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성화상 (이콘)파괴 논쟁
5세기와 6세기에 걸쳐 그리스도교 신자들 중 많은 이들이 그림을 통해서 영적인 하느님께 대한 거리감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우상숭배의 위험을 염려하여 신자들의 요구에 소극적으로 대처하였다. 그러나 이미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으로, 또는 인간을 하느님의 한 형상으로 보았다. 즉 그리스도는 본성이 하느님과 가까운데 비하여 인간은 다만 그 외모만 하느님과 가깝다. 따라서 이콘들에 묘사된 그림들도 원상의 모상이므로 원상에 유사함 점을 고려하면 원상의 한몫을 차지한다고 간주하는 신 플라톤철학에 의거한 회화사상이 이러한 목판에 그려진 그림들에 다시 전용되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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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1년과 692년에 걸쳐 개최되었던 트룰란(Trullan)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를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함을 규제하였다. 교회의 이러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성화상(이콘)에 대한 문제가 다시금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의 레오 3세 황제는 726년 성화상을 논박하기 시작하였고 잇달아 성화상과 성화상을 공경하는 이들을 제거하고자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이슬람 교도들과 유대인들의 개종을 가장하여 절대적 군주가 되고자 하는 야심으로 교회를 자신의 권위에 굴복시키려고 이콘 공경자들을 박해한 것이었다. 그는 군대에 의한 폭력도 주저하지 않았으며 콘스탄티노플의 총 대주교도 지조없는 아나스타시우스로 교체하여 그의 동의를 얻어 730년 성화상 파괴에 대한 칙령을 반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성화상 논쟁이 일어났고 비잔틴 왕국을 멸망 직전에 이르게 했으며 843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이콘들이 파괴되었고 이콘 공경자들은 박해를 당했으며 수많은 이들이 그로 인해 순교까지 당해야했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2세와 그의 후계자 그레고리오 3세는 이콘 파괴의 중지를 요청하고, 이콘에 대한 파괴와 비방의 행위에 파문의 벌울 부과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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