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mission/상담이야기

[스크랩] 고(苦)와 비(悲)

반찬이 2009. 1. 9. 20:48


 



고(苦)와 비(悲)


다음은 중국 작가 다이호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라는 소설에 나오는 한 부분이다.

 

“아우야! 우리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나란히 걸식을 하면서 자랐다. 그 해 겨울 굶주리다 못해 나란히 손잡고 강물 속으로 들어갔었지. 우리는 천천히 강 한가운데로 들어갔었지. 내가 앞서고 너는 뒤에서 따랐지. 물이 내 배 네 가슴까지 찼을 때 너는 멈춰 서서 울며 외쳤다. “형, 죽지 말자! 이 물이 너무 차….” 우리는 다시 손을 잡고 되돌아 나왔지. 네가 앞서고 내가 뒤따랐어. 우리는 몸을 팔았지. 몸을 팔아 다른 집의 ‘아들’이 되었지. 너는 ‘숙부’, 나는 ‘조카’가 된 거야. 해방을 맞아서 다시 형제간이 되었어. 너는 간부가 되었다. 그런데 결국은 다시 강에 몸을 던지다니, 넌 물이 차갑지 않더냐? 왜 나한테 한 마디 말도 없었어?“

 

휴머니즘의 한 기수인 고독한 사나이인 그는 무(無)에서 시작해 무(無)에서 끝났다고 여기는 인생의 한 시점에서, 그가 사랑했던 아버지와 연인의 흔적이 배어 있는 담뱃대를 만지며 지난날 아버지가 물에 뛰어들어 죽은 숙부의 시체를 붙들고 울부짖고 있는 것을 회상하는 장면이다. 공산당 치하에서 숙부는 농민을 위해 바른말을 하다가 억울한 모함에 빠져 규탄을 받고 호송 도중 손을 뒤로 묶인 채 갑자기 미친 듯이 강으로 뛰어들어 죽었던 것이다.

 

나는 이 구절을 읽다가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고 어깨를 들먹였다.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나를 서글프게 만들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것은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뜨거운 연민의 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해본다. 힘들게 고생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세상을 인고하며 살아왔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존중받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가슴속에서 뜨겁게 물결쳤다.

 

주위를 둘러보면 참으로 많은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죽을 끓일 때 냄비 안에서 기포가 툭툭 터지듯이 우리의 삶도 본래 그렇게 끊임없는 문제의 연속으로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그런 인간의 고(苦)를 받아들이면서 그 속에서 ‘자기’의 근원을 되찾아간다는 의미일 터인데….

 

인간이 그 스스로를 만족스러운 존재로 만들어간다는 것이 결코 용이한 일은 아닌 듯하다. 아직 보호와 지지를 받아야 할 처지에 부모를 잃는다든가, 궁핍하여 친구들 사이에서 주눅이 들어 그늘질 수밖에 없다든가, 진학을 못해 열등감에 시달린다든가,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는 직업을 갖지 못하여 느끼게 되는 위축감이라든가, 서로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주위 상황 때문에 결혼하지 못하는 아픔이라든가, 심신이 건강하지 못한 자녀나 배우자를 둔 아픔이라든가, 또는 건강을 잃는다거나 하는 수많은 애환들이 우리의 주변에 널려 있다.

 

어디 그뿐인가! 예기치 않게 당하는 갖가지 불행 앞에서 희망을 잃는 삶의 형태가 있는가 하면, 멀쩡히 두 눈 뜨고 이런저런 치욕감을 삼켜내야 하는 서러운 인생들도 많다.

 

그렇다고 산다는 것이 오로지 마음 아픈 일들로만 점철되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문제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하나 풀어갈 때마다 반짝이는 성취감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일에 있어서의 자그마한 성공이 순간순간을 수놓아 그나마 우리를 견디게 할 뿐 아니라 희망을 갖게 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가. 그 덕에 한 세상 그렇게 그렇게 사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나 자신의 경우에도 은근히 즐기는 것들이 꽤 많다. 혼자 흥얼흥얼 차 안에서 노래를 부르다 때로는 목청을 돋워 보기도 하고, 외출할 때 귀고리를 달아 한껏 멋을 부리기도 하고, 마음 통하는 이와 담소하기 위해 불원천리 길을 달려가기도 하고, 강의를 하다 도취되어 정신없이 열을 올리기도 한다.

 

곰곰이 살펴보면 이런 것들이 양념처럼 우리의 생활에 배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삶이 가져다주는 고달픔의 무게를 능가하겠는가!

 

중요한 것은 자잘한 개개의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전체를 얼마만큼 본질에 가까이 직시하며 끌어안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직시와 포용에 있어서 그렇게 외롭지만은 않다는 느낌 즉, 힘든 여정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선상에 있는 자가 사실은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그나마 위로가 된다.

 

본래 생(生)이란 명(明)에서 비뚤어진 무명(無明)에서부터 비롯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고(苦)라고 갈파하신 부처님의 말씀도 때때로 넉넉한 위안이 된다.

 

이런저런 환상을 좇아 정신없이 달려가다 걸림돌에 넘어져 좌초될 때 문득 ‘그래서 본래 산다는 것이 고통이라고 하지 않았더냐.’라는 말을 되뇌면, 집착하던 마음이 그대로 놓이는 듯 차분함이 스며든다. 그러면 모든 것이 그냥 그대로 말그럼해지며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면 그 순간 나와 너를 구별 짓는 경계를 넘어서 전체인 하나로 체험된다. 이렇게 하여 다시 심신은 추슬러지고 나와 네가 함께 존재하는 ‘우리’라는 관계 속에 다시금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렇게 산다는 것이 각자의 여정이라고 납득하고 나면 생명을 지닌 모든 것을 사랑하는 일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지 싶다. 때때로 가만히 세상을 들여다보면,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우리 모두가 얼마나 안쓰러운지 모른다. 더구나 수많은 좌절을 겪어온 노인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뭐라고 형용키 어려운 삶의 무게가 배어나오는 듯해 가슴이 뭉클하게 저려올 때가 있다.

 

책을 읽다가 어깨를 들먹일 정도로 울음을 터뜨린 것이 나도 모르게 자신의 어떤 아픔을 반영하는 것일는지 모르지만, 왠지 꼭 그렇게만 귀인 시키고 싶지가 않다.

 

다소 거창하게 미화시키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산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생명에 대해 지니고 있는 깊숙한 곳의 비심(悲心)을 일깨워 온전한 하나 속에서 빛을 이루어 가도록 하기 위함은 아닐는지!



paganini-variation-mose
//

출처 : 가톨릭대 상담심리 대학원 원우회
글쓴이 : 장성숙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