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왔수 ...
-채준호 신부-
얼마 전에 한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울다”라는 책입니다. 내용은
술에 만취한 사람이 운전하는 차가 갑자기 중앙선을 넘어서 “제랄드 싯처”라는 저자의 가족이 탄 차를 덮쳤습니다. 이 사고로 저자는 어머니와
아내, 다섯 자식 중에서 둘을 한 순간에 잃어버렸습니다. 자신과 자식 셋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저자는 아주 길고, 너무나 처절한 상실의 고통을
겪어내면서 몇 가지 질문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하필이면 나에게 일어났는가? 왜 나쁜 일은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을 때 나에게 일어나는가?
왜 고통은 쉽게 해결하는 방법이 없는가? 등등의 질문입니다. 그러면서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의 긴 투쟁과 방황을 3년 가까이 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저 나름대로 저자의 결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다. 왜? 나도
인간이니까... 불행은 항상 하나씩 오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전혀 준비 되어있지 않을 때, 아무에게나 찾아온다. 이번에는 나의 차례이다.
삶에서 어떤 것은 그냥 당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저자는 계속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말은 이렇게 쉽게 하지만, 이 말들을 고스란히
살아낸다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다거나, 힘들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계속 힘들 것이다. 그리고 지금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이
위로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저자는 “인생을 살다보면,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나에게 이유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때로는 그런
일들은 그냥 견뎌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혼자 겪어내지 말고, 예수님과 함께 겪어라”라는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인생을 아주 오래 산 어떤 분이 아주 오래 전에 저에게 “인생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는 말씀을 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인생은 살아가는 것, 그것도 아주 잘 살아가는 것이지, 살아내는 것은 또 뭐야?”라는 의아함이 저의
마음속에서 올라왔습니다. 그러다가 이 즈음 저도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가면서, “맞아 인생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구나”라고
수긍하는 때를 아주 자주 만납니다. 저자도 불행하게도 이런 순간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사실을 인정하는데에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 분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희망은 신앙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람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 가족,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희망이
자신을 고통과 함께 견딜 수 있도록 해 주었고, 아직도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과 함께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분의 글을 읽으면서, 아주 어릴 때 기억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저의 부모님에 관한 기억입니다. 저의 어머님과 아버님은 서로가 말씀을 별로
하지 않고 평생을 함께 사신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자식 일곱을 본 것을 보면, 금슬(琴瑟)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외출을 가셨다가 돌아오시면, 사랑방에 계시는 아버님을 향하여 딱 한마디 “나 왔수”로 모든 인사를 대신하셨습니다. 그러면, 사랑에
계시던 아버님께서는 제대로 대답을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냥 “으흠”이라는 소리로 대답을 대신하셨습니다. 절대로 어머님을 향하여, 문을 열면서
“잘 갔다 왔느냐? 무슨 일이 있었느냐? 누구를 만났느냐?”라고 묻는 법이 없었습니다. 이 두 분의 인사법은 어린 저에게 아주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왜 어머니는 대꾸도 하지 않으시고, 내다보시지도 않는 아버님을 향하여, “나 왔수”라는 말씀을 거의 매일 반복하시는지 어린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어머님께 그 이유를 여쭈어본 기억도 납니다.
그러다가 저도 나이를 들어가면서 부모님의 이러한
이상한 인사법을 이해하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성당을 들어서면서, 예수님을 향하여, “나 왔수”라는 말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으흠”이라는 대꾸조차 하지 않으셨지만 말입니다. 그 날 처음으로 “나 왔수”라고 하는 어머님의 마음을 이해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머님의 “나 왔수”라는 말은 그냥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평생을 함께 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상대에 대한
존재의 확인, 존경의 표현,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믿음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완벽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나약하면서도
강하고, 선하면서도 악할 수 있는 사람, 그렇지만 함께 오래 산 사람에 대한 믿음의 표현인 셈이지요. 나이를 먹어가면서 옛날처럼 하루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말을 많이 해야 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계속 반복되는 일상사에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그냥
당신이라는 존재가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가 여기 있다는 확인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삶의 무게가 너무 힘들어서,
말로써 무엇을 전달한다는 것이 허망스러울 때, 그냥 나 왔수라고 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경우이든지, 상대에 대한 대단한 믿음 없이는
“나왔수”와 “으흠”의 단순한 인사의 교환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저의 마음이 보게 된 것입니다.
수도생활을 하면 할수록, 예수님
앞에 앉으면 별로 할 말이 없어지는 날들이 많아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세상이 나아지기 때문에 말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삶을 잘 살아서 말이
없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자신 안에 있는 절망과 희망, 약함과 강함, 미움과 사랑, 악함과 선함 모두를 너무 선명하게 보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면서 말이 없어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는 것, 살아내는 것도 자신의 노력이기보다는 대부분
다른 사람의 너그러움과 하느님의 관대함 때문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삶을 살아내는 것도 얼마나 큰 은총인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더더욱
말이 없어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수많은
질곡의 경험을 통하여 세포 하나하나가 받아들이면서, 그냥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나 왔수”라고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이럴 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그냥 쳐다보고만 있는 성모님의 마음이 이랬을까 하는 생각도 감히 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성모님에게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이 글을 쓰면서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에게
많은 말씀을 하셨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냥 “어머니, 나 다시 왔수”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여기다 굳이 한마디를
더한다면, “하느님께서 어머님께 하느님의 사랑과 안부를 대신 전해달라는 말씀을 하더라”라는 정도였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성모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나 왔수”라는 말씀을 하실 것 같습니다. 여기에 “하느님께서 삶을 살아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사랑의 안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더라는 말을 덧붙인다면 더 없는 위로가 되겠지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믿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보다 더 깊이 우리를 아시고 신뢰하기 때문에, 우리를 나약함을 아시면서도 자신의 사랑의 사업을 맡길 만큼 인간을 신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다른 많은 말씀을 하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부활하시어 그냥 “나 왔수,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과 안부를 전합니다”라는 말씀
이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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