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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삶의 영원한 물음표? 고통과 용서

반찬이 2012. 5. 17. 15:59

삶의 영원한 물음표?  고통과 용서

 

영화묵상:  "밀양" (Secret Sunshine)
주연: 전도연, 송강호   감독: 이창동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시편 61편 2절]

 

 여주인공 신애로 분한 전도연의 창자로부터 토해져 나오는 울음과 절규가 아직도 귓전을 맴돈다.  고통의 밑바닥.   아니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깊디깊은 고통의 심연.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소위 무저갱이다.  바닥을 알 수 없는, 터널의 끝이 영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서슬 푸른 고통의 장(場)이다.

 

 고통은 샅샅이 핥아야만 끝난다.  적당히 도피하고, 슬쩍 가장하고, 피상적인 위안에 머물고,  은밀히 망각 속으로 밀어 넣으려 한다고 해서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거짓이고 위선이며, 또한 고통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고통은 깡그리 속속들이 괴로움을 당해야만 비로소 물러간다.  그러기 때문에 고통인 것이다.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것들은 고통의 모양은 가졌어도 진짜 고통은 아니리라.


 영화 밀양에서 여주인공 신애가 당하는 괴로움은 바로 이런 참담한 무저갱의 고통이다.  자기를 배신한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은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삶의 의미였던 어린 아들 준이 유괴되어 살해되는 비극을 만난다.  아들을 잃는 상황 속에서, 그녀는 철두철미 혼자였다.  혼자서 전화기로 아들의 목숨을 담보로, 돈을 요구하는 알 수 없는 목소리의 위협 속에서 그녀는 혼자였다.  고통 가운데 놓여 울부짖는 젊은 엄마의 고독이 폐부에 밀려듬을 느낄 수 있도록 카메라는, 아무도 없는 집에 울다 지쳐 소파 위에 쭈그려 잠든 여주인공의 모습을 클로즈업한다.  고통은 홀로 당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그 고통을 나눌 수 없다.  단지 곁에서 지켜볼 수 있을 뿐....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은 언제나 고통 당하는 바로 그 한 사람의 몫이다.

 

 

위선의 베일을 벗기는 고통

 

 고통은 나를 정화시킨다.  내가 몰랐었던 나의 위선의 베일을 한 까풀 씩 한 까풀 씩 벗겨 내린다.  그리하여, 나를 적나라하게 신 앞에 서게 한다.  고통의 의미가 있다면, 바로 나로 하여금 신 앞에 솔직한 존재가 되어 서게 하는데 있으리라.  내가 미처 몰랐던 나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나의 퍼소나(persona)를 젖혀 버리고, 부끄러운 나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거짓의 나가 아닌 참 나를 살게 하는데 있다.  어떤 수단으로든 고통을 도피하는 사람들에겐 이렇듯 신 앞에 솔직히 설 수 있는 축복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기에 잘 견디어 낸 고통은 숭고하고 아름답다.

 

 영화 속의 신애는, 자기 스스로도 별로 인식하지 못하는 베일처럼 아스라하게 덮인 위선을 산다.  아마, 이런 것이 나를 포함한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내용이리라.  배신했던 남편이 죽자, 그녀는 모든 것을 청산하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온다.  "왜 밀양에서 사시려고?" 사람들이 물으면, 그녀는 정답인 듯 답한다.  "죽은 남편의 고향이 밀양이거든요.  남편이 늘 여기서 살기를 원했었죠."  그녀는 아마도 타인들에게 그녀와 죽은 남편의 사이가 너무도 좋았었고, 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이토록 지극하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녀는 결코 남편이 그녀를 배신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죽은 남편에 대해 품었을 그녀의 증오와 슬픔을 남편의 고향에서 살기를 작정할 정도로 애정깊은 미망인의 모습으로 잘 포장함으로써,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남편을 잃은 그녀의 고통으로부터 도피해버린다. 그리고 그녀 스스로, 그녀가 반복하는 그 정답을 자신의 실제 모습인양 믿어버린다.  밀양에선 그 누구도 그녀와 남편의 일을 모르기에, 사실은 과거로부터 도망치듯 이곳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부인해 버린다.


 

 

 신애에게 다정한 관심을 가지고, 그녀를 돕고자 하는 카 센터 주인인 종찬(송강호 분)이 거짓 상장을 만들어 신애가 개업한 피아노 학원 벽에 달아준다.  신애가 이의를 제기하자, "이런 것을 달아 놓아야, 학생들이 모이거든요."  아무렇지도 않게 그는 상장이 담긴 액자를 걸어준다.  우리는 다음 장면에서 종찬의 속물근성을 나무라던 신애가 그 상장을 떼지 않고 그대로 걸어둔 체 피아노 학원을 경영하는 모습을 만난다.  종찬이 속과 겉이 같은 모습의 "속물"이라면, 신애는 자신의 속물근성을 고상함으로 감추고 있음을 본다.  적어도 위선의 삶을 살지 않는 종찬의 솔직한 모습이, 신애의 모습보다 더 돋보이는 장면이다.


 남들에게 불행한 여인으로 보이기 싫어서인가?  씩씩한 척, 은근히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포장한다.  그리고 이런 그녀의 행동이 그녀를 예기치 못했던 나락으로 추락시킨다.  


 아들을 잃은 신애의 고통은 그녀의 위선의 껍데기를 잔혹하게 벗겨버린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녀의 의식 세계는 물론이고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었던 그림자(Shadow: 칼 융이 말했던 인간이 간직한 어둠의 영역)가 고통 속에서 통제를 잃은 상태로 그대로 드러난다.  감출 길이 없다.

 

 

인간의 용서?  그것은 환상이다.

 

"그래요.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보다는 이미 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어요.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지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걸 빼앗아 가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그를 다시 용서합니까?"
  -'밀양'의 원작소설, '벌레 이야기'에서/이청준

 

 

 어찌 신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막상 용서하리라 결심하고, 모질게 마음먹고, 교도소로 아들을 죽인 범인을 찾아갔는데....  머리를 땅에 찧으며, 망가져 있는 그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의 위치에서 용서를 선포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나의 도덕적인 우위, 신앙적인 우위를 그에게 보여주며 내가 당한 고통을 조금이나마 보상받고 싶었는데... 도대체 이게 웬 말이란 말인가?  그는 너무도 여유자적하고, 전혀 망가지고 괴로워한 흔적은 없이 평안한 모습으로 신애를 대하는 것이 아닌가?  "용서해주려고 왔어요"  신애의 말에, "저도 예수를 믿고 이미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답니다."  그는 한 술 더 떠서 말한다.  신애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정말 신애로서는 어렵사리 그를 용서해주겠다고 결심했는데, 이 범인은 오히려 신애보다도 더 괜찮은(?) 신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오히려 신애를 위해 기도해주겠다고 하니 주객이 전도되어도 단단히 전도된 형국이 아닌가?


 신애 자신은 그렇게도 처절하게 울부짖고 몸부림치며 괴로워했었는데, 그 수많은 잠 못 이루며, 고통에 시달렸던 그러한 밤들이 있었는데, 인사불성이 되어 거리를 통곡하며 돌아다녔던 세월들이 있었는데, 그런데, 이 범인은 자기 지은 죄로 괴로워하는 모습은커녕 이렇게 태연하게 마음의 평화를 운운하고 있다니.... 용서를 비는 죄인의 모습이 아니라 성인군자의 자태로 서 있다니...  내가 신애였다고 해도, 그의 모습에 분노가 치밀었으리라...  나의 아픔, 나의 고통은 어떻게 되는가?  그 고통을 누가 보상해준단 말인가?  내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 놓고도 저렇듯 평화를 누리고 있다니... 


 도대체 신이 계시다면 이런 불공평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아니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자기가 용서받았다고 나설 수 있단 말인가?  신애의 분노다.  그 분노는 범인에게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불공평한 하나님에게로 향한 것이다.  "신이여.  내가 아직 용서해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당신이 그를 먼저 용서 하신단 말입니까?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
[마태복음 18장 21, 22절]

 

 인간의 용서?  그것은 환상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무조건, 무제한의 용서를 하라고 말씀하신다.  결국 인간에겐 용서하고 말고의 선택권이 없다는 이야기다.  용서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인간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용서 때문에 오늘을 사는 내가 어떻게 누구를 용서하고 말고 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용서를 하고 안 하고는 신의 영역이다.  내가 용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주님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렇게 하시므로 가능할 따름이다.  나는 용서할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주셨으므로, 나는 나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용서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고통의 문제, 용서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 한 분이시다.  그래서 나는 나의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을, 나의 고통을, 나의 분노를 하나님께 그대로 올려드린다.  더 이상 그 문제 가지고 씨름을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용서를 친히 담당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 월권행위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만이 최선의 것임을 알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신께서 대신 짐을 져 주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공의롭고 선하게 심판해주실 것임을 믿고, 인간은 그 분노의 문제에서, 원수 갚는 문제에서, 용서의 문제에서 손을 떼라고 성경은 권면한다.  나의 건강을 위해, 나의 안녕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런 묘책을 알려주셨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장 18-21절]

 

 원수를 위해서가 아니다.  나를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그를 위해서가 아니다.  바로 나의 안녕을 위해서 나의 영혼이 분노로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명령임을 명심하라.

 

 

 천박한 은혜를 유표하고 있진 않습니까?

 

"값싼 은혜는 싸구려로 팔아버리는 상품과 같은 것으로 억지로 내맡기는 죄의 사유요, 위로요, 성만찬이다.  무진장한 식료품 창고에서 물품을 내오듯이 생각 없이 교회에서 털어내는 은혜를 뜻한다.  ... 세상은 죄를 뉘우칠 필요도, 죄에서 해방되기를 애걸할 필요도 없다.  이 은혜의 교회에서 자신의 죄를 덮어 감출 뚜껑을 얼마든지 싸게 얻을 수 있는 때문이다.
싸구려 은혜는 회개 없이 죄의 사유가 가능하다는 설교이며, 교회의 기율을 무시한 세례요, 죄의 고백없이 베푸는 성만찬, 은밀한 참회 없는 면죄의 확인이다.  순종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산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한 은혜가 싸구려 은혜라 하겠다."
-나를 따르라/디이트리히 본회퍼-

 

 


 신애의 아들 준을 유괴 살해했던 범인.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하나님의 은혜를 정말 싸구려로 만들어 버렸다.  본회퍼가 말했듯이 주님 십자가에 피흘려 사신 "값비싼 은혜"를 "싸구려 은혜"로 만들어 버렸다.  너무도 값비싼 은혜를 싸구려, 천박한 은혜로 전락시켰다.  그가 진정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크리스천이 됐다면, 어떻게 자기를 찾아온 신애에게 그런 태도로 대할 수가 있었겠는가?  진정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회개한 사람이라면, 신애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로 잘못을 회개하며 용서를 간청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어떻게든 신애의 고통을 보상해줄 방도를 강구하지 않았겠는가?  그가 그럴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그의 피상성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그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해소하기 위한 도피처로서 기독교를 찾은 것은 아닐까?  고통을 수반하는 철저한 죄의 회개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손쉽게 기독교에 귀의한 것이 아닐까?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하시지만, 그 죄의 결과를 겪도록 하신다.  다윗이 눈물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어 용서를 받지만, 그는 그의 죄악의 결과를 고통스럽게 감수해야만 했다.  삭개오의 회개는 그가 불법으로 치부한 재산의 반납이라는 죄의 대가를 요구했다.  그가 용서받았다고 해서, 그가 지은 죄가 두루뭉실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신의 용서가 죄의 결과(고통)의 면죄를 뜻하진 않는다.  죄와 고통의 문제의 심각성이, 싸구려 은혜 때문에 망각되는 것은 아닌지....  지금 우리 교회들이 바로 이러한 싸구려 은혜를 팔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마땅히 당해야 할 죄의 대가의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은혜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만, 결코 싸구려일 수 없다.  다만 너무 귀해 가격을 매길 수 없을 (Priceless) 뿐이다. 


 범인을 용서하러 갔던 신애는, 오히려 극심한 분노로 교도소 앞에서 혼절하고 만다.  그녀의 혼절은, 천박한 은혜를 내세워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잘못 전해지는 기독교에 대한 항의이기도 하다.  본회퍼는 말했다.  구약 없이 너무 쉽게 신약으로 가지 말라고...  율법을 통한 나의 죄에 대한 철두철미한 자각 속에서만 은혜는 찬란하게 빛나기에... 지금의 기독교회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피상성과 천박성에 비위를 맞춘 왜곡된 복음, 구약을 뛰어넘어 너무 쉽게 은혜의 세계의 열매만을 강조하는 천박한 복음을 전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볼 일이다.

 

"... 구약의 말씀에 더욱 깊은 관심을 쏟게 됩니다.  지난 수개월 동안은 신약보다 구약을 훨씬 많이 읽었지요.  부를 수 없는 구약적 하나님의 이름을 알 때에만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하나님의 율법을 그대로 복종할 때에만 단 한 번이라도 똑바로 은혜를 말할 수 있으며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보복이 실제로 인정될 때에만 사죄와 원수애가 우리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는 말도 될 것입니다.  지나치게 쉽게 그리고 직접 신약적이려고 하는 사람은 나의 생각에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여도 좋을 것입니다."  - 옥중서한/디이트리히 본회퍼-

 

설교보다는 침묵이 필요할 때

 

 

 

 누군가가 처절한 고통 속에서 그 어둠의 속을 지나고 있을 때 주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통 당하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긴 침묵이다.  그저 말없이 그의 고통을 함께 안타까워하며, 지켜보아 주는 일.  신애가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그 긴 나날들 동안 어줍잖은 설교 대신 그저 그녀와 함께 하며 고통을 옆에서 지켜봐주던 종찬이 했던 것처럼...
 욥의 친구들을 비판하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7일낮 7일밤을 침묵하며 고통당하는 욥의 곁을 지키고 있었던 것을 보면, 정말 조급한 마음으로 섣부른 조언을 하는 나보다는 얼마나 더 훌륭한가? 
 


 

 선의이긴 하지만, 우리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그 상실로 괴로워하는 일들을 빨리 끝내기를 희망한다.  물론 조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리라.  그러나, 그들이 충분히 슬픔을 표현할 수 있도록, 실컷 상실의 괴로움을 토로할 수 있도록, 눈치보지 않고 신에 대한 원망과 분노까지를 자유롭게 분출할 수 있도록, 그 속에 내재한 온갖 감정들을 쏟아낼 수 있도록 모든 감정을 용납해주는 분위기를 마련해주어야 할 것이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이 충분히 그의 잃어버린 것들을 애도할 수 있도록 인내로 기다려 주어야 할 것이다.  오직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조용히 그의 감정들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일이다.  설교 없이....  

 

 

 영화 "밀양"에서의 종찬은 오히려 독실한 신자가 아니었기에, 풍부한 학식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기에, 도덕군자가 아니었기에, 오히려 신애가 그 긴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그녀 곁에서 인내로 함께 할 수 있었다.

 

고통의 현장에  함께 계신 하나님

 

맹인 신학자 리겐바흐(E. Riggenbach)는 자신의 아들이 죽었을 때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슬픔을 이겨냈습니다.  이것이 "나보다 높은 바위"에 인도함을 받는 삶입니다.  인생은 현실의 종이지만, 하나님은 현실을 초월하십니다.  인생보다 높은 곳에 계신 바위 곧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박윤선-

 

 영화 "밀양"을 보면서 하나님 없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런 일일까? 생각하게 된다.  정말 내가 고통 가운데 있었을 때, 그 무엇도 위로가 되지 않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영화도, 책읽기도, 여행도, 사람의 위로의 말도 소용 없었다.  오직, 말씀만이, 성경만이 내게 고통을 견딜 힘을 공급해주었던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어찌 나뿐이겠는가? 육이오 사변 당시, 서울에 침입한 공산당을 피해, 다락방에 숨었던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던 유일한 책은 성경이었다고 하지 않는가?


 구구절절, 시편의 기도문들은 바로 언제 죽을지 모를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고통의 날들 가운데 오히려 그 영혼이 새로워지는 경험을 하는 살아있는 신앙의 글들이 아닌가?  나의 고통의 날에 내가 하나님을 알고 그분에게 간구하며,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얼마나 축복된 일이었는지를, 신에게 등을 돌린 채 홀로 고통당하는 신애의 참담한 외로움을 보며, 새삼 깨닫게 된다. 

 

 


 신앙이 있다고 해서, 아들을 살해당한 어머니의 슬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감당해야할 슬픔과 고통의 양은 그대로 내 앞에 있다.  지나가야 할 암흑의 터널이 갑자기 짧아지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어두운 고통의 터널을 나는 그 분과 함께 통과한다.  신은 고통의 현장에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과 함께 하는 고통은 내게 확신을 안겨준다.  이 고통의 끝에는 분명히, 지금은 너무 참담하지만, 더 큰 선이 이루어지리라는 확신 말이다.  나의 고통 속에 지금은 알 수 없는 신의 선한 섭리가 있을 것이라는 처절한 믿음만이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그 고통을 견디어 낼 수 있는 견인차의 역할을 한다.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고통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형벌이다.  지금 당하는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을 때라야만, 우리는 그 고통을 통해 한 단계 내 영혼이 업그레이드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 없이 어떻게 고통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욥도 고통 중에 하나님께 따지고 대들었다.  왜 이러한 고통을 그가 당해야 하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하나님과 함께 씨름했다.  그리고 깨닫는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가 생각해왔고, 또 그의 친구들이 주장하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틀에 갇혀 계실 수 없는 영원히 자유로운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닫는다.  고통이 욥에게 준 최상의 선물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기 42장 5절]

 

 욥이 그랬던 것처럼, 아마도 신애의 적 기독교적인 행동은, 참 신앙을 찾아가는 과정, 그녀가 생각했던 왜곡된 하나님의 이미지에서 참 하나님을 찾아가기 위한 몸부림은 아닐는지....  고통의 과정을 쉽게 생략할 수 있다는 천박한 은혜가 아니라,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고통의 쓴 잔을 최후의 한 방울까지 핥으면서 비로소 얻어질 수 있는 은혜,,,  그러기에 말할 수 없이 귀한 하나님의 은혜...  그 은혜를 누리기 위한 긴 여정은 아닐는지...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시편 71: 20]

 

 

밀양(密陽), 비밀의 빛: 역설적인 은총의 빛

 

 영화 밀양에서의 신애는 고통을 속속들이 겪어내는 기나긴 여정의 길에 오른다.  그 길은 너무도 길고 험난하다.  그녀가 이 여정 중에 그대로 망가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 아슬아슬 곡예를 하는 것 같은 길이다. 그리고 관객은 그녀의 여정의 끝을 보지 못하고 영화관을 나와야 한다.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자기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녀가 좀더 자신에 대해 솔직해져 간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으로 만족해야한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드디어 그녀가 신 앞에 솔직히 설 수 있으리라고 짐작한다. 

 

 

 

  지금 그녀의 마음은 마당 한 구석 후미진 곳, 깨끗해 보이지 않는 우중충한 구석과도 같다.  나로서는 도저히 아들을 죽인 범인은 물론이고, 지금 재생의 길을 찾고 있는 그의 어린 딸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그런 존재임을 그대로 드러낸다.  더 이상 가면도 없고, 위선도 없다.  솔직히 자신의 감정을 보여준다.  신애, 나는 그런 존재이다.  전혀 고상한 구석이라곤 없는, 내 힘으로는 절대로 용서가 불가능한 그런 존재임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녀는 그런 인간의 굴레를 갖고 있는 존재이다.  그런 그녀 자신의 우울하고 우중충한 모습을 그녀는 솔직하게 인정한다.  신애의 집 그 후미진 구석, 어둡고 습기차고, 아무런 꽃도 없는 그 어두운 장소처럼, 용서할 수 없는 그녀의 마음엔 아름다운 구석이라곤 없다.  
 

그러나 감독은 그 후미진 구석으로 카메라의 초점을 옮기면서, 그 구석에 떨어져 내리는 비밀스런 태양빛(밀양이이 말해주듯이)을 조명한다.  빛이 우중충한 마당 구석을 환하게 밝혀준다.  영화 밀양의 라스트 씬은 어두운 곳에 떨어져 내리는 이 비밀스런 햇빛을 관객들이 마음에 새길 수 있도록 한참을 거기 머물러 있다가 조용히 fade out 된다.

 

 신애가 느끼는 인간의 한계.  자기로서는 용서가 불가능하다는 자각.  그것은 어두움이다.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죄성의 자각이다.  우울함이다.  그러나 바로 나로서는 할 수 없다는 그 자각, 그 솔직함.  고통의 심연을 견디고 간신히 벗어난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그 솔직함 위에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비추인다.  


 

 

 그렇다.  은혜는 그렇게 우리에게 엄습하는 것이다.  이제는 나로서는 끝이다라고 느낄 때, 은혜는 역설적으로 그렇게 다가오는 것이다.  신비한 빛이 되어 나의 어두움을 밝혀주는 것이다.  이제 신애는 고통의 어두운 터널을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새로운 여정이 시작될 것이다.  그 여정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종류의 여정이 되리라.  

 고통을 낱낱이 겪은 후 신애는 신의 은혜의 빛과 조용히 만난다.  그리고 전혀 요란스럽지 않은 조용한 일상의 여정이 이어지리라....  누가 알랴...  그 후미진 신애의 마당 한 구석에 태양빛이, 바로 이곳을 각양각색의 꽃들이 핀 꽃밭으로 변모시킬지....  은혜의 빛이 신애의 어두운 마음에 서서히 꽃을 피우게 되리라는 예감을 갖게 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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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사랑으로 이 세상을 감싸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
그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시는 아름다운 성탄절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사랑 안에서,  이 영순 드림

 새벽에 쓰는 편지 (제 89신)에서
 2007년 12월

출처 : 지혜의 샘
글쓴이 : wisdomwel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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