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 대상들
(R. D. Hinshelwood)
내적 대상에 대한 증거는 무엇인가? 우리가 2장에서 보았던 대로 자기 혹은 몸 안에 신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대상들에 대한 특별한 경험은 아주 초기 발달 시기의, 외적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진, 실로 의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정신 기능으로부터 생겨나는 아주 원초적 경험이다. 무의식의 경험, 그것은 역설처럼 생각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프로이드 이후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그러나 3장에서 우리는 유사한 역설―무의식적 환상은 구분하기 어려운 신체적ㆍ생물학적 기능과 아주 밀접한 심리 단계라는 것―을 고찰하였다. 나는 ‘무의식의 경험’이라는 역설로 들어갈 수 없다. 단지 그것이 실제적으로 정신분석 이론과 실제에서 얼마나 유용한가, 그리고 그 경험에 대한 환자의 통찰력의 출현이 궁극적으로 치유 능력이라는 것을 진술할 수 있을 뿐이다. 대체로 내적 대상들은 의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그러한 원초적 경험의 하나이다. 그들은 무의식적 환상의 내용이다.
1934년 클라인의 우울적 자리에 관한 진술에 이어서, 내적 대상의 개념은 다음 10년 동안 영국 정신분석협회를 매혹시키고 그리고 당혹스럽게 했다. 그러나 내적대상들은 이전에 이미 칼 아브라함이 자신의 정신병 환자에 관한 논의(2장을 보라)에서 기술하였고, 그리고 그때 ‘정상인’에게까지 확장되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환자들이 대상들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그들을 몰아내는 내적세계, 혹은 내적 공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장의 사례들은 어떻게 내적 대상들이 정체성을 제공해 주는 과정에 깊이 관련되어 있는가, 혹은 어떻게 개인 인격의 정체성 안에 깊이 갈라진 틈을 창조하는가를 보여줄 것이다. 이렇게 정체성은 대상들의 내면화와 깊이 관련되어 있고, 그리고 내적 환상 속에서 그들을 향한 적대감과 내면화된 대상으로부터 생겨난 소외 혹은 내적대상과의 융합정도와 깊은 관계가 있다. ‘내사’라는 용어는 심리과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환자 정신 안의 무의식적 환상―실제로 그것은 계속 작용한다―,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주체의 경험(그것을 ‘내면화하기’ 혹은, 때때로, ‘통합하기’)과 관련된다.
처음 두 사례는 우울증을 가진 어른 환자의 사례이다. 그들은 자신 안에, 몸 안에 무엇이 있다고 하는 느낌(혼란스러운)을 가지고 있었다. 정신분석 작업을 통해서 무의식적 의미―그리고 우울증 밑에 있는 환상―가 드러날 수 있었다.
먼저 우리는 부인을 사별한 아브라함의 환자의 꿈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아브라함은 나란히 놓여 있는 자료―도살하는 것으로서의 먹기와 회복하는 것으로서의 먹기―가 서로 연결된 것으로 이해했다. 당신은 환자의 죽은 부인에 관한 상이한 생각이 ―해부실, 그리고 정육점에서― 그녀를 죽이는 것, 혹은 그 자신 안에 그녀를 융합함으로써 그의 부인을 회복시키는 것에 관한 두 개의 구강기 환상을 의미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다음의 사례에서 여러 가지 고통에 관한 신체적인 증상들이 면담중 환자의 자유연상을 통해서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향한 강한 의심의 감정으로 변동되었다. 그러한 몸에서의 변동은 마찬가지로 둘 사이의 동등성에 대한 암시적인 증거이다. 신체적․육체적 고통들은 무의식 수준에서 외부 사람에 대한 편집공포와 관련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생각에, 외부 세계에서 위협하는 사람은 그의 내적 대상들, 병에 걸린 그의 기관들과 관련된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사례: 내면의 작은 사람들
클라인이 묘사한 다음의 환자는 강한 편집적, 우울적 감정, 그리고 우울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 환자, Y는 변하기 시작했다.
힘든 분석 작업 후에 불신과 의심이 사라졌다. 다른 사람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편집적 비난, 불평과 비평 밑에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아주 깊은 사랑 그리고 그의 부모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동시에 슬픔과 심한 우울증이 한층 더 전면에 나타났다. 이 단계 동안 우울적 불평들이 변했다. 예를 들면, 그 환자는 다른 신체적 고통을 호소했다.
이중의 변화에 주목하시오―외부사람을 향한 의심이 줄어들었고, 한편 그가 자신 안에 무엇이 있다고 하는 특별한 느낌을 말했다. 동시에 그의 주된 감정이 변화했고 관심과 책임감이 증가했다.
…그리고 그때 그가 가지고 있던 약이 무슨 약인지 계속 말했다―그는 그 약이 자신의 가슴, 목, 코, 귀, 그리고 그의 내부 등에 소용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자신의 몸과 기관의 부분들을 돌보는 것처럼 들렸다. 그는 그가 가르치고 있는(그는 선생이다) 어떤 어린 학생에 대한 그의 관심에 관해 말했고, 그러고 나서 자신의 가족에 대해 걱정했다.
독자인 우리는 이 관심의 태도―관심을 가지고 외적 대상과 관계하는 외적 대상들에 반영된 그의 내적 대상들(그의 기관)에 대한 관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의미는 그들이 그의 내부에 있다는 것 이외에, 그가 실제의 사람과 관계하는 것처럼 내적 기관과 관계하는 것이다. 이 내적 대상들, 그의 기관들은 단지 그의 기관들이지만, 그러나 그는 마치 무의식적 환상 속에서 실제로 돌보아 주는 사람인 것처럼 경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내적 대상과 외부사람들은 그의 자유연상 안에서 가까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하는 유사한 활동에 의해, 그리고 특별히 그들에 대한 그의 감정(관심)의 유사성에 의해 강하게 연결된다.
그가 치유하고자 하는 다른 기관들은 그가 죄책을 느꼈고 지속적으로 살아 있음을 유지하게 했던, 자신의 내면화된 형제와 누이들과 동일시되어 있다는 것이 아주 분명해졌다.
내적 대상으로서 ‘타자’에 대한 느낌은 그가 사랑하는 외적대상들―그의 가족―과의 연결을 통해서 강하게 전달된다. 이 상응―외적대상과 내적대상의―은 이 사례에서 매우 구체적이다. 그의 안에 있는 ‘작은 사람’같은 내적대상들은(그의 몸의 기관과 부분들) 마찬가지로 신체적으로 아픈 자신의 가족을 돌보았다. 이 경험은 의식적인 경험이 아니다. 실로 그것은 의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것은 내적기관과 외부사람 사이의 변동에 의해서 오직 몸으로 간접적으로 표현된다. 아브라함의 연구로부터 나아간 이러한 종류의 되풀이되는 견해는 작은 내적사람과 같은 대상들이 거주하는 내적인 무의식적 환상의 세계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
실제로 인격 안에 살아 있는 대상의 경험을 가지는 것은 항상 의식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일상의 숙어(표현)로서 배의 불안 상태를 표현하는 초조함에 대하여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안―그 초조함은 배의 실제적이고 육체적인 느낌에 대한 해석이다―은 내적 대상관계로 표현된다. 외부 세계에서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사람과 만나는 것(시험 혹은 취업 면접)은 경험을 형성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배를 점유한 실제 대상으로 개념화된 육체적 반응 형태를 가져온다. 사람들이 실제로 병에 걸리고 손상된 몸의 부분에 대한 어떤 의식적 관심과 돌보는 관계를 가지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멍이 들고 상처를 입었을 때, ‘가엾은 나’라고 하기보다는 ‘가엾은 내 발’이라고 말할 것이다. 비록 두 표현 모두 돌봄이라는 차원에서 다를 바가 없지만, 또한 어떤 누군가는―분노해서 자신의 이를 입에서 뽑아 버리라고 요구할 정도의 극심한 치통으로 고통을 겪을지도 모른다. 이 평범한 사례들은 신체적 상태와 정서 상태가 무의식적 환상을 통해서 내적 대상과의 관계로 연결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다음 임상 사례(환자 X의 사례)에서 소외된 존재인 내적 대상들이 환자의 자유연상에 의한 의식적인 자료 안에 명백하게 나타난다. 환자는 살아 있는 실제가 회충의 형태로 그의 몸안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는 그의 기관들을 신체증상(건강염려증)으로 경험한다. 그러나 다시 보면 실제적인 신체장애는 없다. 그의 믿음은 자신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지배적인 측면일 뿐이다. 앞의 사례에서 언급한 환자(환자 Y)는 그의 좋은 내적대상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X에게는 그 대상들이 혼합―어떤 대상은 사랑하는 좋은 대상이고, 어떤 대상은 두렵고, 밉고, 그리고 나쁜 대상이다―되어 있다. 실제로 그는 이미 오래전 어린시절에 의학적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그 혼란(회충)에 관한 어린시절의 불안은 성인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그 이유에 대해 클라인은 다음과 같이 진술할 것이다: 근원적인 신체의 문제는 무의식적 환상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 결과 문제는 그 때 환자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현실로 통할 수 있었던, 환상의 의식적 표현수단으로 지속되었다.
사례: 벌레의 공격을 받는 자
다른 우울증 환자 X에게서 클라인은 구체적인 내적 대상에 관한 중요성을 상세하게 논증하였다:
나는 이 환자가 분석하는 동안 기억해 냈던 것에 대해 말할 것이다. 그는 약 10세 때에 자신의 위 속에 그를 조종하고 그에게 명령하는 작은 사람이 있다고 분명하게 느꼈는데, 환자는 그 명령들이 사악하고 잘못된 것일지라도 항상 수행해야만 했다(그는 자신의 실제 아버지의 요구에 대해서도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이는 촌충―비록 실제로 그가 결코 그것들을 본적이 없음에도―이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그의 어린 시절 위 속에 있는 나쁜 사람 환상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 사례에서 내적 대상의 경험은 그의 어린 시절의 기억속에서 분명히 표현되었다. 벌레들은 그가 나쁘다고 느끼는 자신 안에 있는 어떤 것에 관한 대체된 표현 형태인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우리는 그것을, 그가 실제 아버지에 관해 느꼈던 감정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내적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그는 촌충이 그의 몸을 먹으면서 뚫고 들어오는 환상을 보고했다; 거기에 덧붙여서 그러한 환상을 가질 때 마다 그는 암에 대한 강한 두려움이 나타났음이 밝혀졌다. 암 역시 악의 있는(나쁜) 대상으로 그 자신 안에서 경험되었고, 이 연결―그를 공격하고 먹어 없애는 대상들인 촌충과 암 사이―은 암이 내적 대상에 대한 그의 경험을 표현하는 X의 3번째 절박한 형태임을 설명해준다. 환자가 자신 안에 있다고 느끼는 사악한 대상들에 의해 점령당한 이 무서운 내적 상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클라인은 이 환상들에 대한 분석가의 도움을 보충하는 환자의 시도를 기술했다.
우울증과 박해불안으로 고통 당했던 환자는 나를 매우 의심했다. 다른 것들 가운데 내가 그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동맹을 맺고 있다고 의심했다. 이때에 그는 탐정이 적의를 가지고 박해하는 사람을 체포하고 그를 감옥에 가두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 탐정은 믿을 수 없음이 드러났고, 적의 협력자가 되었다.
우리는 지금 환자의 외적 대상인 분석가가 어떻게 그러한 ‘나쁜’ 내적 대상들과 (벌레들, 작은 사람 혹은 암) 연결되거나 혹은 관련되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또 다시 외부 사람과 내적 대상들 사이에 상응이 있다. 그러나 또한 어쩔 줄 모르는 환자의 절망적인 불안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제시된다. 나쁜 사람과 맞서 도우려는 탐정과 마찬가지로 도우려는 분석가 사이에 중요한 연결이 있다. 정신분석가인 그녀는 말하자면 위험한 내적 악인에 맞서 도와야 한다. 그러나 그때 그의 고통에 맞서 돕는 자인 그녀는 전적으로 신뢰받을 수 없고, 타자들과 함께 나쁜 적으로 쉽게 변하는 것 같다.
탐정은 나 자신을 상징했고 그리고 모든 불안은 내면화되었고 또한 촌충 환상과 관련된다. 적이 갇힌 감옥은 자신의 몸 안―실제로 박해자들이 갇혀 있는 그의 내면의 특정한 부분― 이었다.
꿈이 적들이 감옥에 갇혔음을 가리켰을 때, 클라인은 이것이 내면화 과정에 대한 환자의 인식이었다고 믿는다. 그것은 다소 잘못된 해결 형태의 절망적 시도이다.
위험한 촌충(그의 연상의 하나는 촌충이 양성이다)은 그에 대해 적대적인 동맹 관계(실제로 성교)에 있는 부모를 나타낸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것이 우리가 위에서 외디푸스 콤플렉스(4장을 보라)에 관하여 논의했던 중요한 이유이다; 내적 대상에 관한 그의 환상의 구강기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구강기 형태이다. 그리고 이 첨부된 자료는 환자가 어려움에 처하게 된 이유에 대한 어떤 암시를 제공한다. 그의 부모는 내면화되었다. 그러나 외디푸스 성향의 강한 공격성과 위협에 머물러 있다; 이 사례에서 부모들은 프로이드의 설명에서 초자아로 내면화되는 비성화(非性化)된 부모와는 달리 여전히 성적이다. 그러나 내적으로 그들이 조종되어야 하는 내부에서는 그들은 여전히 위험으로 남는다.
결합된 아버지와 어머니는 환자를 배제시킨다―그는 그들을 분명하게 자신 안에 가지고 있을 때조차 그렇다고 느낀다. 하나로 결합(양성으로 나타나는)된 대상은 클라인의 ‘결합된 부모상’(아래를 보라)의 개념을 말한다. 그것은 서로 관계 안에 있는 분리된 부모에 관한, 보다 더 성숙한 개념과 다르다. 결합된 부모상은 아주 초기 외디푸스 콤플렉스 단계의 특징으로 간주된다(11장, 12장을 보라). 그리고 이는 보다 후기의 더 성숙한 형태에 대한 프로이드의 진술과 현저히 다르다. 그것은 배제시키고 배타적인 성교이기 때문에 외디푸스 환상이 필사적이 되고 폭력적인 상으로 채색된다. 이 원시적 차원에서 결합된 부모상이 내면화되기 때문에, 그것은 조종당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한 내적 상황을 창조한다.
촌충-환상을 분석하고 있던 그 때에, 환자는 피가 섞인(잘못 생각했음) 설사를 했다. 이것은 그를 매우 두렵게 했다; 그는 그것을 그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위험한 과정에 대한 확인으로 느꼈다. 이러한 느낌은 그가 독이 있는 배설물로 자신 안에 있는 결합된 나쁜 부모를 공격하는 환상에 근거한 것이다.
그의 설사에 대한 내적 위치와 그리고 그 증상에 대한 연상들은 결합된 부모에 관한 드라마를 보여주며, 그것에 대한 그의 난폭한 반응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환자의 내면에 무의식적으로 재배치되었음을 보여준다.
내면화
이 환자에게 있어서 일반적 발달 과정이 요구하는, 어린시절의 환상들과 공포들이 환화되지 못했다. 대신에 공격성, 손상된 대상들, 그리고 무서운 상황이 내면화되었다. 그리고 변하지 않고 내적 상황으로 남게 되었다[무서운 관계에 대한 유사한 하나의 해결이 다음 사례―자신의 엉덩이를 공격당하는 남자(66쪽을 보시오)―에서 제시될 것이다].
아주 난폭한 드라마는 처절한 것이므로 그는 실제로 설사에서 피를 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무섭고 위험한 드라마를 그 자신 안에 두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가; 사람들은 스스로 왜? 라고 질문한다. 나의 목적은 실제로 그러한 일반적인 왜-질문에 대답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거기에 있는 것을 좀더 서술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임상 자료는 실제 증거이다. 환자의 세계에서 내사는 의미를 가져야 한다. 즉 이유를 가진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 사례에서 비록 그 이유에 대해 아주 명백하지 않을지라도, 클라인은 그들을 가둠으로써 적들을 다루고자 시도하는 환자를 보여주는 자료를 제공한다. 그것은 그의 환상이다; 그는 만약 가둘 수 있는 감옥을 어딘가에서 발견한다면 어떻게든지 난폭성, 배제, 그리고 두려움을 조종할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이 환자에게 있어서 그가 발견할 수 있는 가둘 만한 유일한 공간은 자신의 몸 안인 것이다. 보다 현대적인 시각을 가진 정신분석가는 혹시 환자가 어린아이였을 때, 침범을 강요하는 아버지를 내사하는 방향으로 자극 받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할 것이다. 이와 비슷한 내사의 충동은 또한 “자신의 엉덩이를 공격당하는 남자”에서 보고된, 침범하는 아버지의 경우에서 발견될 것이다.
결합된 부모상
미움과 파괴성은 아주 초기 외디푸스 콤플렉스 환상 형태 같은 상을 구성한다. 클라인은 종종 그녀의 어린 환자들의 놀이에서 나타난 이러한 환상의 난폭성에 의해 깊은 인상과 영향을 받았다. 부모들은 여러 구멍―입과 같이(서로를 먹는)―을 통해 상호 활동을 하면서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고 가정된다. 그들이 결합되어 있고 환자를 배제시키기 때문에 전체 상황이 아주 무서운 종류의 공격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 결과 그 상들은 주체에 대해, 그러나 또한 서로에 대해, 셋 모두 압도하는 총체적인 재난 안에서 적대적이고 위협적이다. 그 상들은 아주 크고 유아의 자기 혹은 큰상들을 조종하는 유아의 능력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에, 공포가 강화된다. 이 초기 환상들은 초기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발생한다; 클라인은 성숙한 외디푸스 콤플렉스 형태에 관해 프로이드가 기술한 상세한 설명으로 그것들을 기술했다. 이 초기 환상들은 실제 부모와 그들의 실제 관계와 거리가 멀다. 그리고 관심과 돌봄에 의해 완화되지 않은 노골적인 적의를 나타낸다. 이것은 지각들이 신뢰할 만하지 않을 때 발생하고, 그리고 실제의 현실 세계와 사람들이 부분적으로 환상으로부터 형성될 때 발생한다. 유아가 실제로 ‘어떤 것’으로부터 버려짐을 막연하게 느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실제’ 부모들은 명확하게 지각되지 않는다. 클라인은 이 콤플렉스 환상들(아직 초기의)이 심리 발달 초기 단계의 복잡하고 풍부한 삶을 설명한다고 주장했다. 그것들은 외부와 내부 모두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믿는 것 사이에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나타낸다. 그것들의 상세한 내용은 각 개인에 있어서 독특하다.
내적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가지는 것은 우울증 환자만이 아니라 정신분열 환자도 역시, 비참한 내적 상황을 경험한다. 그들은 파편화 손상들 가져오는 박해적 내적 대상들과 투쟁한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좋은 내적 대상들을 갖지 못한 채 이 싸움을 한다(7장을 보라). 내가 지적했던 것처럼, 누구에게나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내적 대상에 대한 어떤 종류의 경험이 있다. 실제로 우리가 3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대상과의 관계에 대한 무의식적 환상은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기초를 이룬다. 이제 우리는 이 기초가 내적 대상 뿐 아니라 외적 대상과의 관계에 대한 무의식적 환상이라는 것을 덧붙여야만 한다.
대상의 내적 운명
그러므로 비록 사람이 성장함에 따라 무의식적 환상은 의식 밑 보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게 되지만, 내적 대상의 경험은 유아기를 넘어서 존속한다. 그것들은 성인의 삶의 사건에서, 혹은 성인 환자의 임상 자료에서는 발견하기가 더 어렵다. 그것들은 고도로 세련된 현실과 합리적 사고에 의해 덧씌워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게 지각된 외적 실제 대상에게 의미와 정서적인 책임을 제공하는 것은 바로 밑바닥에 있는 이 환상들이다. 그리고 내적 대상들이 이후 성인 삶의 평가 밑에 그리고 그 혹은 그녀의 활동 밑에 있는 의미 있는 부분이라는 분명한 증거가 성인 환자에게서 발견될 것이다.
폴라 하이만이 보고한 다음 사례에서 대상의 내면화는 또 다른 매우 이상한 사건의 상태로 이끈다. 이 사례는 지속적으로 적대적인 관계가 어떻게 환자의 타고난 성격 부분, 즉 실제로 그 내면이 되는가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은 클라인의 연구가 가져온 내사와 투사에 기초한 아브라함의 개념의 극적인 확장을 보여준다. 그것들 자신의 동기부여를 보여주는 대상들과의 그리고 대상들 사이의 전체적이고 극적이며 복합적인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인간 내면 세계를 보여준다.
사례: 자신의 엉덩이를 공격한 남자
이 사례에서 본래 환자와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박해 상황이 내적 영역―환자의 내면―으로 옮겨졌고 성인의 인격 구조 안에 남아 있게 되었다. 적대감은 그 자신의 엉덩이에 대한 난폭한(그리고 흥분한) 공격성 안에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그의 몸의 부분과의 구체적 관계로서, 도착된 성적 ‘행동화’의 기초를 형성했다.
표면적으로 그의 항문기-가학적 행동은 그가 정부와 가졌던 경험의 반복이었다. 그는 정부에게 잔인하고 친절했으며, 착취하고 관대했다. 그는 그녀와의 성교 상황에서 방귀뀌는 것을 즐겼다. 그것은 그에게 아주 중요했다. 그녀는 이것이 싫었지만 조용히 견디었다. 그는 매춘을 하러 가곤 했는데, 그것은 매질과 수음을 위해서 였다; 그는 그들과 성교를 갖지 않았다. 이 경험들은 또한 전이에서 일어났다. 그는 불평―“증기를 뿜어낸다’는 표현이 적절하다”―했으며, 그의 성적 대상의 면전에서 항문기 활동(방귀뀌는 것)을 반복했다. 그리고 나의 치료가 그의 고통과 비참함을 불러일으켰다고 믿고, 내가 그에게 괴로움을 주고 있다고 신음했다. 그는 전이에서 매춘부와 때리는 경험을 재연했다.
우리들은 도착된 잔인성과 고통의 흥분 형태에 대한 진술을 보았다. 그러나 폴라 하이만은 그것의 핵심에 잘못 이해된 얽힘이 있음―그 자신의 고통은 또한 실제로 분석가를 향하는 잔인성이다―을 묘사한다.
매맞고자 하는 소원은 대체로 고통을 겪고자 하는 소원에 의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의 때리는 경험의 명백한 수동적 마조키즘의 측면은 오해되기 쉽다. 그것은 전체 상황이 고려될 때 많은 의미를 상실한다.
이 환자 자신의 ‘피상적’ 경험은 자학에 의해 고통 당하는 희생자로 경험하는 것이다. ‘전체 상황’은 그의 가학, 피학적 변태성욕 충동 이상을 포함하는 더 깊은 무의식적인 의미의 수준을 가진다. 실제로 그의 성적 호기심 근저의 혼동은 내적 대상들에 대해 주의함으로써 분명하게 된다. 그의 대상관계의 내적인 측면들이 분석될 때, 그의 성적 취향에 얽힌 혼동은 독특한 방식으로 풀린다.
그를 때리는 여성은 그가 고용했고, 조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경험하기 원하는 고통의 양을 결정하고 조절할 수 있었다. 이 의식적으로 받아들인 사실에 더하여 …[무의식적으로] 그는 매춘부와 강하게 동일시되었고, 환상 속에서 그녀의 역할을 받아들였다. 그러한 변태성욕 관계에서 가학적 상대자와의 동일시는 정신분석에 의해 오래 전에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 매춘부와의 무의식적 동일시는 복합적인 동일시의 한 부분이었다. 그는 또한 부분적으로 아버지와 동일시되었다.
이 사례에서 때리는 여성이 그 자신을 나타내는 한편, 매 맞는 그는 아버지를 나타낸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떻게 우리가 아버지와의 동일시에 관해 알 수 있는가?
많은 경우 환자는 그의 불행의 근원을 아버지의 양육에서 찾았다. 그는 아버지를 무자비하고 잔인한 독재자로 묘사했다. 그는 아버지가 자유뿐 아니라 인격을 박탈당한 희생자가 되도록 그를 밀어 넣는 힘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잔인하고 싫은 아버지가 자신 안에 있다고 느꼈다.
환자―정말로 자신 안에 자리잡고 있는 끔직한 존재에 대한 얼마의 의식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그와 같은 내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환자는 그것을 강하게 부인했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이 너무 강해서 그는 자신이 싫어하는 그의 외모와 성격-특성에 대한 모든 상들을 이 내적 아버지에게 돌렸다. 그가 자신 안에 있는 나쁜 어떤 것을 인정할 때마다 그것은 진정으로 자신의 부분이 아니라 그의 내적 아버지에게 속한 것이었다. 때리는 수단인 주먹은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몸 안에 가지고 있는 타자를 향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우리는 내면에 포함되어 있는 거절된 존재가 외적 대상, 그의 아버지와 상응하는 특성이 있음을 본다. 이러한 상응은 그가 가족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감정들을 가지고, 자신의 내적 기관들을 돌보았던 사람의 특성과 유사하다.
그래서 고통받는 사람과 때리고 있는 사람은 무의식적이고 도착적이며 그리고 혼동스럽게 동일시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것은 그의 내면에서, 즉 그 여성(매춘부)과의 동일시 그리고 아버지와의 동일시 사이에서 계속되는 적대적인 무의식 환상이다. 거의 모든 꿈이야기가 그런 것처럼, 그것은 모두 포장되고 위장된다. 그것은 내적 영역, 그의 내면에서 상영되는 드라마이다. 그리고 적대 활동에서 드러나는 성적 성질은 보기 드문 명료성을 지닌 채 내적인 성적 부분에 대한 환상이 있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환자 자신의 정체감에 주요한 영향을 끼친다. 환자의 내면화된 적대적인 아버지는 자신의 몸의 부분―자신의 엉덩이―으로 상징된다; 그리고 그 곳을 맞는다. 아버지의 ‘내사’는 내면으로부터 그를 침범하고 그를 지배하는 형태로 경험된다. 정말로, 침범 당하는 환상은 실제 아버지 성격의 어떤 측면에 의해 혼합되었을 것이다(벌레에게 공격당하는 사례에서 적대적 드라마의 내사와 비교하라. p. 62). 내적 대상은 침범으로 경험된다. 왜냐하면 (a) 그것은 그 자신의 환상 속에서 표현된 특별한 종류의 적대적 충동(예를 들면, 그의 강제적인 방귀뀌기 그리고 조종하기)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b) 내사가 적대적이고 진정으로 자신과 동일시될 수 없는―다만 자신의 낯선 부분으로만 여겨지는― 내적 대상들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보통은 사람들이 그가 아버지를 꼭 닮은 아들이라고 애정 있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이러한 종류의 애정은 이 환자에게 가능하지 않다. 대신에 그는 용납되지 않은 어떤 것에 의해 침범 당하는 것으로 느꼈다. 싫은 아버지에 대한 내면화는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낯선 느낌으로 이끌었다.
싫은 아버지는 자신의 싫은 부분이 되었다; 그래서 그것은 자신의 한 부분―그의 엉덩이―과 동일시되었다. 자신의 그 부분은 역겹고 불쾌한 배설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내면화된 대상은 적절하게 동일시 될 수 없었고 마치 그것이 낯선 몸인 것처럼 내적으로 동화되지 않은 상태로 남게 되었다(이와 비슷한 동화되지 못한 대상을 위해서 이 장의 나중에 나오는 사례인 “내부에 악마를 지닌 여자”를 참조할 것). 이 복잡하게 뒤얽힌 정체성은 하나는 그 자신의 부분―그의 엉덩이―과 그의 아버지 사이의 동일시: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자신과 그의 외적 대상, 매 때리는 매춘부 사이의 동일시가 그것이다. 그의 성적 흥분은 그가 이제는 난폭한 성교 중인 부부에 의해 배제되지 않는 드라마의 실연에 의해 크게 강화되었다―실제로 그는 그들을 포함했다.
내적 대상들과 성격 발달
적대 관계는 종종 도착적인 심각한 성격장애를 창조함으로써 인격의 한 부분으로 성인의 삶에서 지속될 것이다. 이 영역들은 최근에 조사되었으며 그리고 다음 14장에서 다룰 것이다. 외디푸스 문제에 대한 정상적 해결은 대상의 동화를 포함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움받기보다는 더 사랑 받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살펴보았던 보다 덜 전형적인 사례에서, 내적 대상은 떨어져 나가서 개인의 정체성을 붕괴시키는 자기의 부분과 동일시되어 있다. 그것은 사랑 받기 보다는 더 미움받기 때문이다. 이 정상을 벗어난 발달과정은 그것들이 소외되고 동화되지 않은 상태 안에서 더 두드러지게 드러나기 때문에 내적 대상들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다음 사례에서는 보다 일반적인 내면화에 대해 숙고할 것이다.
동일시
동일시란 무엇인가? 아기가 처음에 엄마를 인식하기 시작할 때 그것이 어떤 단계이든지, 아기는 엄마를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 개념은 이러한 지각이 발생하므로써, 실제로 아기는 엄마가 자신에 의해 완전히 소유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부모(그리고 타자들)와 매우 구체적 방식―그들의 버릇, 말하기, 억양, 옷 입는 방법(습관), 그리고 물론 정신적 특징들 태도, 종교, 정치성 그리고 기타 등―으로 동일시한다. 의사의 자녀들은 자라서 의사가 되고, 배우의 자녀들은 무대에 서게 된다. 동시에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주변의 대상들/사람들 주변에서 정체성을 계속 형성해간다. 클라인 분석가의 제자는 클라인 분석가가 된다. 그리고 노망한 남편과 부인은 서로 같은 옷을 입고 점점 더 같아진다. 동일시에서 타자의 어떤 것이 주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리고 그것과 닮은 그 혹은 그 여자를 형성한다.
이 경우에 사랑하고, 좋은 그리고 도와주는 대상이 내면화된다. 그러나 크게 중요한 것은 주체가 ‘좋은’ 내적 대상과 동일시하는가, ‘나쁜’ 내적 대상과 동일시하는가; 그리고 그때에 우세한 내사 감정이 사랑인지 혹은 미움(물어뜯는 것, 혹은 입맞춤/빠는 것)인지에 달려 있다. 강한 사랑과 관심의 충동들과 함께, 사랑의 내적 상태는 내적 대상이 자기 느낌에 동화됨으로써 다소간 안정적인 행복감과 자기-확신―‘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좋아한다’―으로 직접 이끈다. 그때 내적 대상은 외적 대상의 공존 인식이 왜곡되지 않고 계속 공존하면서도, 충분히 동일시된다. 사람들은 그것에 대한 생각 없이 그 여자 혹은 그 남자가 다른 사람을 닮았다고 느끼게 된다. 종종 어린이들은 ‘넌 아빠 닮았구나. 그렇지?’라는 어른의 말에 의해 지지 받는다. 우리가 지난번 사례에서 본 것처럼 나쁜(미운) 내적 대상과 동일시 될 때, 병리적인 인격의 발달이 발생한다. 내면화 환상이 강한 적대적 충동을 수반할 때, 자기의 느낌(sense of owning)이 상당히 제한된다. 자유는 자기 안―자기의 분리된 부분들 사이―에 만들어진 해결되지 않는 갈등에 의해 제한된다.
좋은 내적 대상과의 동일시는 유아의 절망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심리적 변화를 허용한다. 유아는 때때로 배제시켰던 부모의 관계를 받아들이기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때 침범 당하는 대신에 관계를 바라볼 수 있는 증인이 되는 것을 감당할 수 있다. 이것은 상황(부모의 관계)의 진실을 존중하는 단계이다. 다른 한편, 예를들어, 바로 우리가 조사했던 사례의 비정상적 발달과정은 좋은 내적 대상과 동일시 하는 것에 대한 실패이고 대신에 나쁜 대상, 적대적 아버지와의 어떤 구체적 동일시이다. 그 결과 현실(부모 관계로부터 분리와 배제)은 성취될 수 없고 경험될 수 없었다. 환자는 그의 현실을 도피했고, 그리고 그 산물은 아주 왜곡된 인격의 정체성이었다. 유아는 정체성의 혼란이 지속됨으로써 그 후에 어린이와 또 어른 환자가 되어서, 부모와 관련된 환상에 계속 집착하게 되었다. 환자는 매춘부/엄마 그리고 아버지/엉덩이와의 기괴한 동일시를 이루었다. 이러한 성교중의 부모와의 다중적인 동일시는 프로이드의 중요한 사례인 늑대인간(Wolf Man) 사례(프로이드, 1918)의 특징이다. 피터 또한 같은 종류의 부모와의 동일시를 보여 주었다(11장과 12장을 보시오).
우리는 이제 사랑하는 ‘좋은’ 대상의 내면화를 살펴 볼 것이다. 멜라니 클라인은 리차드의 모든 치료 면담을 기록했다. 그녀가 죽은 뒤 그리고 치료가 끝난지 약 20년 후에 출판된 그 책은 2차 세계대전 동안에 행해진 치료 사례였다. 1940년에 나온 이 책은 클라인 연구에 중요하고 매혹적인 자료이다.
사례: 좋은 대상과의 동일시
이 사례에서 내적인 행복감은 좋은 대상의 내면화에 따라 성장한다. 리차드는 10세의 어린이였는데, 8세 이후 학교에 갈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아이들을 두려워하는 소심한 아이였다. 이 면담은 21번째 면담이다. 전날 놀이 치료실은 이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면담은 클라인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리차드는 놀이방으로 가는 도중 클라인을 만났다. 그는 그녀가 현관 열쇠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다. 이제 어제 일어난 사건이 그에게 의미하는 것은 놀이 치료실이 결코 다시 사용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감동하여 ‘그리운 좋은 방, 나는 그 방이 좋아요. 그 방을 보니 반가워요’라고 말했다. …그는 만족스럽게 함대[장난감 배들] 놀이에 몰두했다.
우리는 여기에 연결이 있음을 본다; 친숙한 사랑의 대상(놀이방)을 되찾았을 때, 그의 행복감이 커졌다; 그는 만족했고 행복했다.
클라인은 ‘친숙한 놀이방'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그의 두려움을 죽음으로 인해 클라인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해석했다.
우리가 이미 보았던 것처럼, 어린이가 언급하는 대상들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클라인은 자신과 리차드가 열쇠를 가져와야만 했던 때(9번째 면담)를 언급했다. 면담 후에 리차드는 버려진 검은 차에 관한 꿈과 전깃불을 껐다 켰다 했던 그의 꿈에 대해 말했는데, 클라인은 그 꿈을 죽어 가는 클라인과 엄마에 대한 그의 두려움의 표현이라고 지적했다. 친숙한 방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또한 할머니의 죽음에 관한 그의 슬픔을 의미했다.
클라인은 리차드가 상실할까 봐 두려워했던 사람들인 자신, 엄마와 할머니를 연결시켜서 해석을 확대한다.
그 방을 되찾는 것은 그에게 클라인이 살아 남았고, 할머니가 회복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방을 사용할 수 있든지, 없든지, 사람이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것, 사는 것과 죽는 것, 그를 돌보는 것과 그를 버리는 것, 빛나는 불이 들어오는 것, 그리고 꺼지는 것: 분석가는 이것들을 따뜻하고 안정감을 느끼는 좋은 대상이 상실될지도 모르지만 다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리차드의 무의식적 환상의 다양한 표현으로 보았다:
리차드는 함대 놀이를 중단하고, 아주 조용하고 확신 있게 ‘내가 알고 있는 한가지 사실이 있어요. 그것은 당신이 내 평생의 친구가 될 것이라는 것이에요’라고 말하면서 클라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리차드는 그 해석에 아주 깊이 반응했다. 그는 중요한 사람을 상실하는 것에 관한 클라인의 해석에 의해 감동되었다. 그녀의 이해(이 고통에 관한)는 그의 마음(내적 행복감)이 되었다. 이해는 그가 자신의 부분으로 그것―그것은 평생의 친구가 될 것이다―을 얻었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리차드는 클라인이 매우 친절했고, 자신이 클라인을 매우 좋아했으며, 때때로 매우 불쾌하기도 했지만, 클라인이 자신과 함께 행했던 것이 자신을 위한 좋은 일이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덧붙였다.
리차드가 따스한 사랑을 느꼈던 친절한 사람인 클라인에 대한 감사의 표현은 리차드의 정신 상태를 변화시킨 자신의 구원을 의미한다.
클라인은 그가 클라인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고 할머니 때문에 슬퍼하고 있다고 그에게 설명해 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아직도 마음속에 할머니께서 살아계시다―평생 친구라는―는 느낌을 갖도록 했으며, 또한 그가 클라인의 마음속에 간직함으로써 이와 같이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주었다고 해석했다.
그리고 다음의 리차드의 놀이는 더 행복했고, 생기 있고 그리고 창의력이 풍부해졌다.
리차드는 지지, 희망 그리고 행복을 얻었다; 그리고 그 때 그는 다른 두려움에 관해 말했고, 클라인은 이것들을 그의 놀이 안에서 계속 해석했다. 그의 희망과 안전에 관한 확신 있는 영속성은 그것이 그의 부분이라는 느낌―내적 대상에서 유래한―을 가져다준다. 환자가 좋고, 도와주는, 어버이다운 상을 내면화할 수 있을 때, 그곳에 위대한 구원과 넘치는 사랑이 있다. 그 때 내사는 친절하고 안전한 내적인 느낌을 확보한다. 그것은 동화될 수 있고 동일시될 수 있는, 자기(Self)와의 조화로운 관계 안에 내면화된 좋은 대상을 가지는 데서 유래하는 마음의 상태이다. 이 사례는 특히 불안을 이해하는 대상으로서의 분석가의 돕는 자질을 보여준다. 그녀의 설명에서 클라인은 매우 고통스러운 불안과 접촉하는 것은 안전한 내적 대상 그리고 내적 행복과 생생한 존재의 느낌을 형성하는 특별히 강력한 힘이다. 매우 고통스러운 해석들―죽음과 내면화된 죽은 대상들을 언급하는 것―은 희망을 소생시키고 환자가 한층 더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느끼도록 하는 것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클라인, 1961. p.100). 이해하는 능력은 내면화를 위한 특히 강력한 ‘좋은’ 대상으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쁜 내적 대상과의 동일시
그러나 우리가 보아 왔듯이 내면화는 항상 그와 같지 않다. 폴라 하이만의 연구 사례(자신의 엉덩이를 공격당하는 남자)에서 환자는 적절하게 도울 수 있는 좋은 내적 대상을 내면화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내적 대상을 너무 증오함으로써 자신이 그것과 적절하게 동일시하는 것에 실패했다. 그것은 자신의 몸의 낯설고 소외된 부분으로 남았다. 내적인 행복감을 형성하는 대신 내적인 싸움을 불러일으켰다. 하이만이 제시한 다른 사례는 또한 분노의 상태에서 내사된 나쁜 대상의 내면화를 설명한다. 그것은 환자 자신 안에 있는 증오의 대상에 의해 자기(Self)가 지배받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맹목적인 충성과 아주 제한된 정체성을 요구했다. 대상과 동일시를 이루는 과정―그것이 되는 것―이 묘사되었다: 또한 그것에 따라 오는 대상과의 내적 투쟁이 있으며, 그것은 그 대상이 사랑하는 좋은 대상이 아니라 적이기 때문이다. 환자(그 여자는 예술가였다)의 창조적 부분은 다른 방식으로 채색된 낯선 대상에 의해 잠시 지배되었다; 그렇게 환자의 성격이 잠깐동안 투사된 (‘나쁜’) 대상을 닮게 되었다. 그것은 광증이라 부를 수 있는 상태이다; 실제로 환자는 분명히 편집증 상태였다.
사례: 내면에 악마를 가진 여자
내사의 발생은 다시 말하자면, 환자가 자신의 면담 중에 제공했던 보고에서 서서히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어떤 나쁜 것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는 평생 반복적인 환자의 느낌이었다. 실제로 환자는 그녀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악마들이 그녀 안에 가득하다는 경험을 다루는 것으로부터 정신분석 치료를 시작했다. 다음의 상담 기록은 실제로 나타난 내적 ‘광증’ 상태를 보여준다:
…그 여자는 이렇게 면담을 시작했다: ‘나는 넌더리가 나요. 내 입은 종기로 가득 차 있어요.’ 그 여자는 그때 나에게 그날 차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여자는 ‘바보같은 남자가 그곳으로 몰아 넣었어요. 당신은 그것을 믿으시겠어요? 내 차의 긁힌 자국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었어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손상 입은 자신의 차에 대한 수동적 불평도 여자의 박해받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또한 내적으로 긁혔다(입의 종기는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편리한 방법이었다). 손상 당한 외적 대상(그 여자의 차)은 내면에 (있는) 손상 입은 어떤 것에 대한 느낌과 관련되어 있다.
그 여자는 매우 감정적으로 그날 아침에 겪었던 다른 불쾌한 경험을 말하기 시작했다. 차를 몰아넣은 남자에 관한 모든 흥분과 분노 후에 그 여자가 차를 몰고 나갔을 때, 제한 속도를 초과한 다른 차가 그녀의 잘못된 쪽으로 추월했다. ‘물론, 그 여자는 여자 운전자였어요’라고 말했다. 앞에는 신호를 보내며 오른 쪽으로 돌아서 곁길로 들어가는 화물차가 있었다. 화물차 바로 뒤에 있던 그 여자는 왼쪽에서 어떤 신호도 보내지 않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내 환자의 차 앞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내 환자는 재빠르게 자신의 차를 오른-손 방향으로 돌려서 벗어나야 했다.
더 많은 수동성과 무력함―외적대상을 묵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밀어 넣어진 것; 다시 말해 그것은 그녀 안에 복종을 요구하는 악마들과 같다.
그녀는 ‘화가 나서 납처럼 되었다.’ …그리고 그 여자 앞에서 한 시간에 5마일의 속도로 천천히 갔고 뒤의 그 여자가 지나가는 것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그 여자에게 보복했다. 그들은 빨간 신호에 이르렀다. 그 여자는 나의 환자와 같은 위치에서 차를 세웠고 나의 환자는 자신의 머리를 창 밖으로 내밀고 말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본 것 중 가장 나쁜 진로 방해였어요.’ 내가 직진하는데, 잘못된 방향에서 내 앞을 막음으로써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내가 오른쪽으로 돌게 한 것을 당신은 아십니까? 맥주를 마셔 붉어진 얼굴을 가진 그 여자는 어깨를 으쓱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무엇을 조심해야 하죠?’ 나의 환자는 격노했고 아주 냉혹한 말을 생각해 내려 했다. 드디어 그녀는 그것을 발견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까요’ 그 여자는 말했다. ‘이제 이유를 알겠네요. 당신은 이미 좋은 시절이 다 지났군요. 이제는 당신 보다 젊고 당신 자신 보다 영리한 여자에게 운전을 맡겨야만 해요.’ 그 여자는 기가 막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그 여자가 대답하기 전에 신호가 바뀌어 나의 환자는 떠나 버렸다. 그녀는 매우 기뻤다.
이것은 그 여자를 방향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한 나쁜 외적 대상과의 강한 적대적 관계를 묘사한다. 이제까지는 그 여자가 자신의 의기양양한 모욕으로 외적 대상을 극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여자의 공격성의 결과들은 심각하고 그리고 놀랄만하다:
…나의 환자는 그녀의 미술학교로 차를 몰고 갔고 주어진 주제에 관해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그림 그리기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 여자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리고 그림을 그려서 벽에 걸었을 때까지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그것은 가장 끔찍스러운 일이었어요.’
이제 환자는 비록 무의식적이지만, 그녀의 능력을 방해하는 어떤 내적인 것의 무시무시한 성질에 대해 느끼고 있다.
그 그림을 평가하기 위해 미술 선생이 그녀에게 왔을 때, 그는 놀라며 말했다: ‘야단났네. 당신 무슨 일 있어요? 이 그림은 빅토리아 시대의 사진을 그린 것 같이 보여요.’ 나의 환자는 그제야 그녀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던 것이 무엇인지 인식했다. 그녀는 ‘그것은 50년 전에 그린 그림처럼 보였어요’라고 말했다.
그녀 자신의 명백한 의도로부터 그녀를 벗어나게 한 어떤 것이 그녀에게 문자적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50년 전의 어떤 누군가의 모습―즉 그녀보다 훨씬 나이 많은 여자―으로 그녀를 변화시켰다. 제공된 설명은 길에서 그녀를 내몰았던 차안의 나이 많은 여자가 실제로 그녀 안에 들어갔다는 것이다―내사, 그리고 그때 나쁜 대상에 의한 지배가 뒤따랐다:
그녀는 이것을 아주 무섭게 느꼈고 그래서 가서 셰리 술 3개를 가져와야 했다. 나중에 그녀는 입 속의 종기에 주목했다.
‘맥주에 취한 얼굴’, 술에 취한 여자와의 동일시는 그녀가 셰리를 마시는 데서 아주 구체적이고 내적인 것이 되었다. 그녀가 입으로 여자에게 한 냉혹한 공격은 자신의 부분에 대한 공격으로 경험되었다. 그녀의 입안의 종기는 뜻밖에도 이 사실에 대한 증거로 드러났다.
…그녀는 부인을 상처 입히는 자신의 충동을 수행했고 의식적으로 그녀의 성공을 기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부인에게 준 상처를 견딜 수 없었고 또한 그 부인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할 수 없었다―무의식적으로 그 부인은 그녀가 사랑의 충동뿐 아니라 적대적 충동을 가졌던 나와 그녀의 어머니를 상징했다―. 그녀는 즉시 이 엄마-상을 내면화했고 그리고 상처 입은 상황으로, 즉 말하자면 늘고 쇠약한 50세의 여자를 내면화했다. 여기에 대해 그녀는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꼈다.
대상이 증오 안에서 내면화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내적으로 관계를 맺었다. 그것은 증오되었고 그리하여 내적 세계는 적대적이고, 그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할 정도로 혼란한 상태에 의해 지배되었다. 환자는 그녀를 조종하는 악마 같은, 낯선 대상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고 느꼈고, 그리고 그녀 자신의 삶, 그녀 자신의 방향과 의지는 고갈되어 있다고 느꼈다. 그녀는 그때 마치 그녀가 50세도 더 된 여자―그림의 늙은 스타일, 음주한 여자―처럼 행동했다. 이 내면화된 대상에 사로잡히는 것은 그녀가 내적 대상과 가진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관계를 나타내며, 이러한 내적 적대 관계가 있음으로 해서 외적 대상은 그녀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내적으로 그것은 그녀를 다른 방향, 빅토리아-양식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그녀의 자기의 느낌과 정체성을 혼란시켰다.
한 번 내면화된 대상은 깊고 중요한 드라마의 중심(focus)이다. 우리는 개인의 정체감에 대해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내면화의 태도―증오 혹은 사랑―를 숙고했다. 그러나 그것뿐 아니라 그것은 또한 내적 대상의 운명에 영향을 끼친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좋은 내적 대상의 운명에 대한 염려에 관해서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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