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종교, 이단 조심/안티-나주성모상(이단)

나주 윤율리아 사건 해결을 위한 제언

반찬이 2010. 5. 30. 23:04

1) 영적체험에 대한 올바른 태도와 겸손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교회의 공인을 받은 발현 체험자들의 공통점은 ‘자신에게 선물처럼 주어지고 발생하는’ 체험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교회에 알리고 그에 대한 판정을 기다렸다. 파티마와 루르드 성모님 발현지의 체험자는 어린이들이었다. 그리고 과달루페 발현을 목격한 사람은 순박한 농부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생각을 보태거나 자기주장을 하지 않고 자신의 체험을 있는 그대로 교회에 전달했을 뿐이다. 그 사건을 체험자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선물로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관계되는 사람에게 전달하면 체험자의 일은 완수되는 것이다. 성령의 활동은 공동선을 위해 주어지는 선물이다. 따라서 체험자는 이적현상이나 메시지의 소유자가 아니다. 요즘말로 해서 발현 목격 체험을 ‘재산권’이라고 한다면, 그 소유권은 체험자가 아니라 교회에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것을 꼭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인준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체험자의 책임도 아니고 체험자가 애를 쓸 일도 아니다. 그저 책임자인 교회에 알리고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체험자(증거자)로서의 바람직한 태도인 것이다. 그래서 체험자의 겸손과 교도권에 대한 순종을 가장 중요한 식별 기준의 하나라고 한 것이다.

율리아에게 애초에 어떤 기이한 현상이 실제로 일어났을지 모른다. 그때 율리아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는 성모님의 모범을 따랐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나 십자가의 성 요한이 강조했듯이 외적 표징에 너무 쉽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성령으로부터 오는 내적 표지와 삶의 열매(사랑)를 더 중요시하여,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의 의미를 겸손하게 알아듣고자 노력하며, 바깥에 알리기보다 먼저 그 정신을 살고자 하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율리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제라도 율리아는 자신의 체험과 주장을 인정받는 일에 몰두하기보다는 이미 내려진 교도권의 판단을 사심없이 받아들이고 순명해야 한다. 예수께서도 “형제가 잘못하거든... 교회에 알리라.”(마태 18,15-17)고 하여 공동선을 위한 판정권이 교회(교도권)에 있다고 하셨다. 그러니 자신의 옮음을 주장하며 스스로 세력을 형성하고 교회에 저항하면서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지 말고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고 교도권에 따라야 한다.

 

 

 

  2) 영적 지도자에게는 특별히 신중함과 성숙한 교회정신이 필요하다.

  영적지도자가 초기에 잘 대응하였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확대되지 않고 미담으로 끝났을 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본당 신부가 3개월간 그 성모상을 사제관에 모시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돌려주었는데, 그때 잘 타일러서 격려와 위로를 해주고 ‘영적 체험자’로서 지녀야할 덕목을 일러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영적지도자가 외적 표징을 우선시 하지 않고 또한 성급하게 판단하여 홍보하지 않고, 관할 책임자와 긴밀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신중하게 이 문제를 대했어야 했다. 그리고 늦게라도 교도권의 선언을 받아들이고 그 결정에 순명하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개인적인 체험과 신념을 앞세워 교도권을 무시하고 나주현상에 개입한 성직자만 없었더라면 이렇게 분열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도자의 영향이 극과 극으로 갈릴 수도 있음을 생각하여, 사제 양성 과정에서부터 어느 한 신심에 치우침이 없도록 해야 하고, 올바른 교회관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3) 교회는 신중한 태도와 열린 마음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교회 당국에서는 12년이 넘어서야 최초의 공적인 판단을 내렸다. 너무 늦지 않았느냐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는 기적이나 사적계시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따른 신중함 때문이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사도 5,38-39) 그러나 이후 두 번에 걸쳐 공지문과 사목지침을 발표하며 교도권에 대한 순명과 교회와의 일치를 권고했지만 이에 불순명 하였기에 마침내 자동처벌 파문제재에 해당하는 교령을 발표하게 되었다. 하지만 교회는 결코 이들에 대해 어떤 예단을 갖지 않고 언제든지 마음을 바꾸어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비록 율리아와 그 추종자들이 복음과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편향된 신심행위로 교회로부터 떨어져나갔지만, 공지문과 교령에서 반복하여 언급했듯이, 교회는 자부적 사랑으로 언제든지 다시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인내롭게 유지해야 할 것이다.

 

 

 

  4) 영성생활에 있어서 정서적인 측면도 존중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는 말씀처럼, ‘보거나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2코린 5,7; 참조: 로마 8,24-25).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는 어떤 표징들을 원하고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에는 이성만으로 또는 감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하느님을 인식하고 믿는 데는 이성만이 아니라 감성도 필요하다. 그러므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신앙과 이성은 진리이신 하느님을 향해 날아오르는 두 개의 날개와도 같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성만을 강조하거나 또는 감성만을 강조하면 신앙생활에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난다. 감성만을 강조하게 되면 맹목적이거나 맹신적 경향을 띠게 되고 이성만을 강조하게 되면 마음이 메마르고 무미건조하게 된다.

이적현상 또는 사적계시에 매달리는 현상은 마음이 메마르고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에서 충족할 수 없는 종교적 욕구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영적갈증을 느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톨릭교회가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교리와 제도 중심으로 주지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감성적으로 만족할 수 없는 부분을 사적계시 또는 이적현상으로 충족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신자들의 감성적이고 정서적인 측면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무시하기보다는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5) 치유나 기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믿음과 사랑을 청해야 한다.

  감성과 정서를 배제할 수는 없지만, 십자가의 성 요한이 지적했던 것처럼, 외적이고 감각적인 현상에 집착할 때 오는 위험이 어떠한가를 우리는 충분히 경험하였다. 그 유혹을 이겨내는 방법은 이미 예수께서 가르쳐주셨다. 공생활 시작부터 예수님을 유혹하려다 실패했던 사탄은 다음 기회를 노리며 떠나갔다. 그리고 예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예수님을 유혹했다. 사탄의 유혹은 모두 기적과 관련된 것이었다. 돌로 빵을 만들어 먹으라는 유혹에 당신을 위해서는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군중을 위해서는 빵을 많게 한 기적으로 배부르게 해주셨다. 이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으나 예수님은 이 유혹도 피하셨다(요한 6,15 참조). 또한 ‘십자가 위에서 뛰어 내리면 믿겠다’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뛰어내리지 않으시고 그대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다(참조: 마르 15,29-32). 사탄은 기적을 요구하지만 예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건전한 신앙인은 눈에 드러나는 결과나 치유나 기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믿음과 사랑을 청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의 신앙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는 말씀처럼, ‘보거나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2코린 5,7; 로마 8,24-25)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는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겸손하게 주님을 찾으며 애덕의 실천에 매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세에 동화되지 않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해야 할 것이다(로마 12,2).

 

 

 

  6) 끝으로 신자들이 올바른 신앙생활로 나아가도록 안내하여 다시는 이런 일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나주현상에 대한 모든 것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 공동체가 이런 일에 성숙하게 대처하고, 신자들이 건전한 신앙생활에서 오는 기쁨을 얻을 수 있도록, 성서신학, 교의신학, 전례학, 사목신학, 영성신학, 교회법 그리고 그 외 관련 전문가들이 각각의 분야에서 심층적으로 나주현상에 대한 문제들을 정리하여 백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