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 영화는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으로, ‘복수의 나의 것’과 ‘올드보이’가 바로 복수 3부작의 영화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대중문화의 코드 중 한 가지는 복수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영화와 문학작품은 복수를 다루고 있다. 복수의 종류도 아주 다양하다. 부모를 위한 복수, 자식을 위한 복수, 아내나 남편을 위한 복수부터, 자신의 인생을 망친 사람에 대한 복수와 조금 더 거창하게 나라와 민족을 위한 복수까지...
복수는 주로 사랑하는 사람(가족이나 연인)을 위하여 복수를 하게 되거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반당했을 때 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복수와 사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일 것이다. 복수와 사랑이라는 두 가지 주제가 Freud의 성적 추동과 공격적 추동을 생각나게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여러 종류의 복수 중에서 대표적인 복수 이야기는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죽이는 아들이 그 원수나 혹은 원수의 자식을 벌하는 이야기이다.
1. 원수가 쳐들어왔다.
2. 아버지를 비롯하여 여러 가족을 죽인다.
3. 이 때 원수는 자식까지 멸하지 않고 살려두거나, 혹은 발견하지 못해서 죽이지 못한다.
4. 여러 가족이 죽는 것을 자식이 목격한다.
5. 첩첩 산중에 들어가서 복수의 칼을 간다. 이 때 대개는 스승이 있게 마련인데, 이 스승은 엄청난 실력을 가졌지만 속세를 떠난 폐인같은 몰골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6. 실력을 쌓은 후에 복수를 하러 쳐들어간다.
7.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목에 칼을 겨눈다.
8. 그러나 마지막에는 되풀이 되는 복수를 막기 위하여, 결국 원수를 죽이지 못한다.
혹은 그냥 고민 없이 죽인다.
하지만 이런 거창한 복수는 아니더라도, 우리 삶 속에서 복수는 아주 흔하다. 신문의 사회면을 보라. 얼마나 많은 살인사건과 폭력사건이 터지는가?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복수의 흔적이 엿보인다. 뿐만 아니다. 자살이 우리 사회의 큰 문제로, 자살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복수로서의 자살이 있다. 자신을 죽임으로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대상에게 상처를 주는 목적으로 하는 것이 바로 복수로서의 자살이다.
복수로서의 자살? 아니 복수도 자신이 살자고 하는 일 아닌가? 어떻게 자신을 죽임으로 복수를 한다는 것인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복수로서의 자살은 복수에 대한 열망이 자신의 생존욕구를 포기할 만큼 크고 중요한 또 하나의 욕구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복수인가? 복수는 왜 이렇게 강렬하도록 중요한 것일까?
복수에 대하여 여러 가지 심리학적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 두 가지로 복수를 설명하려고 한다. 우선 복수라는 현상은 대인관계에서의 항상성으로 설명할 수 있고, 복수의 이유와 원인은 이해 받고자 하는 욕구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성(homeostasis)이란 같은 성질을 유지하면서 그것에 머무르려 한다는 것으로 다른 말로 동질정체(同質停滯)라고도 한다. 간단하게 말해 균형을 유지하려는 속성으로, 균형이 파괴되었을 때 원상복귀하려는 힘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원래 생물학에서 나온 개념이지만, 심리적 영역에서도 적용이 가능하다. 우리의 마음도 어떤 안정된 상태가 형성되었다가, 이후에 그 균형이 깨어지게 되면 다시 그 상태로 복귀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기분이 안좋은 사람은 기분을 좋게 하려는 여러 시도를 함으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며, 자극이나 스트레스가 너무 없는(심심한) 사람은 재미있는 것이나 모험을 함으로 자극을 추구하며, 반대로 자극을 너무 많이 받는 사람은 자극을 피하려고 한다.
이런 항상성은 대인관계에서도 나타난다. 둘 사이에 관계(상태)가 형성되면, 그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두 명의 어린이가 있다. 이 둘은 친구다. 한 녀석이 다른 녀석을 때리면, 맞은 녀석은 때린 녀석을 때림으로 복수를 한다. “나도 한 대 맞았으니, 너도 한 대 맞아야 한다”, “내가 아프니 너도 아파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렇게 주고 받는다.
물론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맞고 저항을 안 할 수도 있다고? 물론 그렇다. 하지만 당장의 저항을 하지 않는 것일 뿐, 이것이 쌓이고 쌓이면 나중에 한번에 폭발을 하게 되어, 더 큰 복수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이런 면에서 심리적인 면에서도 give and take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국 복수란 대인관계에서의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복수의 현상이 대인관계의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것이라면, 이렇게 대인관계에서 항상성을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와 동기는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자신이 받았던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주려고 할까?
실제로는 여러 심리적 이유가 있겠지만, 간단하게 생각해 본다면 그 이유는 "이해받고자 하는 욕구"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받은 아픔을 상대방에게 느끼게 함으로 자신의 아픔을 상대방에게 알리려는, 이해받으려는 그런 욕구가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다. 단지 "내가 고통을 받았으니 너도 고통을 받아야 한다"라는 단순한 논리 속에는 이해받고자 하는 욕구가 숨어 있는 것이다.
원수의 칼에 아버지를 잃은 사람은, 나중에 원수를 죽임으로써 자신이 아버지를 잃고 경험했던 슬픔과 고통을 원수의 자식에게 똑같이 경험하게 한다.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다른 사람에게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상대방이 자신의 처지와 아픔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인간주의 학파이자 인간중심치료의 창시자인 Rogers는 치료를 촉진하는 세 가지 중요한 방법을 제시하였다. 솔직성,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 그리고 공감적 이해이다. 공감적 이해라는 것은 상담자가 내담자의 입장에 서서 내담자를 공감해 주고 이해해 줄 때 내담자는 자신의 상처에서 벗어나서 멈추었던 성장을 계속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받고자 하는 욕구는 복수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현상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불안이 심한 사람은 다른 사람도 불안하게 한다. 물론 우리는 불안한 사람을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가 불안을 느낀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보면 불안을 느끼는 사람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인생이 즐거운 사람은 다른 사람도 즐겁게 한다.
결국 사람들은 상대방을 자신의 상태와 동일하게 함으로, 다른 누군가로부터 이해받고 싶어하는 아주 기본적인 욕구를 표현하는 것일게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복수를 하고 있는가? 혹은 누가 지금 나에게 복수를 하고 있는가?
나는 누구를 힘들게 하는가? 혹은 누가 나를 힘들게 하는가?
결국 이 모든 복수는 단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논리를 넘어서는 것으로
이해받고자 하는, 인간의 여린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복수를 하는 사람들은 그 안에 엄청난 분노가 숨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무서워한다. 이들이 강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는 사랑받지 못하고, 보호받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하여 상처받은 여린 마음이 있다. 그래서 이해받고자 하는 약한 마음이 있는 것이다.
강하게 보이는 사람일수록 약한 사람이고, 약하게 보이는 사람일수록 강한 사람이라는 말도 이해가 되는 말이다.
정말 강한 사람은 복수를 하지 않는다. 스스로 감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수를 하는 사람들은, 쉽게 짜증을 내는 사람들은, 남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약한 사람들인가!
미스팩의 복수방법이 궁금하지 않는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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