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으로부터 배운 것
장성숙
어느 한 젊은 친구가 내게 와서 하는 말이 이제 직장에서 선임자와 그만 싸우며 그런대로 자제를 하고 있단다. 그랬더니 상대방도 조금은 수그러들면서 슬금슬금 자기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다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그렇게 말려도 안 되더니 어떻게 해서 그런 마음을 갖게 되었느냐고 묻자, 모든 게 다 철쭉님 덕분이라고 했다. 직장에서 말도 안 되는 것에 대하여 선임자가 어찌나 땍땍거리는지 참기가 너무 어려워 철쭉님께 전화로 말씀드렸더니, “현실적인 이득이 있다고 판단되면 엎드리는 것이 득이다.” 라고 조언을 해주셨다는 것이다.
나는 이거다 싶어 얼른 그 말을 받아 적었다. 그러지 않아도 요즈음 나는 ‘건강하게 산다는 게 다름 아니라 현실에 충실 한다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자칫하다가는 발을 디디고 있는 현재에 충실하기보다 환상을 쫓다가 내가 살아 숨 쉬는 지금-여기를 놓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렇게 지내다보면 이 귀중한 삶의 시간이 어설프게 지나가고 말 것이 뻔하다.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이 한정된 시간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언제부터인가 절실할 정도로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억의 존재이기 때문인지 오래전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이제는 빙긋이 웃게 되는 그 장면들, 벌써 한 10년 전 쯤의 일이다.
집단상담에 참석한 어느 한 중년 남자는 귀공자 타입의 키가 훤칠한 사람이었다. 일찍이 불가에 귀의했던 그는 불교학을 전공으로 공부한 후 출가를 하려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 학과에는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공부하던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마침내 그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하게 되면서 출가를 다음 생으로 미루고, 그 유명했던 부설거사처럼 세속에 살면서 열심히 참선수행을 하여 득도하자며 결혼을 했다.
슬하에 자녀도 두지 않고 절 근처에서 수행을 하며 살던 그 부부에게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가 생겼다. 질 좋은 음향기기로 고전 음악을 듣는 것 외에는 별로 욕심 부리지 않고 살던 그 부부에게 홀로 남게 된 아버지와 병약한 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러면서 발생하는 갖가지 책임을 감당해야 할 처지가 되자 피부에 와 닿는 우선적인 어려움은 경제적인 문제였다. 며느리 입장인 아내는 그것이 현실에서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정작 관계의 정 중앙에 있는 남편은 여전히 귀공자로서 차와 음악에나 심취며 고고할 뿐 너무나 무심했다.
남편의 태도에 갑갑함을 느낀 부인은 자신이 먼저 집단상담을 경험하고 난 이후, 잘 살펴봐달라는 부탁을 내게 하며 남편을 집단상담에 보냈다. 나 역시 한 때 출가자의 수행생활을 동경했던 터라 각별한 관심을 갖고 그를 맞이했다.
집단상담을 하는 동안 비교적 남의 말을 잘 이해하던 그가 자기 상황을 말하는 대목에서 자기는 돈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있던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간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응수했다. 그러자 저 쪽에 앉아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철쭉님이 내 쪽을 향해 고개를 홱 돌리며 쏘아보는 것이 아닌가! 순간적으로 심상치 않음을 느낀 나는 슬며시 말을 접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쉬는 시간에 왜 그러셨느냐고 여쭈어보았다. 그러자 철쭉님은, 돈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니 무슨 그런 말이 있느냐고 정색을 하셨다. 실직을 해 자살까지 하는 사람들이 허다한데 그 무슨 망발이냐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이 그 사람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사람을 바로 잡아주어야 할 상담자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런 되지도 않는 말에 이해가 간다는 말로 동조를 하다니, 어째 그럴 수가 있느냐며 도저히 나라는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난리를 치셨다. 손에 흙 묻히고 사는 당신으로서는 도무지 그 말들을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으니, 두 고상한 사람들 끼리 잘 해보라는 것이었다. 돈이 없어 죽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판에 신경질이 나서 쳐다보기조차 싫다는 것이다. 그런 뜻이 아니라며 뭔가를 설명하려해도 이미 철쭉님은 돌아서버렸다. 돌아서는 그 모습에는 어찌나 찬 바람이 쌩쌩 일던지.
의외로 그런 냉전의 시간은 길었다. 철쭉님께서는 거의 마지막 시간까지 그 사람은 물론 집단에서 파트너로 일하는 나에게 조차 눈길을 주지 않으셨다. 마무리를 위해 각 사람에게 한마디씩 해주는 마당에 이르러서도 그 사람에 대하여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셨다. 보다 못한 나는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면에서 철쭉님께 그 사람에게도 한 마디 해 주시라고 청을 드렸다. 그러자 철쭉님은 “아, 땀 냄새 나게 사는 나 같은 사람은 저런 고상한 사람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며 싹둑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갑작이 장내는 썰렁해졌다. 자기를 상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태연한 양 하던 그 사람도 순식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괜히 말을 시켜 더욱 난처한 상황을 만든 나도 그야말로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었다.
끝내 그 사람에게는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으셨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비싼 돈을 내고 상담을 받으러 온 고객에게 5박6일 동안 그렇게 박절 맞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다니....... 끝끝내 사람을 그렇게 무안하게 해서 보내니 참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하는 의문이 들 때면 간간이 그때의 장면들이 스쳐지나간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 사람이 돌아가서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개최하는 집단상담에 가보라고 권하면서, 그곳에는 도사가 한분 계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냉대를 받고서도 오히려 그분을 도사로 치켜세우다니! 참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미 그 두 사람은 서로 뭔가를 주고받았는데 중간에서 괜한 나만 애를 태웠으니 말이다.
사실,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각자에게 부과된 과업 즉, 끈임 없이 전진하며 뭔가를 성취해야 하는 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자기에게 부과된 일들을 하나하나 처리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 품을 벗어나 또래들과 어울려야 하고, 학생은 학생대로 진학을 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공부를 해야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진로 진입을 위해 악전고투를 해야 하고, 또 적당한 짝을 만나 결혼하는 것도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어디 그뿐이랴. 직장에서 자신의 자리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고금분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사이에 아이들을 위한 부모노릇도 제대로 해야 하고, 부모님을 비롯한 친인척에게 사람구실도 해야 하고, 친지들도 잘 챙기지 않으면 어느 순간 고립되어 초라해지고 만다. 이렇게 분주하게 살다 어느 날 병마가 찾아오면 또 그것과도 힘겨운 씨름을 해야 하고....... 정말 눈을 감기 전에는 끝이 없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간간이 기쁨이란 것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그것은 고달픈 여정에 잠시 쉬었다 가는 오아시스에 불과하다.
벌써 철쭉님이라는 분을 만난지가 거의 20년이 다 되어간다.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그러나 그 긴 세월 동안 그렇게 가까이서 뵈었어도 정말이지 그분을 잘 모르겠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집안으로 연결된 분이 아니라면 그분을 그렇게 아는 분으로 가까이에서 모실 수도 없었을 것이다. 너무나 다양한 천의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가운데서도 이제는 뭔가 하나로 정리되는 바가 있다. 아마 나 역시 나이를 들어가면서 뭔가를 자꾸 정리하려 들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그분은 내게 다름 아닌 현실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셨지 싶다.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를, 환상이 아니 현실을 제대로 살도록 끊임없이 알려주셨던 거다.
그러나 내게는 현실을 제대로 충만하게 산다는 것이 왜 그리도 어렵던지! 오랫동안 혼자 사는 습성이 몸에 배였기 때문인지 주위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혼자 자기 일에 몰두하며 지내는 것이 훨씬 편하고 또 익숙하다. 이러한 나를 볼 때마다 철쭉님은 어찌나 난리를 치며 불호령을 내리는지 정말 편안히 지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음을 이제는 알겠다. 그만큼 나이가 들었고, 또 주위를 사랑하며 살지 않는 것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짓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기 때문이다.
자기 영역 안에 들어선 자에 대하여서는 차별을 두지 않고 열심히 베풀며 사랑하는 것, 그렇게 사는 자세야 말로 가장 현실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데는 족히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그런 일깨움을 주는 한가운데는 철쭉님이 장승처럼 버티고 서계신다. 인연의 고마움에 그저 고개 숙이고 또 숙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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