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고리
장성숙/ 가톨릭대학교, 심리학
말을 제대로 구사하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래서 말에 대한 숙련을 위해서는 끝없이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대상은 다름 아닌 사람이다. 바로 사람에 의해 행․불행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관계는 아주 중요할 수밖에 없는데, 그 관계를 결정짓는 매체가 바로 말이다. 사람은 관계적 존재이고 또 관계는 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니, 조금씩 표현은 다를지라도 사람, 관계, 말은 결국 삶을 표현하는 다른 어휘들일 뿐이다.
대학생활을 갓 시작한 어느 집 외아들을 상담하게 되었다. 그는 혼자 자랐기 때문이었는지 외로움이 푹푹 묻어나는 아이였다. 나는 그를 상담하면서 사람은 풍부한 관계 속에서 발전되는 것이라며 가급적 친구들을 많이 만나도록 조언했고, 그도 내 말을 잘 따라주었다. 또 부모에게도 아들이 자율성을 기르도록 일단 믿고 따라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
부모의 지원 아래 아들은 신나게 대학생활을 시작했고 점차 교우들 사이에서 인기도 얻어갔다. 부모는 아들이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와서 3학년부터는 사회진출을 위한 준비를 다부지게 했으면 했다. 그러나 친구들과의 관계에 재미를 붙인 그는 앞으로 과 대표직을 맡아 지도력을 연마할 겸 입대를 1년 정도 늦추었으면 하는 의사를 표명했다. 아들의 이러한 의사에 대해 갸우뚱하는 부모에게 나는 그렇게 하는 것도 아들의 사회성 발달에 도움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며 허락해주도록 거들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약속한 1년이 다 되어가자 변하기 시작했다. 학생회장이 되고 싶다며 처음 약속과는 달리 또 다시 입대시기를 연기하려했다. 이렇게 되자 부모는 심각한 고민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미 몇 달 전에 상담을 종결했기 때문에 아들의 근황을 모르고 지내던 나는 뒤늦게 아버지로부터 이런 소식을 접하자 난감했다. 대인관계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확보한 다음 학생회 활동을 접고 군대에 가기를 바랐는데, 그는 그만 친구들과 의기투합하며 지내는 재미에 푹 빠진 것이다. 그런데 나를 더욱 긴장시킨 것은 현 상태가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사태였다. 이런 식으로 학생회 활동을 하다가는 운동권으로 빠질 수 있고, 그러면 사회에 나와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하기가 어렵게 될 가능성이 농후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나는 어떻게든 그가 처음의 약속대로 이 시점에서 모든 것을 접고 군대에 가도록 방안을 모색했다. 마침내 아버지는 아들이 왜 이 지경이 되었느냐며 아내와 싸워 이혼서류를 작성하는 등 소동을 벌리며 강력한 방법을 동원했다.
온갖 줄다리기를 하며 버티던 아들은 마지못해 입영하기 하루 전날 이미 확정된 학생회장 직을 포기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사실 아들 입장에서도 자기를 추대하고 선거활동을 해준 학생회 조직의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입대한다는 것이 무척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시간은 흘러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어느덧 그런 소란이 있은 지 서너 달이 지나자 그 아들은 며칠간의 휴가를 받아 나왔다. 휴가 중 그는 장미꽃 한 다발을 사들고 내게 인사를 하러왔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손을 덥석 부여잡고 한참을 웃었다. 빙긋빙긋 웃는 그는 학생회 활동을 할 당시 술에 절었던 모습과는 달리 해맑은 젊은 청년의 모습이었다. 어떠냐는 나의 말에 그는 웃으며, 입대 직전에 부모님과 친구들 사이에서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차라리 군대에 가 있으니까 편하다는 말을 했다. 그 말에 지난날 법석 떨던 시간이 생각나 우리는 다시 박장대소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작별인사를 나누려하는데 어느 여학생이 다가왔다. 그의 여자친구였다. 여자친구의 모습을 어떻게든 내게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난 그는 그녀를 급히 우리의 만남 장소로 오게 했던 것이다. 입대한지 이제 겨우 100일 정도 되는데 그동안 그녀로부터 받은 편지가 100통이나 된다고 자랑하는 그 아들! 참 좋은 시절이라는 생각에 웃음을 터드리고는 이내 그들과 헤어졌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 부모에 대한 근황을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들을 기회가 있었다. 아들을 힘들게 군대에 보내 놓고 이제는 안심을 하고 있으려니 했는데, 정작 그 아버지는 산 넘어 산이라고 하면서 아들의 여자친구가 마음에 안 든다며 걱정하는 말을 하더란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부모욕심이 하늘을 찌르는 것이라지만 이제 겨우 군대간 아들을 두고 너무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왠지 숨 돌릴 새도 없이 부모욕심만 잔뜩 앞세우는 것 같아 질리는 기분이 든 것이다.
며칠 후 자문을 맡아주신 선생님과 무슨 말을 나누다 나는 그 청년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식이 하나 밖에 없어서 그런지 아무래도 너무한 것 같아요.” 라고 했다. 그러자 그분은 너무하긴 뭐가 너무하냐며 아들 갖은 부모 마음이 다 그런 것이니, 어디 가서 너무하다는 그런 말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너무나 단호한 그분의 당부에 오히려 나는 의아했다. 의아해 하는 네게 그분은 설명을 해주었다. 원래 자식에 대한 욕심은 하늘도 못 말리는 것이라며 그러려니 하고 지켜나 보란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괜한 말을 해 이상한 사람으로 찍히기나 하면 꼴만 우습게 되니 각별히 조심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식에 대한 부모의 그런 욕심에 대해서는 아들이 부모를 이해해야지 별 도리가 없는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입장이어서 잠자코 듣고는 있었지만, 그분의 이런 견해가 부모의 입장만을 존중하는 것 같아 다소 고리타분하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마침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청년의 부모를 포함한 몇 몇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그 아들의 어머니가 차 안에 오르자마자 내게 아들의 여자친구를 만나본 적이 있냐며 그녀에 대한 인상이 어떠냐고 물었다.
이미 이 점에 대하여서는 단단히 주의를 들은 적이 있는 나는, 그냥 인사만 나누었을 뿐이라며 말을 아꼈다. 그러면서 그 어머니에게 아들의 여자친구를 만나본 적이 있느냐고 되돌려 물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자기도 아들이 군대에 입대하는 날 한번 봤는데, 왠지 얼굴이 어둡고 몸이 약해 보여 마음에 안 든다고 하였다.
이런 말이 나오자 옆에 있던 교사로 있는 노처녀 선생님들이 웃음을 터트리며, 아니 벌써부터 그렇게 까다로우면 어떻게 하냐며 가볍게 한마디씩 했다. 그러자 즉각적으로 그 어머니 입에서 “자식을 안 낳고 안 길러 본 사람은 몰라요!” 라며 말을 뚝 자르는 것이 아니가!
나는 그 순간 철렁했다. 평상시에 수더분해 보이던 그 어머니로부터 그토록 가차 없는 말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는데, 실제로 그런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 부인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다. 어렵고 힘들던 시절에 오로지 아들 하나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 이를 악물고 살아나왔으니, 그녀에게 있어 아들은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입장에서 다른 사람들이 너무하니 뭐하니 하는 말을 여간해서는 허용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썰렁해진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나는 우선 숨을 고르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를 거듭했다. 어떻게든 그 어머니를 슬며시 눌러주고 무안해진 나머지 노여움을 품었을 다른 사람들을 돋워주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듣고 인상 깊었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시골의 해안 마을에는 어부들이 풍랑을 만나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과부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면 남편을 잃은 과부들은 아들을 자식 겸 남편 삼아 집착하게 되는데, 이런 집착은 어찌나 강한지 아무도 말릴 수가 없다고 한다. 별 다른 일이 없는 대개의 경우 아들도 어부가 되는데, 어느 과부의 아들도 장성해 결혼을 한 다음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기잡이를 떠났다고 한다. 그런데 어부들이 멀리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돌아올 때는, 특히 고기를 많이 잡아 만선이 되어 돌아올 때에는 저 멀리서부터 꽹과리나 북을 요란하게 쳐댄단다. 그러면 여자들은 자기네 배에서 나는 소리인줄 기가 막히게 식별하고는 맨발로 뛰어나가 열렬하게 환대하며 배를 맞이한단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네 배가 만선이 되어가지고 들어오는 신호음이 저 멀리서 들리더란다. 그러자 방에 있던 어머니가 후닥닥 일어나 방문을 열고 뛰쳐나가려는데, 어느새 며느리의 방문이 와다닥 먼저 열리더라는 것이다. 그 순간 그 어머니는 문고리를 안으로 잡아당기며 이를 악물고 혼자 씨름을 했다는 것이다. 귀환하는 아들에게 첫 자리를 이제는 자기가 아니라 기꺼이 며느리에게 넘기기 위해 그 어머니는 그렇게 문고리를 잡고 자기와 싸웠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며느리와 사이좋게 지내는 시어머니 노릇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나는 슬쩍 덧붙였다.
그랬더니 그 부인은 아무소리 안 하고 내 말을 귀담아 듣는 듯 했다. 나 역시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이런 이야기가 있은 후 이틀에 걸친 여행에서 그 어머니는 간간이 ‘문고리’ 라는 표현을 몇 번 입에 올렸다. 바닷가에 사는 그 과부가 문고리를 붙들고 자기 자신과 힘들게 씨름했다는 이야기를 새겨들은 듯했고, 또 그것으로부터 많은 것을 생각을 하는 듯 했다.
그렇다. 우리가 불필요한 잡음을 내지 않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자제가 요구된다. 그런데 하늘도 못 말린다고 하는 몇몇 범주의 것들에 대해서는 누가 뭐라고 지적한다고 해서 고쳐지거나 절제되는 것이 아니지 싶다. 특히 그러한 것들은 다름 아닌 스스로가 깨우쳐야 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측근에서 조심하지 않고 너풀너풀 말하다가는 된통 쏘이게 마련이다. 별 생각 없이 좋은 마음으로 견해를 피력하다 호되게 쏘였을 경우, 상호 얼마나 껄끄러워지겠는가.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나는 말이라는 것이 참으로 위험하고도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앞뒤 재보지 않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하다가는 봉변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번의 경우에도 사전에 그렇게 주의를 듣지 않았더라면, 그 어머니에게 한마디 들었을 것이 뻔하다. 설사 그녀가 겉으로는 내게 아무 말을 안 했을지라도 속으로는 나를 얼마나 마땅찮게 여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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