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똑같은 강론에 실증이 난 신부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다.
‘제가 아무 단어나 말하면 여러분은 거기 맞는 찬송가를 부르세요.’
신부가 외쳤다.
‘십자가!’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신도들이 즉각 노래했다.
신부가 또 소리쳤다.
‘힘!’
“예수는 나의 힘이요---”
이번에도 바로 합창이 시작됐다.
신부가 또 단어를 꺼냈다.
‘은혜!’
“어메이징 그레이스---”
신도들이 이번에는 영어로 노래 불렀다.
신이난 신부가 다음에는
‘섹스 !’ 하고 외쳤다.
갑자기 성당 안이 조용해 졌다.
신도들은 서로의 얼굴이 마주칠까봐 모두들 눈을 내리깔고,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이 때 뒷자리의 한 할머니가 노래를 시작했다.
“아,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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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전례에서 사제는 복음을 봉독한 뒤에 강론을 한다.
개신교에서 목사가 하는 설교와 같은 것이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차이점 중 하나가 개신교는 뜨겁고 적극적인데 비해서
가톨릭은 ‘뜨뜻미지근하다’는 것이다.
이 차이를 만드는 부분은 여럿 있는데, 그중 큰 것 하나가 ‘설교’와 ‘강론’의 차이이다.
‘그 목사님 참 말씀이 좋다.’는 표현이 있고, ‘말씀이 좋은 목사님’을 따라 교회를 옮기는 일도
있다고 한다.
잘 하는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 성경 해설도 귀에 쏙쏙 들어오고,
그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따라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거의 완전히 이해가 되므로,
거의 모든 것을 투입할 마음가짐이 생기고 다져진다.
가톨릭에서는 ‘그 신부님 강론 참 좋다.’는 말을 듣기가 쉽지 않다.
우선 강론의 주제가 모든 성당에서 다 똑같으니까,
다른 신부보다 월등히 좋은 강론을 하기가 힘들다.
가톨릭의 ‘말씀의 전례’는 독서와 복음 봉독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신자들은 말씀이 쓰인 당시의 사회, 문화와 역사, 정치적 환경 등을 잘 모르므로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
그러므로 강론은 현재와 성서 시대의 간격을 메워 주는 해석학적 기능을 지닌다.
물론 똑같은 내용을 말하더라도, 말 하는 사람의 표현 방법과 말솜씨에 따라,
듣는 이 들에게는 커다란 차이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성경 이해 돕기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때때로 개인적 의견을 개진하거나, 신학적 강의를 한다든지,
민감한 정치 사회적 이슈를 강론에 포함시키는 사제가 없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이러한 내용은 강론에서 언급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강론’(homilia)이란 용어는 본래 희랍어의 ‘homilein’에서 나왔는데,
가족이나 친구에게 하듯 친밀한 대화를 하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이 ‘친밀한 대화’는 오늘날 ‘하느님에 대한 친밀한 대화’로 해석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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