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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간존재의 이해 제3장 마음에 따른 관계맺음과 욕심-(2) 관계맺음의 대상과 욕심의 유형

반찬이 2010. 1. 14. 11:17

(2) 관계맺음의 대상과 욕심의 유형

 

  인간에게 욕심은 마음이 구체적 관계맺음에 대한 관심(關心, interest)으로 드러난 것을 말한다. 관심에서‘관(關)’은안과 밖을 구분하기 위해 경계에 설치된 관문(關門)을 말하며 ‘심(心)’은 안과 밖의 관계를 설정하고 대처하는 마음을 말한다. 욕심은 인간이 마음을 통해 관계를 이해하고 구성하여 실현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 관심을 말한다. 이러한 욕심은 마음에 따라 관계맺음으로 드러날 때, 두 가지 형태의 관심으로 구분되어 드러난다. 즉, 욕심은 관계를 맺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관심과, 관계를 맺어 나가는 방법과 과정에 대한 관심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욕심의 대상>

 

  이런 점에서 우선 인간이 관계를 맺고자 하는 대상에 따라 어떠한 욕심을 형성하게 되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이 관계를 맺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서 갖는 욕심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인간이 욕심의 주체로서 물질로 이해된 대상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심(물질욕), 인간으로 이해된 대상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심(인륜욕), 신과 같이 초월적 존재로 이해된 대상과의 관계맺음을 맺고자 하는 욕심 (초월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이 가능한 까닭은 물질, 인간, 초월적 존재가 관계맺음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물질은 경험적 방법으로 이해될 수 있는 구체적 사물로서 물질법칙에 의존해서 존재하는 대상을 말하며, 인간은 경험적 방법으로 이해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물이면서 물질법칙을 이해하고 다룰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있는 대상을 말하며, 초월적 존재는 경험적 방법으로 이해될 수 없는 추상적 관계 속에서 물질법칙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대상을 말한다.

 

  인간에게 관계맺음으로서 물질, 인간, 초월적 존재가 항상 불변의 상태로 성격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욕심의 향방에 따라 감정이입이나 동일시 현상 등을 통해서 물질이나 초월적 존재를 의인화(擬人化)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도 있고, 인간이나 초월적 존재를 물질화하여 의물질적(擬物質的)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도 있고, 물질이나 인간을 초월적으로 존재화하여 의초월적(擬超越的)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이런 까닭에 인간은 자연물인 산이나 바위 또는 초월적 존재인 천사나 악마도 인간처럼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마음의 주인인 인간을 사물처럼 소비하거나 소유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가 하면, 초월적 존재처럼 숭배하거나 신앙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것을 볼 수 있다.

 

  먼저 인간은 물질로 이해된 대상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심을 갖고 있다. 물질은 사물로서 구체성을 갖고 있으며, 물리 화학적 법칙에 의존해서 관계를 맺는다. 물질은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자료인 동시에 대사의 과정이 일어나게 하는 바탕이 된다. 인간은 대사 작용은 물론이고 감각 ․ 지각 ․ 생각 작용을 통해 물질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생명을 유지하기 때문에 물질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심을 갖는다. 이처럼 인간이 물질을 대상으로 관계맺고자 하는 욕심을‘물질욕(desire for material)'이라고 부를 수 있다. 물질욕은 인간이 물질적 수단을 소비 ․ 이용 ․ 소유 등과 같은 대상으로서 바라는 것을 말한다. 이때 소비 ․ 이용 ․ 소유 등의 대상이 되는 물질적 수단은 햇빛 ․ 물 ․ 흙 등과 같은 자연물과 식품 ․ 의복 ․ 가구 ․ 건물과 같은 인공물을 포함하는 것은 물론이고, 구체적 사물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관념에 기초하여 가상적 방식으로 구성해 놓은 가공물(架空物)도 포함한다. 인간은 가공물에 대한 소망을 사물의 세계에 실현시키기 위하여 물질을 조작하여 새로운 인공물을 만들어 낸다. 즉, 인간은 하늘을 나는 가공물에 대한 소망에 기초하여 연 ․ 포탄 ․ 비행선 ․ 비행기 ․ 우주선과 같은 인공물을 만들게 되었다. 인간이 갖고 있는 물질욕은 가공의 성격으로 인해 현실 가능성과는 무관하게 무한히 확대될 수 있다. 인간은 물질욕에 이끌려 갖가지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켜 온 측면이 많다.

 

  인간은 물질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소비 ․ 이용 ․ 소유 등에 필요한 물질 대상을 다루는 방법을 이해해야 한다. 물질욕의 충족이 물질적 대상을 다루는 과정과 결과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질 대상을 다루는 방법을 알기 위해 물질이 관계하는 법칙을 밝히려고 노력한다. 인간이 이러한 법칙을 밝혀서 이해하면 물질 대상을 효과적으로 다루는 것이 가능하다. 물질적 대상은 겉과 속이 동일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관계로 속이거나 감추거나 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 인간은 물질적 대상을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조작하고 조종할 수 있는 객체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인간이 물질과 관계를 맺는 것은 주로 주체와 객체가 관계를 맺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의 물질욕 충족은 객체로 존재하는 물질 대상을 확보하는 과정이 중심을 이룬다.

 

  인간은 물질욕을 충족시키는 물질 대상을 일차적으로 자연에서 구한다. 인간에게 자연은 물질적 토대를 의미한다. 인간이 자연을 투쟁과 정복의 대상, 개발과 이용의 대상으로 말하는 까닭도, 자연을 물질욕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로 인간은 물질욕의 충족을 주로 자연을 이용하는 기술 문제로 이해한다.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는 기술을 갖고 있는만큼 물질욕의 충족이 가능하다. 이런 까닭에 자연에 대한 지식의 발전과 함께 자연을 이용하는 기술 또한 급속히 확대되어 인간은 물질욕의 충족을 더욱 확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인간이 물질이라는 대상을 확보하고 이용하는 것은 많은 경우에 인간을 매개로 이루어진다.하나의 예로 개인 또는 집단이 쌀을 구입하여 밥을 지어먹는 것은 숱한 사람들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이로 인해 인간은 친애관계나 권려관계 등을 수단으로 이용하여 물질욕을 충족시키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그 결과 인간의 물질욕에 대한 관심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다른 욕심과 연결되어 복합적 형태로 존재한다.

 

  인간이 갖고 있는 물질욕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식욕이다. 인간은 대사 작용에 기초하여 영양섭취를 위해 음식물을 먹고 마시려는 욕심, 즉 식욕을 갖고 있다. 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음식물을 확보하고 먹고 마시는 과정을 통해 식욕을 충족한다. 이때 음식물은 인간의 의지에 내맡겨진 수동적 대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은 식욕을 임의로 충족할 수 있다. 음식물 섭취로 신체적 필요를 충족시키게 되면 욕심을 해소하면서 그만 먹게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신체적 필요가 충족된 상태에서도 계속 음식을 섭취하려고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신체적 필요가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으려 한다. 음식물을 과도하게 또는 과소하게 섭취하여 질병을 유발하는 병적 형태로 발전하는 까닭은 식욕이 다른 욕심과 결합하여 변형과 왜곡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사랑에 대한 결핍, 건강에 대한 걱정, 경쟁에 대한 집착, 삶에 대한 허무 등이 소식증이나 대식증을 낳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환자의 내면에 형성된 욕망의 전체적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륜욕>

 

  인간은 인간으로 이해된 대상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심을 갖고 있다. 인간이 인간과 관계를 맺는 것은 마음을 매개로 주체로서의 인간이 또 다른 주체로서의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 주체와 대상이 마음에서 동일하게 주체로서의 자격을 갖는다. 이로 인해 인간과․ 인간이 관계를 맺는 것은 주체성을 공유하는 인간의 짝 , 남녀 ․ 노소 ․ 상하 ․ 부자 ․ 부부 ․ 형제 붕우 등과 같은 인륜(人倫, human relation)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인륜이 올바르지 못한 관계에 기초하여 설정되면 ‘불륜(不倫)’으로 말하고, 올바른 관계에 기초하여 설정된 경우에도 이치를 벗어난 방식으로 행동하명 ‘패륜(悖倫)’으로 말한다. 이처럼 인간이 인륜의 형태로 대상과 관계를 맺고자 바라는 것은 인륜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인륜욕은 주체성을 공유하는 상호관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마음으로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중요성이 결정된다. 인간은 공감의 성격과 정도에 따라 인륜에 대한 욕심의 실현이 달라지는 까닭에 인륜욕에서 단순히 관계맺음의 대상이 되어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인간에게 인륜욕의 충족은 물질처럼 대상을 소비 이용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공감에 따르는 동정에 기초하여 주체성을 실현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런 관계로 ‘나’와 ‘너’가 인륜욕에 기초하여 관계를 맺는 경우에는 반드시 상호 주체성이 개입한다. 주체로서 나의 의도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상으로서 너의 의도도 동시에 중요해진다. 만약 나의 의도만 일방적으로 관철하려고 한다면 동정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불완전한 관계맺음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이러한 불완전성을 극복하기 위해 서로 상대에게 주체성을 양보하는 방법으로 공감대를 확대하려고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너의 마음이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완전한 공감대 형성은 어렵다.

 

  인륜욕에 따른 관계맺음은 나와 너의 마음이 변화하는 까닭에 기대와 예측이 어려운 불완전한 형태로 이루어진다. 나와 너는 마음먹기에 따라 드러나 있는 겉과 내면에 존재하는 속을 달리할 수 있기 때문에 감추거나 속이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까닭에 말의 의미 또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 ‘감추는 것’ ‘속이는 것’을 아우르는 포괄성과 다의성을 갖는다. 인간은 말의 의미를 표현과는 반대 방식의 전달도 가능하다. 이로 인해 나와 너가 말로써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하는 경우에도, 감추는 것과 속이는 것의 혐의를 완전히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하다. 결국 말을 통해 관계를 맺게 되면 소통의 과정에 공감(共感,sympathy)과 반감(反感,antipathy)이 공존할 수 있다. 즉 ‘사랑한다’는 말이 미워한다는 이해되어 반감을 자아낼 수도 있고, ‘미워한다’는 말이 사랑한다는 뜻으로 이해되어 공감을 자아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말을 통해서 마음을 주고받는 것은 계속적인 미끄러짐을 수반한다. 인간은 이러한 미끄러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들은 몸의 느낌으로 이루어지는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 마음을 초월하거나 보완하려고 한다. 그러나 몸은 느낌에 묶여 있어 생각의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곧바로 한계에 부딪힌다. 이처럼 변화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나와 너가 상호작용을 통해서 완벽한 인륜욕 충족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아무리 인륜욕을 충족시키는 그보다 더 나은 상태를 바랄 수 있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완벽한 갈증해소는 기대하기 어렵다.

 

  인간은 남녀 ․ 노소 ․ 상하 ․ 부자 ․ 부부․ 형제 등과 같은 인륜을 통해서 인륜욕을 형성하고 실현한다. 이러한 인륜욕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친(親)의 관계’와 ‘성(性)의 관계’와 ‘힘(力)의 관계’에 따른 세 가지 부류이다. 즉, 부모 ․ 친척 ․ 친구와 같이 친에 바탕한 친애 관계, 남녀 부부와 같이 성에 바탕한 성애 관계, 장유 상하와 같이 힘에 바탕한 권력 관계가 그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세 가지 부류에 근거하여 친애욕(親愛慾, desire of affection), 성애욕(性愛慾, desire of sex), 권력욕(權力慾, desire of power)을 형성하고 실현한다.

 

  첫째,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친애욕을 갖고 있다. 그 까닭은 나와 너가 상호의존적 관계에 기초하여 공동체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호의존적 관계가 지속됨으로써 자연히 친밀한 관계에 대한 소망을 갖는다. 친애욕을 바탕으로 한 친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의존 안정 지지 등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킨다. 친애욕은 나와 너가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소망이기 때문에 관계맺음을 확대하여 심화시켜 나가는 친근(親近)과 친숙(親熟)의 과정이 필요하다. 인간이 친근하고 친숙해지는 과정을 친목(親睦)이라고 부르고, 이에 따라 형성된 관계의 내용을 친지(親知)라고 부른다. 인간은 이처럼 친밀해지는 과정을 통해 동정의 영역을 확대해 나간다. 친밀함으로 말미암아 친애욕이 극단적으로 확대해진 형태를 ‘일심동체(being one in body of sprite)’라 말하고, 서로를 친근하게 이해할 수 있다. 반면에 인간은 상호의존적 관계가 파괴되면 친밀함이 소원함으로 바뀐다. 소원함은 고립과 이탈에 따르는 소외를 유발하여 인간을 불안과 회피 등으로 이끈다.

 

  인간의 친애욕은 상호의존적 관계가 몸에 중심을 두느냐 아니면 마음에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두 가지 종류, 즉 몸에 바탕을 두고 있는 혈친애(血親愛, affection of kinship)와 마음에 바탕을 두고 있는 상친애(相親愛, afetion of friendship)로 구분될 수 있다. 혈친애는 몸에 근거한 혈연관계로 묶여있는 친족이나 친척 사이에 발생하는 친애욕을 말한다. 인간은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의 많은 부분을 몸으로 연결되어 있는 혈연공동체에 의존하고 있다. 인간에게 혈친애는 본능적인 것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혈친애는 가족공동체를 유지하는 핵심 역할을 한다. 혈친애의 대표가 부모와 자식 사이의 친애욕 이다. 이런 관계로 자녀는 아버지를 부친(父親)이나 엄친(嚴親), 어머니를 모친(母親)이나 자친(慈親)이라고 부른다. 자녀는 부모의 친애를 신뢰하기 때문에 부모의 보살핌과 가르침을 전폭적으로 따를 수 있다.

 

  상친애는 인간의 공동생활 속에서 개인 사이에 발생하는 친애욕을 말한다. 인간은 혈연적으로 묶여 있는 친척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과 어울려 지내는 가운데 친밀한 관계에 놓인다. 인간은 친구와 동료, 이웃 등에 대해 친애욕을 갖는다. 인간은 친교를 통해서 소통과 교류를 촉진함으로써 협조를 확대하고 충돌을 줄이려고 노력한다. 인간에게 친교를 가능하게 하는 친애욕은 공동체 관계를 확대하는 핵심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인간에게 상친애를 대표하는 것은 벗 사이의 친애욕이다. 사람들이 ‘벗’을 친(親)을 매개로 한 사람, 즉 친우(親友) ․ 친구(親舊)라고 말하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친우나 친구는 친애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신의(信義)에 기초하여 마음을 주고받으며 혈친과 유사한 형태로 관계를 맺어 나갈 수 있다.

 

  둘째, 인간은 이성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성애욕은 친애욕과는 달리 강한 충동으로 인해 친숙과 친밀의 과정이 생략되어도 충족이 가능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성애욕은 관계맺음에 대한 충동을 유발할 수 있는 환경 조건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은 충동에 따라 갑자기 강력한 성애욕이 발동하는 경우에 의지로 주체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한다. 이로 이해 어떤 사람은 상대가 완강히 거부하는 데도 불구하고 폭력의 방법으로 성애욕을 충족하려고 한다. 그런데 성애욕은 새로운 관계맺음이 이루어지면 충동이 강화되는 반면에 기존의 관계맺음이 반복되면 충동이 약화되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성애욕을 더욱 강력하게 충족하기 위해 새로운 대상을 찾아 나서거나, 동일한 대상이라도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려고 노력 한다. 또한 성애욕은 충동을 유발하는 대상과 독점적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자 하는 강한 배타성을 보인다. 이러한 배타성은 대상에 대한 고려를 경시하거나 배제한 상태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인간은 특정한 대상에 대한 성애적 배타성을 침해하는 상대가 나타나면 강력한 저항과 공격을 보인다.

 

  성애욕은 관계를 맺는 대상에 따라 이성애와 동성애로 구분할 수 있다. 다른 동물들은 호르몬 작용으로 이성에 대한 성적 충동을 느끼는데, 이와는 달리 인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성애를 느낄 수 있게 됨으로써 동성애도 가능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이성애는 정당한 것으로 인식되어 온 반면에, 동성애는 변태로 인식되어 금기로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내 몸과 마음이 원하는 바를 좆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개인주의 문화가 발전하면서 동성애에 대한 금기가 느슨해졌다. 최근에 서구에는 동성애로 맺어진 짝을 독자적인 가족단위로 인정하여 기존의 가족과 동일하게 보호해 주는 국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인간은 이성애에 바탕하여 자녀를 출산하고, 친애욕에 바탕하여 자녀를 양육함으로써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한다. 그런데 성애욕은 여성에게 임신과 출산, 양육이라는 무거운 부담을 안겨준다. 이로 인해 여성은 성애욕에 대해 좋아하는 감정과 아울러 싫어하는 감정을 동시에 갖는다. 그러나 임신과 출산의 회피가 자연상태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에 임신과 출산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가족 공동체가 영속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이 임신과 출산을 계획하고 조절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성애욕이 자녀의 출산과 양육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성의 해방’이라는 개념이 생겨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성애욕과 친애욕에 기초한 가족 공동체를 동족 부족 국가로 확대해 나감으로써 사회를 전체적으로 제도화한다. 이로써 성애욕에 바탕을 둔 남녀관계가 전체 사회 속에서 부부와 부자를 단위로 하여 가족제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근친 사이에 성애욕의 형성과 표출을 엄격히 금지하는 동시에, 부부관계를 지속적인 관계로 안정시켜 부모와 자녀의 결속을 확고하게 만드는 제도를 발전시키게 되었다. 즉, 부부와 자녀의 관계를 공고하게 만드는 혼인제도 상속제도 등을 통해서 부모와 자식이 강한 친애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가족제도가 발달할수록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가부장의 권력에 근거하여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보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중시하는 경향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인간이 동족 부족 국가와 같은 확대된 공동체 유지는 주로 친애욕에 의존하고 있다. 즉, 확대된 공동체를 유지하는 친교 ․ 친선 ․ 교제 등으로 무두 친애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까닭에 인간은 성애욕이 친애욕의 형성과 실현을 방해하여 확대된 공동체가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남녀관계를 제도화하게 되었다. 인간은 남녀관계를 부부 사이의 사사로운 관계로 국한하여 씨족 내부의 안정을 도모하는 동시에. 다른 씨족과 통혼하는 방식으로 씨족 사이의 긴장과 대립을 완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성애욕에 대한 금기가 엄격해지면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동기 또한 강하게 나타난다. 금기에 대한 도전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자극이 성애욕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인간이 이성에 대한 성애욕을 동성에 대한 성애욕으로 전환시켜 충족하려는 욕망을 갖는 것은 물론이고, 자위행위를 통해서 스스로 성애욕을 충족시키기도 한다.

 

  셋째,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나의 의도나 의사를 다른 사람에게 행사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자하는 권력욕을 갖고 있다. 인간은 권력욕이 기초하고 있는 힘을 목적으로서 ‘권력을 위한 권력’을 추구할 수도 있고, 힘을 수단으로서 친애욕이나 성애욕 등을 실현하는 도구로 활용할 수도 있다. 권력욕은인간이 몸과 마음의 능력에 따라서 다른 사람을 부리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나’의 의사를 자유롭게 관철시키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내’가 다른 사람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을 권력이라고 말하고, 이러한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을 권력자라고 말한다. 권력은 능력에 따른 차등의 인간관계를 전제한다. 즉, 권력은 능력을 가진 주체에게 주인(主人, master)의 자격을, 능력을 갖지 못한 대상에게 종자(從子, servant)의 자격을 부여한다. 권력은 주인의 자격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에 일방적 성격을 갖는다. 사람들이 주인의 자격을 놓고 경쟁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내부 갈등이 일어나면서 다양한 다툼을 유발한다. 사람들이 권력을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과 다툼이 언제나 심각한 사태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권력을 제한하고, 분할하는 방식으로 경쟁과 협조가 가능할 수 있는 공존의 방법을 모색한다. 또한 사람들은 권력획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경우, 복종을 통해서 다툼을 회피하려고 한다. 사람들 중에는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의탁하여 다툼에 대한 노력을 생략함으로써 도리어 편안한 방식으로 살아가려 한다.

 

  그런데 권력은 사적 관계에 기초하여 자발적으로 성립하는 권위욕(desire of authority)과 공적 관계에 기초하여 강제로 성립하는 권세욕(desire of influence)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권위욕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상호 능력의 차이를 인정함으로써 부리는 사람과 따르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구분되어 권력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권위는 강제력이 행사되지 않아도 가능하기 때문에 공경이나 존경에 기초하여 자발적인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형성한다. 예를 들면 어른과 아이, 교사와 학생은 능력의 차이를 바탕으로 어른과 교사는 아이와 학생을 부리는 위치에 서고, 아이와 학생은 어른과 교사를 따르는 위치에 선다. 그리고 동일한 어른이라 할지라도 개인 사이에는 능력의 차이와 의존관계에 따라 자발적인 권력관계가 형성되어 부리는 사람과 따르는 사람으로 구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권위에 따라 부리는 사람과 따르는 사람은 이러한 관계를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로부터의 이탈을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부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권위를 상실하거나, 따르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권위에 불복하면 비난과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특히 따르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권위에 불복하여 따르지 않게 되면 처벌의 대상이 되는 일이 많다. 그러나 권위에 대한 불복에 수반하는 처벌은 권위의 존속을 위협하지 않는 범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정도가 매우 약하다.

 

  반면에 권세욕은 관계를 맺는 사람들 사이에 부리는 사람과 따르는 사람이 제도에 기반하여 권력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권세는 일반적으로 강제적인 지배와 복종의 형태를 띤다. 권세를 가진 사람이 지배자로서 부리고, 갖지 못하는 사람이 피지배자로서 따른다. 이런 까닭에 권세는 개인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제도적 장치에 따라 집단의 힘으로서 주어질 수도 있다. 권세를 가진 사람은 권위를 전혀 갖지 못한 상태에서도 권력을 강제로 행사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부왕의 권세를 물려받은 소년이 군주로서 신하와 백성에게 절대적 권세의 행사가 가능할 수 있다. 이때 권세는 오로지 물리적 강압에 따라서 유지되기 때문에 복종하는 사람은 지배하는 사람에게 강한 불만을 갖는다. 그 결과 복종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권세를 부당하게 생각하여 불복하고 저항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권세를 가진 사람은 불복과 저항에 대한 처벌을 강화함으로써 그러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권세를 가진 사람은 권위의 힘을 빌려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 내어 권세의 역할을 축소함으로써 더욱 쉽게 지배하려고 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권세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거나 저항하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권력욕이 권위욕과 권세욕으로 구분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권력은 대부분 권위욕과 권세욕이 복합된 상태로 이루어져 있다. 권위와 권세가 상호 보완하는 관계로서 권력욕이 효과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모두 활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은 인간이 물질욕과 더불어 친애욕이나 성애욕을 실현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어느 사회나 개인과 개인 또는 집단과 집단이 권력의 향방을 놓고 치열하게 다툼을 벌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관계로 권력욕은 사회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핵심 장치로서 작용한다. 특히 공적인 차원의 사회관계는 모든 것을 권력관계에 따라 조정하고 통제한다. 이런 까닭에 국가는 전체집단의 권력욕이 공적인 사회조직으로 결집되어 드러난 하나의 거대한 권력 장치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친애욕 성애욕 권력욕과 같은 인륜욕을 갖고 있지만 인간관계에 언제나 호의적이지는 않다. 사람들은 인간관계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 갈등과 다툼, 성공과 실패 등에서 지겨움 ․ 괴로움 ․ 고독감 ․ 무력감 등을 느끼는 경우에는 공격적인 방식으로 인륜을 파괴하거나 도피적인 방식으로 인륜을 이탈하는 행동을 시도한다. 어떤 인간은 인간관계를 혐오하게 되면 물리적 ․ 정신적 폭력을 동원하여 인륜을 파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예는 가족이나 동료, 이웃, 낮선 사람들을 말로써 괴롭히는 경우, 물리적 폭력으로 상처를 입히는 경우, 더 이상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도록 목숨을 빼앗아버리는 경우 등이 있다. 반면에 어떤 인간은 인간관계를 혐오하게 되면 인륜으로부터 도피해버린다. 이러한 예는 혼자서 고독하게 지내는 경우, 정신이상이 되어 인간관계가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도록 만드는 경우, 스스로 생명을 끊어 인간관계를 완전히 부정해버리는 경우 등이 있다. 또한 인간은 다른 것을 위한 수단으로서 특정한 인간관계를 무시하거나 부정함으로써 인륜을 파괴하는 예도 볼 수 있다. 인간은 재물 ․ 권력 ․ 애정 등을 위해서 사기 ․ 강도 ․ 강제 ․ 억압 등의 방법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목숨을 빼앗는 것을 볼 수 있다. 법정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범죄가 이러한 데서 연유하고 있다.

 

 

<초월욕>

 

  끝으로 인간은 생각 작용에 따라 물질의 법칙에 지배되는 사물의 세계를 벗어나 가능과 불능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초월의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 인간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어떠한 관념도 구성해 낼 수 있기 때문에 초월의 세계는 일상적인 것으로 존재한다. 인간은 구체적 사물 세계에서의 경험과 실현이 불가능한 것을 초월의 세계에 근거하여 자유로운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려는 욕심을 갖는다. 인간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의 관념에 기초하여 초월세계에 존재하는 선녀나 천사와 관계를 맺으며,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가는 ‘영생’의 관념에 기초하여 초월세계에 존재하는 영혼이나 불사조와 관계를 맺는다. 인간은 선녀 천사 영혼 불사조 등을 통해서 가능과 불능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초월적 방식으로 자유롭게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인간이 이러한 욕심을 갖게 되면 구체적 사물세계를 초월세계에 부응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고 노력한다. 하나의 예로 인간은 종교적 초월을 소망하게 되면서 사물세계를 종교세계로 이끌어 역사적으로 다양한 종교의 왕국들을 건설해 나온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이 초월의 세계에 근거하여 대상과 관계를 구성하고 실현하려는 욕망을 초월욕(desire of transcendence)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가능과 불능이 존재하지 않는 초월적 방식으로 관계를 구성하는 것은 초월하고자 하는 상태의 성격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이 구체적 사태에 국한된 특정한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초월적 방식으로 관계를 구성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모든 사태에 적용되는 보편적 법칙을 벗어나기 위해 초월적 방식으로 관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이 하늘을 날아다니고자 하는 욕심을 갖고 있는 경우에도 비행선이나 비행기 같은 물질적 형태로 한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고, 천사나 선녀처럼 비물질적 형태로 한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먼저 인간이 비행선이나 비행기에 대한 소망처럼 물질 형태로 한계를 초월하려는 것은 새와 같은 구체적 사물에 비교된 인간의 상대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물질을 조작하여 비행선이나 비행기를 만들어서 ‘새’에 대한 상대적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추월에 대한 욕망을 해소할 수도 있다. 만약 인간이 비행선이나 비행기를 통해서 하늘을 날고자하는 욕망을 충족시킨다면 비행은 더 이상 추월욕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처럼 인간이 특정한 한계를 초월하는 것을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우에는 초월욕으로 존재하지 않고 물질욕 또는 인륜욕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다음으로 인간이 천사나 선녀에 대한 소망처럼 비물질적 형태로 한계를 초월하려는 까닭은 천사나 선녀가 존재하는 초월의 세계를 전체적으로 전제하기 때문에 물질의 형태로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천사나 선녀는 내세 ․ 천당 ․ 영생 등에 기초하기 때문에 비행기나 우주선처럼 물질로 만들 수 없다. 천사나 선녀는 가능과 불능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추월의 세계에 근거하여 영원히 초월욕의 대상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이 보편적 법칙을 벗어나 존재하는 초월에 세계에 기초하여 관계를 구성하려는 소망만을 초월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현실에서 주어진 구체적 사물의 세계에 불만을 갖는 동시에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상태를 꿈꾼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은 관념에 기초하여 구체적 사물의 세계를 넘어선 이상의 세계를 형성하고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면 인간을 죽음을 한계로 인식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소망하게 되면, 죽음이라는 보편적 법칙을 추월하려고 한다. 인간은 사물의 세계에는 이러한 소망을 실현시킬 수 없기 때문에 가능과 불능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초월세계를 통해서 실현하려고 한다. 이로써 인간은 추월의 세계에 근거하여 한계를 극복하려는 삶을 지향한다. 인간은 종교와 같은 방법으로 추극의 근거가 되는 절대적 존재를 설정하여 관계를 맺음으로써 초월의 세계로 나아간다. 인간은 신이나 본체와 같은 절대적 존재에 내포되어 있는 진리 영원 무한 영생 등과 같은 속성을 좇아 불변의 안정된 관계를 맺으려 노력한다.

 

  인간이 초월욕을 갖는 것은 구체적 사물의 세계를 불안하거나 부자유하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구체적 사물의 세계에서 경험하는 고통 불안 무료 등을 불쾌하게 생각하여 쾌락 안정 변화 등을 가져올 수 있는 자유로운 관계맺음을 지향한다. 이에 따라 인간은 이상적 관계, 완전한 관계, 공상적 관계 등을 구성하고 실현하려는 소망을 갖는다. 특히 인간은 구체적 사물세계에서 고통의 정서가 지속될 때 이러한 소망을 강하게 갖는다. 그들은 구체적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신에 초월적 방식으로 문제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이런 관계로 인간은 어려움에 처하면 상상의 세계에 도피하여 위안을 구하려는 일이 많다. 흔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현실적 기반을 갖지 않은 달콤한 생각들에 빠져드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들 가운데는 상상의 세계로 도망하여 다시 구체적 사물의 세계로 돌아올 수 없는 상태에 이르는 병적인 경우도 생겨난다.

 

  초월욕은 인간이 생각의 주체로서 상징을 바탕으로 관계맺음을 구성할 수 있을 때 나타나는 까닭에 언제나 욕망의 형태로 존재한다. 초월욕은 인간에게만 존재할 수 있는 독특한 성격의 욕망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추월욕을 갖고 있지는 않다. 영아는 언어를 습득하지 못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욕구를 욕망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불가능하여 초월욕을 가질 수 없다. 또한 유아는 언어를 습득하여 추상적 사고를 시작하게 되지만, 관계맺음의 성격이 구체적 사물의 세계를 벗어나기 어려운 관계로 순수한 형태의 초월욕을 갖기 어렵다. 순수한 형태의 초월욕은 아동이나 청소년 단계에 발생하여 성인의 단계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간다. 그러나 성인의 경우에도 개인이나 집단에 따라 초월욕의 성격과 내용에 큰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초월욕을 삶의 근거로 생각하여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초월욕을 허망한 것으로 생각하여 거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인간이 초월적 관계맺음을 욕망하는 것은 현재의 상태보다 더욱 확대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욕망에서 ‘망(望)’은 ‘바로 이곳을 넘어서 멀리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생각의 주체로서 확대된 시공의 근거하여 조망(眺望 ․ 전망(展望) ․ 관망(觀望) ․ 소망(所望)할 수 있다. 인간은 욕망에 근거하여 초월적 관념을 구성함으로써 끊임없이 현재의 상태를 넘어선 새로운 세계로 옮겨간다. 이러 까닭에 인간이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본 세계는 언제나 점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에게 현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새로운 세계로 전환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인간이 초월욕의 근거인 초월의 관념을 구성하는 것은 생각의 주체로서 언어에 바탕한 문장 놀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문장놀이를 통해 무한한 가지 수의 관계맺음을 관념으로 구성하는 가운데 구체적 사물의 세계를 벗어나 존재하는 초월적 관념을 구성한다. 인간이 문장 놀이를 통해 초월적 관념을 구성하는 방식은 대략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인간이 구체적 사물의 세계에서 구성된 관계맺음을 개념적으로 연장시켜 나감으로써 사물의 세계가 포섭할 수 없는 초월적 관념을 구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은 하나, 둘, 셋과 같은 방식으로 숫자를 계속 확장해 나가면 끝이 없는 무한의 수학적 세계로 나간다. 그런데 이러한 무한의 세계는 한계를 설정할 수 없기 때문에 구체적 사물의 세계가 포섭할 수 없는 초월적 관념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이것, 저것, 그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계속 포함시켜 나가면 결국 모든 것을 포함하는 궁극적인 전체로 나간다. 그런데 이러한 궁극적 전체는 한계를 설정할 수 없기 때문에 구체적 세계가 포섭할 수 없는 초월적 관념에 속한다.

 

  둘째, 인간이 구체적 사물의 세계에서 구성된 관계맺음을 개념의 전환을 통해서 구체적 사물의 포섭할 수 없는 초월적 관념을 구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은 구체적 사물의 세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사실에 근거하여 ‘사람은 걸어 다닌다’라고 말할 때, ‘걸어’를 ‘날아’로 전환하게 되면 ‘사람은 날아다닌다’라는 새로운 관계맺음을 구성한다. 그런데 ‘사람은 날아다닌다’는 구체적 사물의 세계에서는 경험될 수 없는 초월적 관념에 속하는 관계맺음이다. 이런 까닭에 사람의 모습으로 날아다니는 것은 초월적 존재로 설정되어 있는 천사나 선녀만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죽음 이전에 살아 있음’이라고 말할 때, ‘이전’을 ‘이후’로 전환시키게 되면 ‘죽음 이후에 살아 있음’이 된다. 그런데 ‘죽음 이후에 살아 있음’이라는 개념은 구체적 사물의 세계에서 경험될 수 없는 초월적 관념에 속하는 관계맺음이다. 인간은 이러한 것으로부터 내세라는 초월적 세계를 구성해 낼 수 있다.

 

  셋째, 인간이 구체적 사물의 세계에서 구성된 관계맺음을 개념의 유비나 대비를 통해서 사물의 세계가 포섭할 수 없는 초월적 관념을 구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은 개념의 유비를 통해 ‘인간의 마음’에서 ‘하늘의 마음’이나 ‘바위의 마음’과 같은 것을 구성해 낼 수 있다. 하늘의 마음이나 바위의 마음은 구체적 사물의 세계에서는 경험될 수 없는 초월적 관념에 속하는 관계맺음이다. 또한 인간은 개념의 대비를 통해 ‘삶의 세계’에 대비되는 ‘죽음의 세계’를 구성해 낼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삶의 세계’에 속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는 경험될 수 없는 초월적 세계에 속한다. 인간이 죽음의 세계가 담고 있는 내용을 경험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문화(文化, 언어)를 통해서 형성하는 욕망의 세계는 ‘바로 이곳을 넘어서 멀리 바라는 것’에 기초한 초월성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이 미래에 대한 전망이나 희망을 통해서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것은 현재를 초월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초월은 특수한 형태가 아니라 보편적 형태로 존재한다. 모든 삶의 국면 속에 초월은 존재한다. 단지 개인이나 집단이 처한 상황에 따라 초월성의 정도나 내용에 차이가 날 뿐이다. 이런 관계로 개인이나 집단이 지향하는 초월성을 전체적으로 통할하는 종교가 삶의 바탕을 이룬다. 인간과 종교가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은 ‘갖지 않은 것’이 하나의 종교를 형성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모든 인간은 초월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종교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초월적 관계맺음을 통해 초극하려는 구체적 사물의 세계는 두 개의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인간이 구체적 사물의 세계를 기계적 인과법칙에 구속되어 선택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모습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초월하여 자유로워지려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경우에 구체적 사물의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관계맺음은 기계적 방식으로 전개되는 원인과 결과를 좇아서 이루어지고, 인간은 인과의 법칙에 묶여 살아가는 부자유하고 무력한 존재로 남는다. 이로 인해 인간은 자유를 바탕으로 유력한 존재가 되기 위해 구체적 사물의 세계를 의지를 통해서 초월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인과법칙을 넘어서는 자유의 주체가 됨으로써 유력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반면에 다른 하나는 인간이 구체적 사물의 세계를 종잡을 수 없도록 무상하게 변화하는 모습을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초월하여 안정되려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은 꿈의 세계처럼 무상하게 전개되는 변전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인간은 어떠한 확고한 지향도 할 수 없는 부자유하고 무력한 존재로 남는다. 이로 인해 인간은 일정한 법칙을 바탕으로 유력한 존재가 되기 위해 구체적 사물의 세계를 법칙을 통해서 초월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무상함을 넘어서는 법칙의 주체가 됨으로써 유력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인간이 구체적 사물의 세계를 벗어나 자유로운 방식으로 관계를 구성하고 실현하려는 초월에 대한 욕심은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두 개의 상반된 성격을 갖는다. 즉, 하나는 인간이 인과의 구속에서 벗어나 의지에 따라 변덕을 부릴 수 있는 선택(選擇)의 자유로움을 잘하고, 다른 하나는 무상한 변덕으로부터 벗어나 법칙에 따라 안정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순리(順理)의 자유로움을 말한다. 이로 인해 인간은 변덕을 부릴 수 있는 선택의 자유와 법칙을 따를 수 있는 순리의 자유를 동시에 원하는 모습의 모순을 갖는다.

 

  먼저 인간은 공상이나 몽상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게 되면, 구체적 사물세계에서 볼 수 있는 인과법칙을 벗어나 ‘마음이 가는 대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공상이나 몽상 속에서는 어떠한 관계맺음도 가능하기 때문에 인단이 현란하게 변덕을 부리며 재미를 맛볼 수 있다. 인간은 공상이나 모상을 통해서 현실적으로 충족이 불가능한 욕심을 가상적 방식으로 충족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관계맺음을 통해서 변덕의 자유는 부릴 수 있지만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놓인다. 질서 있는 관계맺음이 어렵게 되고, 다른 사람과의 효과적 소통은 더욱 어렵다. 인간은 이러한 관계맺음을 현실과 연결시켜 구체적 결과를 낳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러한 것은 잠 속에서 이루어지는 꿈의 세계에 잘 드러나고 있다. 꿈은 인간이 깨어나는 순간에 허망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인간은 도리어 허망한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에 관계를 새롭게 창조하고, 새로운 세계를 실현시켜 나갈 수 있다. 인간은 허망할 수도 있는 꿈을 실현시켜 보려는 노력의 결과 종교 ․ 학문 ․ 기술 등을 발전시켰다.

 

  반면에 인간이 진리나 영원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면, 구체적 사물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무상한 변화를 벗어나 어떠한 변덕도 허용되지 않는 안정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이 절대성을 갖는 대상과 관계를 맺으면 생각의 주체로서 갖고 있는 마음의 불안정성 또한 안정될 수 있다. 인간은 이러한 형태의 관계맺음을 통해서 주체의 불안정성을 근원적으로 극복하려고 시도한다. 즉, 인간은 진리나 영원을 체득하고 체현함으로써 생각의 주체로서 갖게 되는 변덕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질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인간은 완벽한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불변의 진리나 무한의 영원을 탐구한다. 인간이 종교적 믿음이나 과학적 이론에 매달리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인간이 종교나 과학을 통해 진리나 영원에 기초한 안정된 관계를 맺고자 하지만 어떠한 종교나 과학도 인간의 욕망에 내포된 변덕을 잠재울 수 있을 만큼 완벽한 상태를 준비하고 있지 못하다. 이 때문에 인간이 종교나 과학을 통해 진리나 영원에 기초한 대상과 관계를 맺게 되면 주체가 갖고 있는 자유의 일부 또는 전부를 상실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절대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는 인간에게 허용된 자유는 ‘~에’ 순종하거나 순응하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절대적인 것이 문화 속에서 구체적 제도로 존재하게 될 때는 불완전함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에’ 순종하거나 순응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런 관계로 종교나 과학은 인간을 해방시키는 동시에 구속하는 이중적 성격을 띤다. 종교는 인간을 불안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동시키지만 신조에 따라 구속되도록 만드는 반면에 과학은 인간을 미신으로부터 해방시기지만 인과에 구속되도록 만든다.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세계는 다양한 욕심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모습으로 존재한다. 삶이라는 하나의 과정 속에 대사 ․ 감각 ․ 지각 ․ 생각의 주체가 통합되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질욕과 인륜욕과 초월욕 등에 주체들의 필요에 따라 목적과 수단의관계로 상호 엮어져 보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이 물질적 대상이나 초월적 대상과 관계맺음이 인륜욕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과 관계맺음 또한 물질적 대상이나 초월적 대상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관계로 삶 속에서 물질욕과 인륜욕과 초월욕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경우는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출처 : 사색의 숲
글쓴이 : 심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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