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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간 존재의 이해 제2장 인간과 관계맺음의 주체-(2) 주체의 성격과 관계맺음의 방식

반찬이 2010. 1. 14. 11:16

2) 주체의 성격과 관계맺음의 방식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는 달리 인간에서만 볼 수 있는 점을‘독자성’또는‘고유성’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인간이 대상과 관계를 맺을 때 대사 ․ 감각 ․ 지각 작용을 통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고 공감하는 데도 불구하고, 오로지 생각 작용만을 주체의 근거로 내세우며‘인간을 주체를 갖고 있는 유일한 존재’로서 주장하는 일이 많다. 이렇게 되면 주체의 유일한 근거인 생각 작용이 절대적 지위를 갖게 되어, 인간은 생각의 주체로서 대사 감각 지각 작용의 단계에 머물고 있는 대상을‘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갖는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주체를 그러한 의미로 국한하여 사용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문제들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인간을 오로지 생각의 주체로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생각의 방식과 내용이 계속 변화하는 관계로 모든 인간이 동일한 정도로 생각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성장과 퇴화의 과정을 통해서 생각작용이 발전 또는 쇠퇴하면서 생각의 주체 또한 성격을 달리한다.

 

  ‘인간’이란 낱말이 특정한 부류에 속하는 모든 생물체를 가리키는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주체의 성격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일반적으로‘인간은 존엄하다’고 말하거나 ‘인간은 먹어야 산다’고 말하는 경우에‘인간’은 남녀 ․ 노소 ․ 선악을 구별하지 않은 모든 인간을 의미한다. 반면에 영아나 유아를 보고‘인간이 되어간다’라고 말하거나 나쁜 행동을 하는 성을 보고‘인간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경우에‘인간’은 특정한 내용의 인간, 생각의 주체로서 정상적으로 판단하고 실천할 수 있는 성숙된 인간을 뜻한다. 유치한 행동을 하는 성인의 경우에는 생각의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에‘인간이 되지 못한’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까닭에 사람들이 최소한 모든 인간에게 주체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대사 ․ 감각 ․ 지각 ․ 생각의 주체를 함께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생명을 실현하는 삶의 주체라는 점에서 모든 생물체와 동일한 성격을 갖는다. 만약 인간이 삶의 주체라는 점에서 가치로울 수 있다면, 삶의 주체로서 살아가는 다른 모든 생명체도 인간처럼 가치로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인간은 물질대사의 주체라는 점에서 가치로울 수 있다면, 물질대사의 주체로 살아가는 다른 모든 생명체도 인간처럼 가치로울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물질대사와 다른 생명체에게 일어나는 물질대사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감각 ․ 지각 ․ 생각의 주체에 대해서도 모두 동일하게 적용된다. 즉, 인간이 감각 ․ 지각 ․ 생각의 주체라는 점에서 가치로울 수 있다면 그러한 주체성을 구비하고 살아가는 다른 모든 생명체도 그에 상응하는 정도만큼 가치로울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생명체로서 인간이 갖는 주체성이 오로지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모든 생명체와 공유될 수 있는 것임을 말한다.

 

  인간은 언어에 바탕하여 추상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생각의 주체라는 점에서 분명히 특별히 가치로운 존재이다. 사람들이 인간을‘모든 것을 이해하고(omniscience)', 모든 것을 할 수 있는(omnipotence)' 절대자(the Absolute)에 비유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인간이 생각의 주체라는 점은 대사 ․ 감각 ․ 지각의 주체에 기반하여 성립한 것이다. 즉, 생각의 주체는 지가의 주체에 기반하고, 지각의 주체는 감각의 주체에 기반하고, 감각의 주체는 대사의 주체에 기반하고 있다. 만약 대사 감가 지각으로 이어지는 기반의 연쇄가 무너지면 생각의 주체 또한 성립할 수 없다. 이러한 중첩된 관계의 연쇄가 무너지면 생각의 주체 또한 성립할 수 없다. 이러한 중첩된 관계의 연쇄를 이해한다면 인간이 생각의 주체로서 갖는 가치로움이 대사 감각 지각의 주체로 확대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대사의 주체가 기초하고 있는 물질의 세계까지 확장될 수 있다. 이로써 ‘나’에 대한 사람을 삼라만상의 모든 것으로 확대하여 펼치는 우주적 사랑 또한 인간에게 가능하다.

 

  인간이 주체성을 발휘하는 양상은 주체와 대상이 관계를 맺는 구체적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즉, 주체와 대상이 각각 대사 감각 지각 생각 중에서 어떠한 형태로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다양한 관계가 설정된다. 인간이 인간과 관계를 맺는 경우에도‘나’의 주체와 ‘너’의 주체가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에 따라 생각의 주체인‘나’가 생각이 주체인‘너’를 만날 수도 있고, 대사의 주체인‘나’가 생각의 주체인‘너’를 만날 수도 있다. 이로 인해 관계맺음의 성격이 달라지면서 주체성이 발휘되는 양상 또한 크게 달라진다. 인간에게는 주체성이 최대로 발휘될 수 있는 상태에서 대상과 관계맺는 일이 중요하다. 이것을 위해 인간은 대사 ․ 감각 ․ 지각 ․ 생각의 주체가 올바르게 기능할 수 있도록 적절하게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생각의 주체에 바탕하여 진위 ․ 시비 ․ 선악 ․ 미추와 같은 가치의 세계를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은 가치의 세계 속에서 판단과 선택의 자유를 좇아서 대상과 창조적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나’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너’를 품을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으며,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이런 까닭에 인간은 가치가 개입되면 생각의 주체로서 대상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도덕적 의무를 갖는다. 반면에 생각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개나 돼지는 어떠한 도덕적 의무도 갖지 않는다. 인간은 개나 돼지가 지각의 주체로서 살아가는 것을 완성된 삶으로 보기 때문에 더 이상의 요구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개나 돼지처럼 살아간다면 이완성의 삶으로 보아 생각의 주체로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인간이 생각의 주체로서 대상과 만나는 경우에 주체성이 발휘되는 모습을 네 가지로 구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이‘나’라는 생각의 주체로서‘너’라는 생각의 주체를 대상으로 만나게 되면 생각 ․ 지각 ․ 감각 ․ 대사의 주체성을 공유한다. 이로써 인간은‘나’에게 적용되는 모든 주체성을‘너’에게도 주체성을 동일하게 인정할 수 있다. ‘나’와 ‘너’는 모든 형태의 주체성을 공유하는 동시에 생각 작용과 지각 작용에 기초하여 발생하는 이해(mutual-understanding)를 소통하고 정서를 동정(sympathetic)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너’라는 대상이 생각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즉 갓 태어난 영아는 물론이고 잠자고 있거나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 등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이 관계를 맺을 때, 모든 형태의 주체성이 동일하게 인정되어야 하는 윤리적 의무의 근거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인간이 ‘감정이입(empathy)'의 형태로 생각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대상을 인간과 같은 생각의 주체로서 인정하고 관계를 맺는 경우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돌째, 인간이 ‘나’라는 생각의 주체로서‘너’라는 지각의 주체를 대상으로 만나게 되면 지각 감각 대사의 주체성을 공유한다. 이로써 인간과 대상은 지각의 세계에 기초하여 발생하는 정서, 즉 충족과 결핍 만남과 이별 등에 관련한 즐거움과 괴로움을 동정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생각의 주체인 인간이 지각의 단계에 머물고 있는 영아와 정(情)을 나누는 기본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인간이 지각의 세계를 살아가는 개나 고양이 등을 기르며 정을 나누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럴 때 사람들은“신의와 배신을 오갈 수 있는 인간보다 오로지 충직한 개가 더욱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개가 지각의 주체로서 보여주는 단순함이 인간이 생각의 주체로서 보여주는 변덕보다 낫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개나 고양이 등이 지각의 주체에 지나지 않지만 즐거움과 괴로움의 정서를 주체의 자격으로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

 

  셋째, 인간이 ‘나’라는 생각의 주체로서 ‘너’라는 감각의 주체를 대상으로 만나게 되면 감각과 대사의 주체성을 공감한다. 그런데 인간은 대상이 지각의 주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감각과 대사에 따른 관계 맺음을 정서로서 동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간이 이러한 대상과 감각과 대사이 주체성 공감은 인간의 일방적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때 대상은 감각된 내용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과정으로서 인간에게 정서의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관계로 인간은 죽어가는 지렁이의 고통을 동정할 수 있지만, 지렁이는 이러한 인간의 정서에 대해 어떠한 반응도 할 수 없다. 이런 경우에는 동정의 능력을 갖고 있는 인간이 그렇지 못한 대상을 향해 정(情)을 줄 때에만 주체성을 공유한다. 이런 이유에서 인간은 감각의 주체에 머물고 있는 지렁이와 같은 미물조차 함부로 해치지 않으려는 생각을 갖는다.

 

  넷째, 인간이 ‘나’라는 생각의 주체로서 ‘너’라는 대사의 주체를 대상으로 만나게 되면 대사의 주체성을 공유한다. 그런데 대상은 감각 작용조차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사에 따른 관계맺음이 감각의 형태로도 나타나지 않는다. 인간이 대상과 대사의 주체성을 공감하는 것은 인간에 의한 일방적 형태로 이루어진다. 대상은 인간에게 단순히 대사에 기초한 생명의 모습만을 보여줄 뿐이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대상을 흔히‘식물같은 존재’로 비유한다. 인간은 이러한 대상과는 전혀 동정이 불가능하다. 인간이 혼수상태에 빠져 전혀 반응할 수 없는 사람을 일컬어‘식물인간’으로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감정지입을 통해서 대상을 감각 ․ 지각 ․ 생각의 차원에 끌어들임으로써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동정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식물처럼 대사의 주체가 중심을 이루는 경우에도 사람을 대하듯 동정에 기초하여 사랑을 줄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인간은 싱싱하게 자라나는 식물을 보면 기뻐하고, 시들거나 죽어가는 식물을 보면 애석해 한다.

 

  이렇게 볼 때 생각의 주체로서 인간은 어떠한 생명체와 관계를 맺더라도 모든 형태의 주체성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 그들은 주체성 공유가 어렵거나 불가능한 경우에‘감정이입(empathy)'의 방법을 사용하여 가능케 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로 인간은 무생물을 대상으로 만나더라도 생명의 근거가 되는 점에서 생명관계에서 발생하는 주체성을 확대하여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무생물인 바위나 물과 같은 존재와도 생명으로서의 주체성을 나누어 갖는 것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인간이 생각의 주체로서 대상과 관계맺음 자체가 윤리적 가치를 지닐 수 있다. 생각의 주체가 될 수 없는 대상이라도 인간을 통해서 생각의 대상이 됨으로써 윤리 속으로 포섭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생각의 주체를 확대하여 윤리적으로 감싸 안을 수 있다는 점에서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인‘절대자’에 인간을 비유하여 말한다.

 

  절대자는 인간이 생각의 주체로서 갖고 있는 능력을 완벽한 형태로 확대해 놓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절대자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전지전능의 존재이다.절대자는 아무런 구속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자유의 세계에 존재하는 까닭에 현실의 세계에 구속되어 있는 인간과 분명히 구분된다. 그렇지만 인간은 주체성을 확대하여 모든 것을 감싸 안을 때 절대자의 모습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반면에 인간은 생각의 주체성을 ‘나’의 세계로 축소할 때 현실에 끌려가는 삶을 살아가게 됨으로써 점차 절대자의 모습에서 멀어진다. 만약 인간이 생각의 주체성을 모두 닫아버린다면 감각이나 지각의 세계를 살아가는 다른 동물들 보다 더욱 비주체적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

 

  인간이 삶의 주체로서 갖고 있는 대사 ․ 감각 ․ 지각 ․ 생각 작용은 여러 가지 이유로 결함이 초래될 수 있고, 이로 인해 주체의 실현에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인간은 대사의 주체에 결함이 있으면 물질대사에 장애가 발생한다. 이로 인해 몸의 정상적 기능이 어려워지고, 심하면 몸의 소멸을 뜻하는 죽음에 이른다. 둘째, 인간은 감각의 주체에 결함이 있으면 자극- 감각- 반응에 장애가 발생한다. 이로 인해 인간은 감촉 ․ 색깔 ․ 냄새 등을 감각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미약하거나 과도하게 감각하여 자극에 대해 적절히 대응할 수 없다. 감각하는 몸이 특정한 물질에 대해 과도하게 반응하여 알레르기를 일으켜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인간은 지각의 주체에 결함이 생기면 감각-지각-대응에 장애가 온다. 이로 인해 인간은 거리 위치 시간 등의 이해에 문제가 발생하여 물리적 환경의 이해조차 어려워진다. 넷째, 인간은 생각의 주체에 결함이 생기면 지각-생각-실천에 장애가 온다. 이로 인해 판단력 저하에 따른 ‘생각이 없는 행동’,‘정신이 나간 행동’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정서의 불안정으로 말미암아‘강박적 행동’, ‘파괴적 행동’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사람들이 흔히‘마음에 병이 났다’라고 말할 때 병은 생각의 주체에 발생하는 장애를 말한다.

 

  인간은 대사 ․ 감각 ․ 지각 ․ 생각의 주체에 심각한 결함이 있는 사람들과도 보완적 관계를 통해서 더불어 살아가려고 한다. 인간은 주체성의 발현과 능력이라는 점에서 개인 사이에 차이가 나게 되고, 극단적으로는 성인이나 천재가 있는가 하면 악인이나 천치가 있다. 인간은 개인이 갖고 있는 다양한 능력을 나누고 보완하는 삶을 살아간다. 인간은 주체에서 발생하는 결함을 집중적으로 치료하고 교정하기 위해 병원이나 교도소를 발전시켜 왔다. 이러한 점은 다른 생물의 세계에서 볼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이 생각의 주체로서 더불어 살아가는 능력은 다른 생물의 세계와는 달리 윤리적인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인간은 주체가 달라짐에 따라 동일한 대상과 관계맺음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 즉, 인간이‘쇠고기를 구입하고’,‘불고기를 먹고’,‘단백질을 흡수하고’,‘아미노산을 이용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생각과 지각의 주체로서 쇠고기를 구입하여 불고기라는 음식을 만들고, 지각과 감각의 주체로서 불고기를 맛있게 먹고, 감각과 대사의 주체로서 소화기관에서 단백질을 흡수하고, 대사의 주체로서 아미노산을 이용하고 배출한다. 이런 까닭에 인간은 생각과 지각의 주체가 ‘아미노산을 먹는다’고 말하지 않고, 감각과 대사의 주체가 ‘고기를 먹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은 쇠고기와 단백질과 아미노산이 동일한 것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맺는 주체가 다르기 때문에 소고기를 구입하고, 불고기를 먹고, 단백질을 흡수하고, 아미노산을 이용하는 것으로 구분한다.

 

 

 

출처 : 사색의 숲
글쓴이 : 심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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