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아래의 글은 금번 상담심리학회 12월 사례발표에 대한 장성숙교수님의 코멘트에 대해 성균관대 분회장
선생님께서 쓰신 -견해 차이가 포함된- 글입니다..솔직히 이 글을 이곳 게시판에 올려도 될지 심히 걱정스럽지만, 상담사례에 대한 전문가선생님들의 다양한 입장과 시선의 차이를 접해보는 것도 상담학도에게 '참고'가 되지 않을까 싶어 용기를 내었습니다..그리고 학회사례 때마다 명쾌한 글로써 제자들을 일깨워주시고, 변함없는 관심을 보여주신 교수님께 이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참고로 장성숙교수님의 12월 사례발표에 대한 글은 '교수님 사랑방'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원문을 보면 두 선생님의 의견 표현이 대단히 혼재되어 있는 관계로 일단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저는 장성숙교수님의 글(또는 의견)엔 글자를 굵게하면서 밑줄을 그었고, 오진미선생님의 글엔 오렌지색 글자배경을 넣었습니다..이런 차이를 생각하며 읽으면 내용이 한결 쉽게 눈에 들어옵니다.)
장성숙 교수의 12월 상담사례 논평에 대한 논의
성균관대학교 분회장 오진미
상담심리학회 월례 사례발표에 대한 회원들의 적극적인 관심으로 본 학회 사례발표회가 더욱 의미 있는 것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 장성숙 선생님의 12월 사례 논평이 본 학회 홍보게시판에 게재된 것과 관련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번 12월 사례발표 분회의 분회장으로서 두 가지 의견을 개진하고자 한다.
I. 하나는 학회 홍보게시판에 사례토론 내용을 게재한데 대한 문제이다.
다음은 논평자가 학회장에게 공개 질의한 내용 중 일부이다.
“1. 공개발표회와 공개토론회를 거친 사례는 이미 공공성을 지니는 것으로 그것에 대한 논평 역시 공개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닌가? 2. 이미 공개발표 한 내용에 기초한 논평을 회원게시판에 올리든 홍보게시판에 올리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 아닌가? ”
본 학회의 사례발표 및 토론회는 여타 학회의 논문 발표 및 토론회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회원은 없을 것이다. 해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사례위원회에서는 “학회원 이외의 사람들이 학회 사례를 소지할 수 없다”는 규정, “사례 배포 및 관리 지침” 등의 사례 관련 윤리 기준을 분회에 공지한다. 그러므로 사례토론 내용 관리도 사례관리 윤리 기준에 준해서 지켜져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 학회의 사례발표 및 토론회는 기본적으로 대내적인 활동이다. 그러므로 대내적인 것을 대외적인 것으로 회원 각자가 자기 마음대로 발표하는 것은 본학회 학회원은 물론 모든 전문직 종사자가 지니고 있어야 할 직업윤리를 위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만약 자신이 꼭 발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면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 안에서 일정한 절차를 거쳐야 당연하다. 이번 경우는 그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개인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빗발친(?) 요청으로” 발표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조직의 일원으로서의 개인적인 활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II. 두 번째는 이러한 형식적인 문제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이다.
이번 문제의 보다 심각한 쟁점은 논평자의 상담 사례에 대한 논평이 상담에 대한 많은 왜곡과 편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핵심은 발표 여부의 절차상의 문제라기보다 논평이 가지고 있는 “상담 이해에 관한 문제”에 초점이 있다. 논평자의 논평이 담고 있는 상담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낯설다. 낯설게 느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1. 게시내용 1에서 논평자는 ‘열악한 평가를 받은 내담자’에게는‘아주 낮은 단계의 상담목표와 그런 목표를 달성하기에 적합한 상담접근을 채택해야’하고, ‘하나하나 코치해주는 식의 접근을 펼쳐 내담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상담을 할 때 비로소 더 이상의 악화나 붕괴를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지적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① 상담자가 내담자를 만났을 때 상담자가 내담자를 ‘파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그 파악내용을 통해 내담자를 ‘열악’하다고 규정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월’한 내담자도 있나?
② 상담목표는 언제나 점진적이고 발견적으로 설정되는 것(heuristic)이다. '하나하나 코치해주는 것‘이 방법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행동을 강제하는 훈련(discipline)일 수는 있어도 마음을 다스리는 일(counselling)은 아니지 않나?
③ '더 이상의 악화나 붕괴‘라는 표현도 어떤 규범적인 전제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인데, 이는 어떤 삶의 모습이 그 내담자에게 좋은 것인지를 기계적으로 강요하는 결과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상담은 그것 자체가 긴 과정이다.
2. 게시내용 2에서 논평자는 상담자가 내담자의 상담계기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는 것을 질책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일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 내담자의 전반적인 분노를 다루지 않으면 접근이 불가능할 것이다. 이를 ‘방만한 접근’이라든지 ‘그렇게 하다가는 정말이지 밑도 끝도 없는 상담이 되기 일쑤’라고 판단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도대체 논평자가 주장하는 ‘끝이 있는’ 상담이란 어떤 것인가?
3. 게시내용 3에서 논평자는 ‘과거의 상처보다 자신감 증진에 역점을 둘 필요가 있다’고 말하면서 ‘취약한 내담자를 대상으로 하는 단기상담을 할 때는 당장 필요한 현재의 문제를 다루어야지 과거의 상처를 다루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①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자신감 증진은 불가분리적이다. 과거와 현재를 단절하지 않고 연결하는 접근은 인성을 이해하고, 문제를 치유하는 데서 당연한 일이다.
② '현재의 생활이 제대로 안 되니까 과거의 상처에 집착한다는 견해를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지적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에서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면 과거의 상처를 덮어두는 것이 사람들의 정황이다’라고 한 단정적인 발언의 근거는 실증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단순하게 ‘왕년에 상처를 겪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하는 선언적인 발언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③ 이 상담자의 접근이 결코 현재를 간과하고 있지 않다.
4. 게시내용 4에서 논평자는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공감을 표시하는 일에 대단한 염려를 표현하고 있다. 상담자의 공감이 내담자로 하여금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염려를 유념하지 않는 상담자는 이미 상담자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지적은 논평자가 상담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하게 한다.
① 논평자는 구체적인 사실을 탐색하여 내담자가 지닌 ‘모성애에 대해서는 공감’해주되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어머니가 되기 위해 하루 빨리 당당하게 서는 것이 중요하다며 그 죄책감을 성장을 위한 동력으로 활용하는 전략도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일을 위해 공감은 왜 위험한 것으로 괄호 안에 닫아두어야 하는 것일까? 논평자가 지적했듯이 단기 상담에서 이러한 규범적인 선언만으로 상담이 현실화될 수 있을까?
② 죄책감을 성장을 위한 동력으로 활용한다는 것은 결국 죄의식을 강화하여 그 암울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위험은 없을까? 마치 공감이 독이 될 수 있다고 논평자가 지적했듯이.
5. 게시내용 5에서 논평자는 내담자의 상담흥미의 감소를 지적하고 있다. ‘초기의 만족감이 급격하게 줄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를 ‘세상의 때가 묻어 있는 내담자’와 ‘상담자의 순진한 태도’에 초점을 두어 설명하고 있다. 내담자와 상담자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상담자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비전문가의 발언일 뿐이다. 어떤 상담자도 내담자를 ‘때가 묻은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으며, 어떤 내담자도 상담자의 ‘순진한 태도’에 실망하지 않는다. 상담은 상호간의 신뢰를 우선적으로 구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① 도대체 상담에서 ‘원론적인 이야기’와 ‘실질적인 도움’이라는 것을 어떻게 그렇게 범주화할 수 있는 것일까?
② 아울러 ‘온정적인 것’과 ‘원론적인 것’은 무엇이 어떻게 다르고, 무엇이 문제인가? 전자는 태도이고 후자는 방법론적인 지식을 지적하는 것이라면 토론자는 범주론적 혼란에 처해있는 것은 아닌가?
6. 결론에서 논평자는 이번 경우, 상담자는 상담자의 자격이 전혀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유는 ① 내담자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② 내담자의 상태에 맞는 처치를 하지 않았다. ③ 너무 순진하고 비현실적이다. 라고 하였다.
(1) ①항과 ②항에 대해서는 그러한 이견을 제시할 수 있다. 다른 방법의 상담을, 다른 이념의 상담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라도 실증적인 사례를 들어 자신의 주장을 제시해야 한다.
(2) ③항은 상담자에 대한 인격적인 발언이다. 삼가야 할 일이라고 판단된다.
7. 결론에서 논평자는 ‘내담자에게 필요한 구체적인 것’을 나열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내담자에게 필요한 것은 상담이 아니라 사회복지적인 도움이다.
① 상담이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인간을 위한 많은 도움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사회복지사가 할 수 있는 일, 행정적인 지원체계에서 할 수 있는 일, 심지어 경찰과 법원에서 할 수 있는 일들과 더불어 담당해야 하는 일이다. 이번의 사례는 상담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임으로 사회복지사가 할 일을 상담사가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함께 유기적으로 협조할 수는 있지만.
② '구체적인 방안‘보다 ’심리적 이완‘을 기한 이번 사례가 ’내담자에게 너무 고급스럽다‘는 그 ’고급스럽다‘는 표현도 더 학문적으로 다듬어 전달되었으면 한다.
8. 앞으로는 학회에서 게시판과 관련한 확실한 입장과 원칙을 마련하여, 게시판이 그 성격에 맞게 학회원의 권익을 대변할 수 있도록 운영되도록 조치를 취한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다. 이번 일을 통해서 대내적인 행사인 사례발표가 더 활성화되기 바라고 우리 회원 모두가 책임 있는 주체로 성숙한 판단을 할 수 있기 바라며 이론적 탐구와 임상적인 실천에서 보다 더 깊은 연구와 천착이 이루어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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