죽음과 일상의 투쟁을 본받게 하시어
더욱 충만하게, 더욱 창의적으로 살게 하소서.
끊임없이 자신에게 죽고,
이기적인 욕구에서 자유로워질 때에만
진정 살 수 있음을 깨닫게 하소서.
당신과 더불어 죽음으로써
부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후기>
수녀이기 때문에 신앙적으로 흐르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신앙이 나를 견디게 한 가장 큰 힘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암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수녀도 암에 걸리고 고통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조카의 문병을 가기 위해 들른 서울대 병원게시판에서
암중희망이란 공모를 우연히 보았다.
준비할 시간도 촉박했지만 다시 찾은 삶을 정리하고자
부족한 글을 내놓는다.
가늘고 길게 살고픈 나의 바램은 과연 이루어질것인지...^^*
끝으로 함께 고통을 나눈 가족들과 아낌없는 기도를 해준
수도공동체의 자매들과 한치화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수녀님 글을 읽으며 희망은 가장 큰 치료법이이라는 글이 생각납니다.
수기가 길어 망설였지만 지금 어디쯤에서 병과 싸우다
마음이 두렵고 나약해진 교우님들에게는
희망과 용기가 될수있기에 올립니다.
질병과 싸우시는 모든분들에게 수녀님의 투병수기가
따듯한 사랑의 힘이되길 빕니다.>

출처 : 베텔 하늘방
글쓴이 : 수호천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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