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이 성립되기 위한 전제들
첫 번째,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 즉 실재(實在)를 가정할 수 있어야 한다. 칠판의 분필은 현실에 존재한다. 하지만 사랑, 우정, 증오, 행복이라는 것은 실재가 아닌 허구, 즉 개념인 것이다. 현실에 실재하는 것을 실존물(entity)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만든 개념을 구성개념(construct)이라고 한다. 존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과 연관된 실존물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어떤 상태에 있을 때 실재적 현상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허기진다는 것은, 허기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배가 꼬르륵 하는 소리가 존재할 뿐이며, 슬픔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눈물이 존재하는 것이며, 분노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르 떠는 떨림이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연구할 수 있는가? 과학의 탐구 대상은 실재하는 것들이다.
두 번째, 현상들 간에 질서가 존재하며, 그 질서는 항상(恒常)적이어야 한다. 항상적이라는 말은 꾸준히 유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A와 B라는 현상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우리는 이 관계에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혹은 연관성이 있어도 무질서하며, 아주 우연하다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물리학은 물리현상들 간의 관계에 대한 법칙인데,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런 현상이 실재해야 하며, 그 관계에는 질서가 있어야 하며, 그 질서는 예전의 질서와 오늘의 질서가 달라지지 않아야, 어떤 법칙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 현상들 간의 질서는 인과(因果)적이어야 한다. 홀로 발생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이 변하는 데에는, 다른 것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조건이나 다른 현상들의 원인이 있어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새로운 현상을 발견했다고 한다면, 그 현상만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이 왜 발생했는지, 무엇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인과적 관계에서 이런 현상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을 인과율, 혹은 인과원리의 법칙이라고 한다.
네 번째, 현상에 관한 지식은 직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험적 관찰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석가가 어떤 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철저하게 경험에 의해서 지식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은 경험주의적 방법을 채택하는 것이다. 직관이 아닌, 체험과 경험에 의해서 지식을 얻는 것이다. 어떤 현상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가서 만져보고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부분 현상이 전체현상을 대표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과학에 있어서 추론은 불가피한 것이라는 것이다. 과학은 경험주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과연 어디까지 경험을 해야 하는가? 경험이란 것은 끝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 전체를 경험할 수는 없기 때문에, 결국 부분을 경험하고, 나머지는 경험을 토대로 추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지각능력과 인식능력을 신뢰한다. 어제 봤는데 네모였는데, 오늘 봤더니 세모로 보였다면, 신뢰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기본적 능력을 신뢰하는 것이다.
현상이 실재하고, 실재하는 현상들 사이에 질서가 있으며, 질서는 항상성이 있고, 그 내용은 인과적이며, 현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경험에 의해 이루어지며,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부분을 통하여 전체를 추론하며, 경험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기본적 능력을 신뢰를 한다는 것이 과학의 전제(가정)인 것이다. 이런 것을 받아들이면 과학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런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과학은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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