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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66세 신랑,15세 신부 - 영조의 결혼식

반찬이 2007. 10. 30. 23:59
66세 신랑,15세 신부 - 영조의 결혼식 역사스페셜

 

66세 신랑, 15세 신부 - 영조의 결혼 


240년 전에 집필 된 ‘가례도감의궤’는 궁궐에서 진행된 66세 왕과 16세 소녀의 결혼식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가례도감의궤’는 왕이나 왕자, 공주의 가례, 즉 결혼을 기록한 것으로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결혼 보고서이다. 우리는 당시 영조의 결혼 장면을 통해 왕가의 결혼식 모습과 혼례의 전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1. 왕과 왕비의 의장행렬

 

‘반차도’에 의하면 결혼식은 참가인원 1188명에 말이 391마리나 된 국가적 축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퍼레이드는 창경궁, 홍화문, 돈화문을 아우르는 방대한 영역에 걸쳐 시행되었다. 66세나 되는 영조는 웃어른이 없어 스스로 결혼식을 처리하는 가운데 15세 소녀를 왕비로 맞았다.


2. 새 왕비를 맞이한 영조

 

왕이 왕비를 맞이하는 이유는 ‘교명문’에 적혀있다. 이에 따르면 첫 왕비가 승하했고 영조 나이 66세에 계비를 맞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영조가 남아있던 후궁 중에서 왕비를 뽑지않은 이유는 숙종때 후궁인 장희빈이 왕비를 모함해 왕비자리에 오른 폐해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3. 왕비의 자격요건

 

우선 새 왕비를 뽑기 위해 전국에 금혼령이 내려진다. 이후 후보자들은 왕실에 참가신청서를 내는데 그것을 단자라 하였다. 단자에는 규수의 제반 사항이 자세히 적혀있다. 왕비 후보자는 그 중에서도 특히 가문이 중요한 요건이었다.


4. 간택의 기준

 

왕실의 웃어른에 의해 이루어지는 간택의 경우 삼간택이 필수였다. 모두 가문이 명문인 바에야 간택의 결정적인 요소는 아름다움, 자태, 언행, 교양 이었다. 당시에도 아름다움은 필수적이어서 인상이 견실하고 건강해 보이는 미인이 선호되었다. 통상적으로 조선시대 미인으로 알고있는 풍속화의 둥글둥글하고 귀여운 얼굴의 미인은 서민형이다. 권력층에서는 이를 천한 얼굴로 여겼다.


5. 영조가 간택을 한 이유

 

최후로 올라간 후보 3인은 가문이 명문이지만 부모의 지위가 높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영조가 삼간택을 거치면서 정순왕후를 직접 고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선택에는 신분 콤플렉스와 당파싸움의 폐해를 뼈저리게 경험한 배경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영조는 충청도 지역의 학통을 잇는 집안의 정순왕후를 선택했다.


6. 정순왕후는 어떻게 살았나


영조의 치밀한 정치적인 계산 속에서 왕비로 선택된 경주 김씨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 그녀는 간택 되자마자 원삼에 족두리 차림으로 별궁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부터 그녀의 인생은 180도로 달라져 왕비로서의 생을 살게된다. 하지만 그 삶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아들인 사도세자나 며느리 혜경궁 홍씨도 그녀보다 10살이나 많았고, 사이 또한 좋지 않았다. 영조는 결혼 16년만에 승하했고 홀로 남은 정순왕후는 권력에 집착했다. 나이 어린 순조 대신 수렴청정을 하게 된 정순왕후는 이후 죽을 때까지 고집스러운 섭정을 계속했다.


7. 영조의 결혼 비용

 

\'가례도감의궤\'에는 결혼식에 사용된 소품목록도 상세하게 적혀있다. 영조는 국가 재정에 매우 밝아 국혼정례를 만들어 혼례 비용을 줄이도록 한 임금이었다. 그런 까닭에 영조의 결혼에는 다른 임금들의 결혼과는 다른 특징이 있었다. 수리소가 그것이다. 이전의 왕들이 물품을 새로 만들어 사용했다면 영조는 옛 것을 고쳐서 사용한 것이다. 외화가 부족했던 당시 영조는 스스로 검약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통치철학을 실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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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세의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 by 신병주(효형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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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민족의 피에는 철저한 기록정신이 흐른다."


  왜 중국인과 유대인이 강한가?  그것은 그들에게는 민족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중국인은 수 천개의 고사가 있다. 이 고사는 삶의 여러 상황에서 접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 보통사람들은 문제마다 심사숙고할 수 없다. 대개의 결정은 이런 뇌리 속에 남아있는 이야기를 통해서 결정을 내린다. 중국인은 이런 이야기를 통한 지혜로운 결정시스템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이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는 구약성경과 탈무드를 통한 공유된 이야기가 있다. 이런 민족의 이야기가 그들을 위기 때마다 지혜로운 결정을 내리도록 이끌어 준다. 우리 민족은 공유된 이야기를 잃어 버렸다. 사실은 엄청난 유산의 많은 역사 이야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흥미위주의 분쟁사만 전수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역사 속의 교훈과 영광을 되살리는 것이 민족을 살리는 첩경이 될 것이다.

  우리 민족은 철저하게 기록하던 민족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일성록과 같이 연대별로 꼼꼼하게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묘사한 기록들이 즐비하다. 또한 의궤와 같이 국가의 주요 의식을 그림으로 표시한 방대한 자료를 남긴 민족이기도 하다. 이런 기록을 중요시 하였기에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방대한 실록을 기록하였고, 태백산, 오대산, 정족산, 적상산 등의 4대 사고를 설치하고 유지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흐릿한 잉크가 명확한 기억보다 더 오래간다"라는 말이 있다. 민족의 이런 기록정신이 계승, 유지 된다면, 축적된 지혜로 말미암아 타 민족이 도저히 넘볼 수 없는 21세기의 혁신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기록하는 자는 승리하고, 기록하지 않는 자는 낙오된다.  이 책은 의궤라는 형식으로 영조와 정순왕후의 결혼식을 그림으로 묘사한 반차도를 분석한 책이다. 반차도란 지금의 사진이나 비디오와 같이 당시의 결혼식 행사를 그림으로 묘사한 것이다. 수천 권의 책으로도 다 묘사할 수 없는 정확하고,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다. 이 책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보는 듯한 생생하고, 정확한 역사에 대한 해석을 보여준다.

  주인공인 영조는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래 살고, 가장 오래 재위했던 왕이다. 그는 무수리 출신의 천한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태생적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러나 영조에게는 이런 아픔들이 오히려 사명을 이루는데 힘이 되기도 하였다. 노론과 소론의 갈등 속에서 왕위에 올랐기에 당쟁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탕평책을 통해서 당색에 관계없이 고른 등용을 하였다. 또한 균역법의 실시로 백성들의 가장 큰 짐인 군역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아픈 과거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정책이었다.  영조는 일찍이 도시계획에도 눈을 떠 청계천 준설 공사를 시행하였다. 최근 청계천 복개를 원상복구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청계천의 준설이 영조 때에 있었다는 점은 잊고 있는 듯하다. 이 공사는 당시에는 엄청난 규모의 공사였다. 1930년대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을 연상케 하는 대규모 토목공사였다. 이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해서 조선 후기 당시의  경제난과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귀중한 정책이기도 했다. 영조는 조선의 루즈벨트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인 혜안도 가지고 있는 왕이었다.
  영조는 83세에 사망했는데, 조선 역대 왕의 평균 수명은 47.1세였다. 영조가 장수한 이유는 그의 서민적인 생활방식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그는 검소한 모습으로 친히 움직임이 있는 운동하는 왕이었다.  태조 이성계나 광해군과 같이 젊은 시절 전쟁터를 누볐던 왕이 비교적 장수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운동하면 살고, 운동 안하면 일찍 죽는다.

  정성왕후가 죽자 영조는 66세의 나이에 새로 15세의 정순왕후를 맞는다.  이 정순왕후는 똑똑한 조선 여성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정조가 죽은 후 세도정치의 정점에 이 15세의 왕후로 즉위한 정순왕후가 등장한다. 이런 강하고 똑똑한 여성에 대한 더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왕비를 간택하면서 영조가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 다른 후보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하였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라고 말했다. 왜? 물건의 깊이는 측량할 수 있으나, 인심의 깊이는 잴 수 없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또 궁궐의 행랑의 수는 얼마나 되냐고 물었다. 후보들은 서로 손가락을 가리키며 세기에 바빴다. 정순왕후는 고개한번 돌리지 않고, 숫자를 말했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처마 밑에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면 행랑의 수를 알 수 있다"고 대답했다.  조선의 왕비는 단순히 미모만 갖춘 자가 아니라 이런 엄청난 지혜를 가진 여성이 뽑혔다는 것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화려하고, 깊이 있는 역사가 있다.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고, 공유하는 것이 민족의 부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 잊지말고, 젊은이 일수록 역사서를 손에서 놓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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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례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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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은 혼례를 치르기 위해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왕의 혼례가 결정되면 가례도감이라는 임시관청이 설치되고 전국에 금혼령이 내린다.

가례도감은 왕의 혼례를 주관하는 관청이고 금혼령은 왕의 배우자가 될만한 연령에 있는 처녀들의 혼인을 금지하는 법령이다.

* 금혼령과 함께 처녀를 둔 가문에서는 조정에 보고한다. - 처녀 단자
처녀단자(처녀의 사주, 거주지, 부.조.증조.외조의 이력을 기록하여 가문의 이력을 알수 있게 했다.)

*처녀단자를 기초로 한 3차 선발 -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 이라 한다. (사실 이것은 형식에 그치고 왕비감은 미리 정해 놓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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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식 혼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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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혼. 납채. 납폐, 친영. 부현구고. 묘현의 여섯가지 절차로 이루어진다.

*의혼 - 사가의 중매를 넣어 혼인을 의논하는 것이다. 간택 과정이라 보면 된다.
*납채 - 약혼식이라 보면 된다.
*납폐 - 폐백을 받는 것이라 보면 된다.
*친영 -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색시를 데리고 오는 것이다. 왕은 직접 친영을 행할 수 없으므로 대신 사자를  보낸다.
            친영은 초저녁에 행한다. 따라서 신랑이 신부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혼례를 치르는 시각은 밤이 된다.
*혼례 - 본래 밤에 행하는 의식이라는 의미이다. 또 밤에 예를 치러야 바로 초야를 치를 수 있다.
*부현구고 - 첫남밤을 치른 신부가 시부모를 뵙는 의식이다.
*묘현 - 시집온 신부가 사흘 만에 사당의 조상님들을 뵙는 의식이다. 왕비의 경우는 당연히 종묘에서 예를 치러야 한다.

 

            왕비는 이외에 중국 황제의 고명장을 받는 절차가 또 있다.

왕비를 배출한 가문은 당대의 명문거족이다. 또 왕비를 배출함으로써 명문거족으로 발돋움한다.

왕은 왕비외에도 후궁이라는 배우자들이 있다. 이 후궁들은 내명부의 직첩을 받고 왕을 모시는 여인들이다. 조선 500여 년동안 100여 명이상의 후궁들이 내명부의 직첩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지만 실제는 더 많을 것이다.

조선초기는 후궁도 왕비와 마찬가지로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간택 선발 되었으나 후기에 후궁 간택은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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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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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가 죽자
정순왕후는 열다섯의 어린나이로 왕비에 책봉이 되죠.
당시 영조는 예순여섯의 노인이었습니다.

아들뻘되는 사도세자보다 나이가 훨씬 더 어렸으니
세자내외와는 관계가 불편했던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게다가 경주김씨 정순왕후의 친정은
사도세자에 적대적인 노론벽파 집안이다 보니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죽이는 과정에 큰 역할을 합니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의 아들이 보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보위에 오르는데
정순왕후는 정조의 왕권에 심각한 위협이되는 정치적 정적이였죠.
정조는 의문사를 당하게되는데 정순왕후가 독살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죠.

 

정조가 죽자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의 소생으로 순조가 즉위하게 되는데
이때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합니다.
권력의 최정점에 서게 된 것이죠.
그녀는 반대당파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숙청을 하고
또한 천주교도들을 잔인하게 탄압하면서
권력을 굳건히 다져나갔습니다.
그러나 정순왕후가 죽자 그녀의 친정인 경주김씨 일문은
안동김씨집안의 견제를 받아 곧 멸문지화를 당합니다.

이후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 안동김씨 집안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죠.
안동김씨 일문은 60년동안 세도정치를 하며
조선이 망쪼가 드는게 기여(?)를 했죠.

정순왕후는 우리에겐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정치권력에 대한 야심이 컸던 여인이었습니다.
사도세자와 정조의 죽음에 까지 깊숙히 개입되었던
그녀의 행적으로 봐서 권력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했나 알 수 있죠.
그러나 결국 부질없는 권력욕 탓에
그녀 사후에 친정가문이 멸문을 당하는 몰락의 길을 걸었으니
덧없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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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세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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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웅장한 혼례식 240년만에 다시본다


1759년 초여름, 창경궁. 66세의 신랑 영조와 15세의 신부 정순왕후 김씨가 혼례를 올렸다. 1757년 왕비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새로운 왕비를 맞아들이는 것이었다. 당시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와 그 부인 혜경궁홍씨보다 열 살이나 아래였던 신부. 이 나이 어린 신부는 훗날 사도세자의 죽음에 빌미를 제공하고, 순조 대에 수렴첨정을 하면서 정국의 태풍으로 등장했던 바로 그 여인이다.

참 궁금하다. 조선시대 왕실의 결혼식은 과연 어떠했을까? 왕비는 어떻게 뽑았고 혼수품으론 무엇이 오갔을까?

 

이 책은 그 혼례 속으로 독자들을 초대, 조선시대 왕실의 결혼식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준다. 이 책은 ‘영조정순후 가례도감의궤’(당시 혼인에 관한 기록과 그림)를 비롯해 각종 관련 사료들을 통해 당시 왕실 혼례의 전모를 알기 쉽고 흥미롭게 복원해냈다. 저자는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왕실 혼례 과정을 살펴보면, 왕비 간택을 거쳐 6례(六禮·여섯차례의 절차) 순으로 진행된다. 왕비의 간택 심사는 3차에 걸쳐 진행된다.

 

정순왕후 간택시의 일화 하나. 영조가 왕비 후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다른 후보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 했지만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했다. 지혜로움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정순왕후는 왕비로 뽑힌 후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해 잠시 돌아서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고 추상같이 말했다고 한다. 열 다섯 어린 나이에 왕비의 체통까지 생각할 만큼 만만치 않았던 여인.

 

그러나 간택이 되는 순간, 더 이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곧바로 별궁에 가서 혹독한 왕비 수업을 받아야 했으니, 어찌 보면 고행의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정순왕후의 경우, 6월9일에 왕비로 간택이 되고 6월22일 혼례를 올렸으니, 불과 13일만에 교양학문과 예절 등 그 복잡하고 엄격한왕실법도를 익혀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간택에 참가한 처녀들은 같은 조건에서 후보를 고른다는 취지에서 모두똑같은 복장을 했다. 그러나 1차, 2차, 3차 간택으로 가면서 후보들의 옷은 점점 더 화려해져 왕비 복장에 가까워졌다. 마지막 3차 간택에서 아깝게 탈락한 후보들은 거의 모두 왕의 후궁이 되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도 가득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가례도감의궤의 가치를 절로 알 수 있다. 특히 왕의 친영(親迎·국왕이 별궁에 있는 왕비를 맞이하러 가는 절차)행렬 그림은 그 성대함과 정교함으로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1.5㎞에 이르는 실제 행렬을 묘사한 그림으로 왕과 왕비의 가마를 비롯해 말 탄 관료와 호위병, 악공, 내시, 궁녀, 각종 의장을 들고 가는 사람들 1188명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등장 인물도 때로는 뒷모습으로, 때로는 옆모습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그려져 생동감을 더해준다.

 

이와 함께 의궤에는 담당자들의 업무 분담과 협조, 경호계획, 행사에 필요한 물품, 사람들에게 지급된 급료 등이 매우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18세기 왕실의 혼례 문화 보고서라 하기에 충분한 이 책. 왕실 혼례의 다양한 모습을 만나는 일이 색다른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아울러 당시 왕실의 혼례 문화를 통해 18세기 영조대의 정치상황까지 엿볼 수 있다. 또한 ‘사고(史庫)는 왜 산으로 갔을까’ ‘조선시대엔 몇끼를 먹었을까’ 같은 역사 상식이 들어 있어 책의 매력을 더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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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 김씨

 

1801년 1월 10일 용상 아래에는 모든 문무백관들이 머리를

정순 조아리고 있었고, 용상에는 솜털도 가시지 않은 보송보송한 얼굴의 11살 난 순조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긴장된 분위기를 깨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수렴 뒤에서 터져 나왔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꼴이 되는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른바 사학(천주교)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이적과 금수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는데,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어그려져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 들어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령은 각기 그 지경 안에서 오가작통법을 닦아 밝히고, 그 통내에서 만일 사학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통수가 관가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의벌을 시행하여 진멸함으로써 유종이 없도록 하라..."

 

목소리의 주인공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였다. 김씨는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수렴청정을 시작해, 정국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사학을 엄금한다는 명령을 내리는 중이었다. 이는 마치 조선의 신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순왕후 김씨와 뜻을 같이 하는 노론 벽파가 반대당인 남인들과 일부 노론 시파를 탄압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개혁군주 정조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남인들은 하나의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일부 남인들은 새로운 학문이자 종교였던 서학, 즉 천주교를 받아들였는데 이를 신서파라 한다. 그리고 정조 사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에 나서면서 김씨와 손잡고 사학을 뿌리뽑는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공격했던 노론 벽파 중심의 정치 세력을 공서파라 부른다. 정순왕후는 왕권과 다름없는 정치력을 행사하였다. 국왕과 똑같은 권위에 똑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해, 본인 스스로도 여주.여군임을 자처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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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을 둘러싼 외척간의 싸움 - 김씨 가문 대 홍씨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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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정실 왕비 두 명과 후궁 넷을 두었다. 첫 왕비는 정성왕후 달성 서씨이며, 서씨가 죽은 후 들어온 두 번째 왕후가 정순왕후 경주 김씨다.

 

정성왕후 서씨는 1692년 12월 7일 아버지 서종제와 어머니 우봉 이씨와의 사이에 오늘날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있던 사저에서 태어났다. 열세살이 되던 1704년 서씨는 연잉군 금(영조)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에 봉해졌는데, 그때 영조의 나이 열한살이었다. 서씨의 아버지 서석제는 조선 초기 뛰어난 학자인 서거정의 자손으로 사위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서씨는 혼인한 후 왕위에 뜻이 있던 영조와 동고동락한 사실상의 동지였다. 경종 시절 서씨의 조카 서덕수가 노론인 연잉군을 국왕으로 추대했음을 전하고 또 이 때문에 사형당하기도 했을 정도로, 서씨의 친정은 영조를 즉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영조는 드디어 경종 4년 소론의 반발을 무릅쓰고 왕위에 오르는 데 성공하지만, 불행히도 정성왕후 서씨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영조는 결국 세 명의 후궁들에게서 2남 7녀를 낳았느데 제1후궁인 정빈 이씨가 효장세자와 두 명의 옹주를, 제2후궁인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와 화평옹주, 화순옹주를, 제3후궁인 귀인 조씨가 화유공주를, 마지막 후궁인 숙의 문씨가 화령옹주와 화길옹주 등을 낳았다.

 

일곱 명의 딸 중 맏딸은 유아기 때 사망했고, 둘째 딸 화순옹주는 남편 월성위가 죽자 그 뒤를 따라 굶어 죽었다. 다섯째 딸 화협용주도 일찍 세상을 떠났고, 첫아들인 효장세자도 영조가 즉위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열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 다음 왕세자로 책봉된 왕자가 둘째 아들 사도세자였다.

 

서씨는 후궁들의 몸에서 난 소생들을 자기 자식처럼 애지중지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사도세자에게는 특별한 관심을 쏟으며 돌보았다 그러기에 만일 서씨가 계속 살아 있었다면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일은 면했을 지도 모른다. 1725년 2월 15일 서씨는 예순여섯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오늘날 경기도 고양읍 신도읍 용두리에 있는 서오릉의 홍릉에 홀로 안장되어 있다.

 

정순왕후 김씨는 1745년 11월 10일 여주 고을에서 태어나 열다섯살이 되던 1759년 6월에 영조와 혼인하여 왕비로 책봉되었다. 이때 영조의 나이 예순여섯이었다. 임금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처녀만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는 법이라, 열다섯 꽃다운 처녀가 노인에게 시집을 오게 된 것이다.

 

김씨가 영조에게 시집왔을 때 조정은 소론에 동정적인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다 이에 잔뜩 긴장한 노론측은 영조의 계비로 들어온 정순왕후 김씨를 중심으로 사도세자 폐위 작전에 들어가, 풍산 홍씨 가문과 함께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서 아사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사도세자가 죽은 후 홍봉한이 영조의 신임을 얻어 중책을 받자 이제는 정순왕후 김씨 집안에서 긴장하였다. 풍산 홍씨 집안과 경주 김씨 집안은 사도세자를 제거할 때는 같은 노론의 입장에서 함께 일을 추진했으나, 막상 이권 다툼이 발생하자 정적으로 바꿔었다.

 

정순왕후 김씨와 그의 동생 김귀주는 세손 정조가 즉위하면 김씨 집안이 몰락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양자를 들여 김씨 집안의 정권을 강화하고 홍봉한을 정계에서 실각시켜려 하였다 그리하여 김귀주는 1790년 한유를 사주해 "홍봉한이 세손 정조를 제거하고 대신 은언군 인을 추대하려 한다"는 상소를 올리게 하였다 이 사건에 연루된 홍봉한은 청주로 귀양갔고, 그후 홍봉한을 회유하려던 세손이 영조에게 이를 모함이라고 아뢰어 귀양에서 풀려났던 일도 있었다

 

 

숨죽이며 때를 기다리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정후겸, 홍인한, 숙의 문씨, 문씨의 동생 문성국 등 사건의 관련자들을 문초하여 귀양 보낸 후,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을 제외하고 모두 사사시켰다 정순왕후 김씨의 동생 김귀주도 예외없이 귀양에 처해졌다. 정순왕후는 비록 대비였으나 정조가 이미 성인이었으므로 대리청정할 수도 없어 혜경궁 홍씨처럼 단식 등의 방법으로 항의할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지켜준 홍국영을 도승지 겸 금위대장에 임명하여 개혁 정치를 전개해나갔다 그리고 당색에 물들지 않은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문신을 양성하는 규장각과 무신을 양성하는 장용영을 설치했다. 정조는 이 두 기관을 이용하여 왕권 강화를 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정권에서 소외당한 영남 남인들을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끌어들였다.

 

그런데 정조에게는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정비인 효의왕후 김씨에게서 후사를 보지 못한 것이었다 1753년 12월 13일 서울 가회방에서 태어난 김씨는 열살 때인 1762년 세자빈으로 간택되었고, 아버지 김시묵은 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 청풍부원군의 후손이며, 어머니는 좌찬성 홍상언의 딸이다.

 

영조는 현종대에 김씨 집안에서 왕통을 이어준 연유로 김씨를 간택했다고 한다. 영조는 손부 김씨를 맞아들이고 다음과 같은 글을 친히 써서 하사하기도 했다.

 

"오세(대) 후에 옛날을 이으니 이제야 종사가 튼튼해지는구려"

손부에 대한 영조의 기대는 자못 컸다. 그러나 김씨는 정조와 금슬은 좋았지만 몇 년이 가도 태기가 없었다. 14년이 넘도록 정조가 후사를 보지 못하자 조정과 왕실에서는 후궁을들일 것을 요구하였다, 영조의 3년상이 끝나고 부묘도 끝난 1788년 5월, 대왕대비 김씨는 후궁을 들이라는 한글교지를 내린 것이다. 이때 정무를 도맡아 처리하던 홍국영이 누이 홍씨를 왕실에 넣었으니, 바로 원빈 홍씨였다. 그러나 홍씨는 1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다음으로 들어온 후궁이 판관 윤창윤의 딸 화빈 윤씨였다. 정조는 아들을 보기 위해 화빈 윤씨의 처소를 자주 드나들었으나 역시 아무 소식도 없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정조는 공교롭게도 윤씨의 시중을 드는 나인에게 마음이끌렸다. 곧 창녕 성씨였다.

 

정조 6년(1782년) 9월 7일 드디어 성씨의 몸에서 왕자가 탄생했다 정조는 이를 기념하는 별시를 실시하기도 했는데, 이때 무과에 2천 6백명이나 합격시켰다고 한다. 그 정도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왕자였다. 그리하여 성씨에게는 소용의 내명부 직첩을 내려주고 얼마 후 의빈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세 살 때 세자로 책봉된 문효세자는 다섯 살 때 요절하고 말았다. 아들을 잃은 성씨는 상심한 탓에 몸져 누웠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후사가 없는 왕실의 분위기는 더욱 침울해졌고, 또다시 후사를 위해 주부 박준원의 딸 박씨를 후궁으로 맞아 수빈으로 봉했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니 왕비 김씨는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시조부 영조가 친히 글까지 써서 하사하였는데 아들은커녕 딸조차 낳지 못하는 자신이 죄인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날 김씨는 헛구역질을 하는 등 임신한 것 같은 생리현상들이 나타났다. 왕실에서는 경사가 났다고 하여 떠들썩하였고, 배가 점점 불러오자 조정에서는 산실청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열 달이 지나도 아기가 나오기는커녕 출산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한 해가 지났건만 그대로였다. 아기를 낳아야겠다는 일념이 너무 과하여 상상임신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해프닝이 벌어진 지 얼마 후 수빈 박씨가 왕자를 낳았다. 이 왕자가 정조의 뒤를 잇는 순조다. 정조는 뒤를 이을 후사를 보자 온 천하를 다 얻은 기분이었다. 이에 국정에만 전념하면 되었다. 집권 여당인 노론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영남 남인과도 손을 잡았고, 규장각을 통해 신선한 인재들도 속속 배출되었다. 그 인재들은 사대관에서 벗어나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부국강병할 수 있다는 사상을 가진 실학자들이었다.

 

이제 조정 안팎은 서서히 당론에서 벗어나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치가 채 정착되기도 전에 정조는 순조를 왕세자로, 노론 시파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책봉한 해에 그만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정조의 죽음과 함께 새로운 사상을 펼치려던 실학자들의 이상도 한풀 꺾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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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탄압과 정권 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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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죽이고 기다리던 정순왕후 김씨에게 때가 왔다. 열한살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조정 대신들이 왕실이 최고 어른인 김씨에게 수렴청정을 청한 것이다. 김씨는 이 요청을 일곱 번이나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김씨는 마지못한 듯 허락하고 희정당에서 수렴청정의 예를 거행하였다. 이전에는 수렴청정 의식만 있었을 뿐이었는데, 이때부터 송나라 선인 태후와 정희왕후 윤씨의 고사를 토대로 절목을 갖추기까지 했다. 이 절목을 보면 임금과 똑같이 경연에 참여할 수 있으며, 청대, 그리고 진상 물건도 임금의 예와 똑같이 시행한다고 되어 있다. 수렴청정은 임금의 직접 통치와 다를 바 없었다.

 

최고의 권력을 가진 김씨는 자파 세력인 노론 벽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그리고 노론 벽파는 정조 재위 기간 동안 개혁의지를 함께 하며 등요된 시파, 신서파, 남인 세력들을 제거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첫 신호탄이 천주교 탄압이었다. 당시 남인들은 오랫동안 정권에서 소외당하면서 천주교, 즉 서학을 수용했기에 이를 이용하여 정계에서 제거하려 한 것이다.

 

천주교가 처음 소개된 것은 선조 집권기였으나 숙종 때 갑술환국 이후 출사의 길이 막힌 남인들이 서학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국가와 사회 조직의 개혁, 개조를 요구하며 성리학을 지배 질서로 하는 현실에 비판을 가하고 혁신을 부르짖게 되었다. 이러한 혁신 사싱에 양반 계층이 아니 다른 소외 계층도 호응하게 되어 그 세력은 점차 확대되어갔다.

 

초기에 새로운 학문으로 받아들여진 천주교는 점차 신앙 운동으로 바뀌게 되어, 정조 7년(1783) 중국에 사신일행으로 간 이승훈이 북경 천주교회다에서 최초의 영세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서울 남부 명례동에 최초의 천주교회가 설립되었다.

 

천주교는 그러나 정조 12년 효 사상과 군신 관계를 어지렵히고, 나라 전체의 기강을 무너뜨릴 수 있으므로 엄금해야 한다는 이경명의 상소를 계기로 사학으로 규정받게 되었다. 그후 조정 대신들의 입장은 천주교에 대해 우호적인 신서파와 철저하게 반대하는 공서파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정조가 천주교를 박해하지는 않고 탄력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교세는 비교적 확대될 수 있었다. 그라하여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입국하여 활동할 무렵에는 전구의 신도 수가 4천여 명을 헤아릴 정도로 성장했으며, 정조 말녀(180년)에는 1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처럼 교세가 나날이 확대되어가던 천주교는 정순왕후 김씨를 권력을 장악하면서 박해받기 시작했다. 1801년 1월 김씨는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여 천주교를 엄금, 근절하라는 강경한 명령을 내렸다. 오가작통법은 민가 다섯 집을 한통으로 편성하고, 그 중에서 통수를 뽑아 사학하는무리를 고발하도록 한 것이다. 다섯 집 중 한 집이라도 천주교를 믿으면 모두 연대 처벌하겠다는 강력한 법이었다.

정순왕후 김씨의 하교로 시작된 천주교 탄압에 벽파의 영의정 심환지와 공서파 대사간 목만중이 앞장섰다. 그리하여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인 이가환, 권철신 등이 고문받던 도중 옥사했으며, 이승훈,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홍낙만, 최창현 등과 중국 신부 주문모도 참형당했다. 뿐만 아니라 주문모에게 세례받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인과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등도 사사되었으며, 정약종 형제는 유배당했다.

 

이 사건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인해 더욱 확대되었다.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은 주문모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그는 박해가 시작되자 충청도 제천군 봉양면에 배론이라는 토기를 만드는 천주교도의 마을에 숨어 지내면서 황심과 함께 이 일을 중국에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보경주교에게 전달하려 한 이 백서는 중국에 도착하기 전에 발각되었고, 이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1년 동안 학살당한 교인 수가 300명에 달 할 정도였다. 물론 여기에는 노론 벽파를 비난하던 세력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순와후 김씨는 이렇게 천주교도를 박해함으로써 에 조정을 노론 벽파로 채울 수 있었다.

 

그런데 순조가 즉위한 후 각처에서 대형 화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순조 3녀에 평야부와 함흥부에서 큰 불이 나더니 그해 12월에는 창덕궁 선정전도 크게 불탔다. 또 그 닷새 후에는 장안의 종루 거리에서 다시 큰 불이 솟아 인심이 흉흉해 지기까지 했다. 정순왕후 김씨는 이 모든 일이 자신의 탓으로 돌아올 것 같아 미리 선수르 쳐 28일 수렴청정을 거둔다는 하교를 내렸다.

김씨는 내심 조정대신들이 그 명을 철회하고 간청하기를 원했다. 즉 조정 안팎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이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조정대신들에게 검증받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덧 조정에서는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조순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순왕후 김씨의 바람은 김조순의 물밑작전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섭정을 거두고 난 지 1녀 후인 1805년 1월 12일 정순왕후 김씨는, 노론 벽파 중심의 조정을 세우고 예순한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오늘날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의 원릉에 영조와 함께 합장되었다.

 

열다서 살의 어린 나이로 환갑이 훨씬 넘은 노인에게 시집간 김씨는 친정 집안을 위해 정계의 전면에 나서서 권력을 휘둘렀다. 영조가 살아 있을 때는 아버지 김한구의 당파와 뜻을 같이 하여 자신보다 열살이나 연상인 사도세자르 죽음으로 몰아가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으며, 순조가 즉위한 후에는 친정 집안의 당파인 노론벽파르 위해 300며에 이르는 천주교도로 학살하였다. 김씨의 전횡은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이며 개혁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던 조선의 역사를 퇴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조선의 정치가 당파 중심에서 외척 중심으로 나아가는 데 발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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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 일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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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정순왕후 집안은 몰락하여 광장히 가난했는데 어머니가 출산을
위해 처가로 향했으나 처가에 도착하기 전 인적이 없는 길가에서
정순왕후를 낳습니다. 여벌의 옷도없고 가진것도 없었으며
추운 겨울에 들판에서 애를 낳았으니 거의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주변을 지나던 관리 한사람의 도움으로
살게 됨니다.

 

2.정순왕후가 영조의 비로 간택될 당시 정순왕후는 15살 이었는데
당시 며느리인 혜경궁홍씨와 아들 사도세다가 25살 이었으니
며느리 보다도 10살이나 적었습니다.
암튼 중전 간택시의 일화가 유명한 아버지 이름위에 앉을 수
없다고 한 일화입니다.


당시 간택 시 방석위에 누구의 따님인지 몰라 아버지의 이름을
방석위에 써 놓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 방석위에 앉았으나
정순왕후는 아버지 이름위에 앉을 수 없다 하여 서있었답니다.
간택 시 다른 일화도 있으나 생략...

 

3.왕후가 된후 장복을 지으려고 상궁들이 옷감을 대 보면서
옷감 위를 재보기 위해 정순왕후에게 뒤돌아 앉아 달라고
했답니다. 이에 정순왕후가 상궁이 뒤로 돌아가서 재라고
했답니다.

 

4.정순왕후가 수렴청정 시 되도록이면 가까운 사람을 쓰려고
일가인 김노갑에게 총계사를 제수하자 신하 정일환이
"공론도 아니며 순조의 뜻도 아니니 부당하다"고 하자
정순왕후는 흔쾌히 받아들였답니다.

출처 : 음악이 있는곳
글쓴이 : 경강 moigo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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