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ory/Theology

[스크랩] " 이콘" 의 파괴 논쟁

반찬이 2012. 5. 17. 19:11

 

 



3. 성화상 (이콘)파괴 논쟁



 5세기와 6세기에 걸쳐 그리스도교 신자들 중 많은 이들이 그림을 통해서 영적인 하느님께 대한 거리감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우상숭배의 위험을 염려하여 신자들의 요구에 소극적으로 대처하였다. 그러나 이미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으로, 또는 인간을 하느님의 한 형상으로 보았다. 즉 그리스도는 본성이 하느님과 가까운데 비하여 인간은 다만 그 외모만 하느님과 가깝다. 따라서 이콘들에 묘사된 그림들도 원상의 모상이므로 원상에 유사함 점을 고려하면 원상의 한몫을 차지한다고 간주하는 신 플라톤철학에 의거한 회화사상이 이러한 목판에 그려진 그림들에 다시 전용되었

 691년과 692년에 걸쳐 개최되었던 트룰란(Trullan)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를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함을 규제하였다. 교회의 이러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성화상(이콘)에 대한 문제가 다시금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의 레오 3세 황제는 726년 성화상을 논박하기 시작하였고 잇달아 성화상과 성화상을 공경하는 이들을 제거하고자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이슬람 교도들과 유대인들의 개종을 가장하여 절대적 군주가 되고자 하는 야심으로 교회를 자신의 권위에 굴복시키려고 이콘 공경자들을 박해한 것이었다. 그는 군대에 의한 폭력도 주저하지 않았으며 콘스탄티노플의 총 대주교도 지조없는 아나스타시우스로 교체하여 그의 동의를 얻어 730년 성화상 파괴에 대한 칙령을 반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성화상 논쟁이 일어났고 비잔틴 왕국을 멸망 직전에 이르게 했으며 843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이콘들이 파괴되었고 이콘 공경자들은 박해를 당했으며 수많은 이들이 그로 인해 순교까지 당해야했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2세와 그의 후계자 그레고리오 3세는 이콘 파괴의 중지를 요청하고, 이콘에 대한 파괴와 비방의 행위에 파문의 벌울 부과하였다.
   그러나 레오 3세 황제의 아들 콘스탄틴 5세 코뿌로니무스(741-775)치하의 동방에서는 이콘에 대한 박해가 더욱 격렬해졌다. 그는 754년 히에레야에서 이콘 공경을 반대하는 주교들 338명을 모아놓고 공의회라 명명하였다(그러나 총 대주교는 아무도 참석치 않아 공의회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 회의에서 황제는 자기의 원의에 따라 성화상 파괴를 재가받았고 이콘 공경은 사탄의 행위요, 새로운 우상숭배라고 선언되었으며 이콘 공경의 옹호자들을 파문하였다. 이후로 제국의 모든 주교는 동의를 해야 되었으며 성화상은 모든 교회에서 제거되어야 했고, 벽화와 모자이크에는 석회칠을 했고, 그 자리는 세속적인 풍경화로 대치하였다. 이러한 조처에 용감히 반대한 것은 거의 수도자들이었다. 그로 인해 761년 이래 수도자들은 무자비한 박해를 받아 많은 이들이 순교하였고, 또 많은 수도원은 몰수되어 무기고 등으로 바뀌었다.이후, 콘스탄틴 5세의 레오 4세 치하에서는 좀 완화된 태도를 보이기는 했으나 역시 전대의 형법이 존속하고 있었기에 신고가 있을때는 형이 집행되곤 했다. 레오 4세의 사망후 그의 미망인 이레네 황후가 미성년자인 아들 콘스탄틴 6세의 섭정을 맡았을 때(780-790) 결정적인 변화가 생겼다. 그녀는 이콘은 공경했고 또 그로 인해 추방당한 일도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충실한 콘스탄티노플의 총 대주교 타르시우스의 도움으로 하드리아누스 1세 교황과 일치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라 787년 가을 니케아에서 개최된 공의회에서 약 350명의 주교들은 754년의 시노두스의 결정사항을 배척하고, 옛 전통에 의하여 십자가, 그리스도, 천주의 모친, 천사와 성인들에게 촛불, 향등과 함께 무릎을 꿇어 정성껏 공경할 수 있고 또 해야함을 선언했고, 그럼에도 참다운 흠숭은 오직 하느님께만 합당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 결의는 이후 약 30년 동안 비잔틴 제국에서 지속되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인 레오 5세 황제(813-820)는 815년에 성화상파괴를 다시금 명령하였고 754년의 성화상 공경 반대의 결의를 다시금 복귀시켰다. 이어 콘스탄티노플의 니체포루스 총대주교가 해임, 추방되었으며 또다시 수많은 수도자들이 처형되었다. 이러한 박해는 레오 5세를 이은 미카엘 2세(820-829)와 테오필루스(829-842) 황제 때도 계속되어 거의 30년이나 지속되었다.
이상한 역사적 일치속에서, 세 사람의 성화상 박해자들이 지나간 다음 다시금 테오필루스 황제의 미망인 테오도라는 미성년자인 아들 미카엘 3세의 섭정이 되어 메토디우스 신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의 도움으로 843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공의회에서 이콘 공경을 다시금 인정케 하였고 그리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기념하기 위해서 사순절 첫 주일을 "정교주일"로 정하였다. 이 기념축일은 오늘날까지도 보존되고 기념되고 있다. 정교주일에는 정교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특별의식을 거행한다. 이 의식은 대영광송, 삼성송으로 주님을 찬양하면서 성화상을 높이 치켜들고 행렬을 한다. 의식 주에 사제는 니케아 공의회(제 7차 세계 공의회)의 기록을 큰 소리로 낭독한다.
"예언자들이 본대로, 사도들이 가르친대로, 교회가 이어받은대로, 교부들이 가르친대로, 온 세상의 교회가 합의한대로, 거짓이 쫓겨난대로, 지혜가 떳떳하게 전파한대로, 그리스도가 치하하신대로, 그리스도 우리 하느님을 생각하며, 말하며, 전파하라. 그분의 성인들의 말로, 저서로, 명상으로, 성제(聖祭)로, 성당에서 성화상으로 공경하라.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공경하며 경배하라. 그리고 또한 그분의 성인들을 진정한 그리스도의 종사자들로서 연관적으로 공경하라."
   이렇게 성화상 논쟁 이후 깊은 종교적 감동, 강한 영성과 절제에서 나온 모습의 이콘들이 나타났다. 이는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의 참담한 멸망 때까지 이콘의 표준이 되었다. 성화상을 지지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성서와 교회의 전통에 의거하였는데, 그러한 것 중 하느님을 그림으로 묘사하여도 좋은가가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는 것을 부인하는데는 모두 합의를 보았는데, 그 이유는 누구도 그분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세 역시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의 음성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그림은 성화상 지지파들의 입장이 관철되었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참으로 인간이 되었으므로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의 이콘에 대한 경배는 인간의 손에 의한 작품에 대한 경배가 아니고 성 바실리오의 말씀처럼 그 원상에 대한 경배인 것이다. 따라서 787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성화상에 대한 의무적인 규정과 이콘에 관계되는 사항들을 결정했고 다마스커스의 성요한의 "그림이란 원상을 표현한 유사란 것이어서 원상과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라는 주장도 받아들였다. 이렇게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의된 성화상에 관한 규정은 후에 이콘 제작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이콘 작가들이 가능한 한 원상에 가깝게 그리도록 촉구하였고 이러한 그림만이 진정한 성화로 간주되었다. 이로써 화가들은 그림의 전형에 따라 제한된 묘사를 하게 되었다.

출처 : 수산나
글쓴이 : 조정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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