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리건(Carol Gilligan)의 도덕성발달 과정
박병춘, 배려윤리와 도덕 교육, 울력, 96 ~ 113
▣ 내용 소개
1970년대 미국을 휩쓸었던 교육학자 콜버그(L. Kohlberg)는 여자의 도덕성이 남자보다 뒤떨어지고 열등하다고 보았다. 그는 소년의 도덕성은 정의(Justice) 지향적이고 독립적이며 이성적이고 주체적인 단계로 발전하는데 비해 소녀의 도덕성은 의존적이고 공동체적고 감정적이어 한 단계 뒤떨어진다고 보았다. 이런 콜버그의 주장에 대해 하버드대 동료 교수였던 길리간(Carol Gilligan)은 콜버그의 이런 주장에는 여성에 대한 편견이 도사리고 있다며 여성의 도덕성 발달이 남성보다 뒤지는 것이 아니며 다만 보는 관점이 다르고,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즉 남성이 ‘정의’와 개인의 ‘권리’라는 관점에서 도덕적 판단을 내리려 한다면 여성은 공동체적 ‘관계’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판단하려 한다는 것이다. 캐롤은 여성은 남자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지 도덕적으로 뒤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길리간의 이 주장에서 소위 ‘배려 윤리’가 출발한다. 추구해야 할 도덕적 이상형은 정의로운 인간이 아니라 배려할 줄 아는 인간, 비폭력적 인간이라고 규정하는 배려 윤리는 도덕성의 핵심 요소를 나 자신을 포함한 타인들에 대한 ‘책임감’, 따뜻한 ‘배려’, ‘동정심’, 타인과의 ‘조화’ 등으로 본다. 인간은 주체적이고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상호의존적 자아’, 이며 ‘관계적 자아’라고 본다.
이런 배려 윤리는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이며 객관적 정의와 권리를 주장하는 도덕 교육에 여성적이고 공동체적이며 감성적 배려와 관계를 주장하면서 바람직한 도덕성은 이 양자를 조화시키고 상호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시했다.
이 글은 이런 길리간의 배려 윤리의 중심에 있는 여성 및 소녀들의 도덕성 발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길리간은 천사 같은 여자’의 이념은 가부장적 사회가 그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다며 이를 깨뜨려 여성들이 자신의 신념과 판단을 표현할 것을 주장한다. 이런 길리간의 주장은 특히 우리 사회에 주는 시사점이 크다. 길리간의 핵심 주장을 파악하고, 그 주장이 타당한지 그렇지 않은지 토론해 보자.
핵심어 : 여성적, 여성주의적, 가부장적 사회구조, 배려, 관계
▣ 더 파악해야 할 문제들
- ‘여성적(feminine)’인 것과 ‘여성주의적(feminist)’인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 ‘천사 같은 여자’는 어떤 뜻이며 이 말 뒤에 숨은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 여성이 ‘자기 소리’를 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여성은, 또 남성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자료 : 청소년기 소녀의 도덕성 발달과정
길리간은 앞 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초기 성인 여성의 도덕 판단의 발달에 대한 연구에서 콜버그의 선형적 발달 개념을 기초로 하여 여성의 도덕발달 과정을 생존에서 선함으로, 선함에서 진리로의 발달로 설명했다. 그러나 후속 연구들에서 길리간은 청소년기 소녀의 발달에 주목하여 발달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주장을 하고 있다. 길리간의 대표적 저서이자 초기 이론을 축약하고 있는 다른 목소리로는 청소년기 이후 소녀들과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대학생 연구,”“임신 중절 결정 연구,” “권리와 책임 연구,”라는 세 가지 연구 결과를 포함하여 기술된 책인데, 청소년기와 그 이전 소녀들의 발달 과정과 특징들은 이 책 안에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길리간은 1990년대 후반 이후 후속 연구들을 통해 청소년기와 그 이전 소녀의 발달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오면서 돋거 발달에 대한 새로운 경로를 추적하고, 이드의 발달에 대해 상이한 해석과 발달을 위한 새로운 이론들을 주장하고 있다.
길리간은 먼저 청소년기의 발달을 재고찰해야 할 이유를 크게 네 가지 제시한 다음, 청소년기 발달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첫째, 아동기에 대한 관점이 크게 변화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재고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아기와 초기 아동기에 대한 최근 연구들은 아동들이 심리학자들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사회적이라는 것을 밝혀 주었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연구들은 아동들이 관계를 시작하고, 지속할 줄 알며, 타인과의 사회적 상호 작용 유형에 참여하며, 그들과 관계를 창조할 줄 알뿐만 아니라 이전에 우리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밝혀 주었다는 것이다. 길리간은 아동기에 대한 이런 급진적 인식 변화로 인해서 청소년기 발달에 대한 재고찰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길리간은 아동기에 나타난 것으로 밝혀진 사회적 반응과 도덕적 관심이 청소년기에 부재한다는 사실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진행하였다.
둘째, 심리학자들이 그 동안 소녀들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해왔다는 점을 들고 있다. 길리간은 기존의 연구들에서 소녀들을 연구하지 않음으로써 소녀들의 관계에 대한 것을 간과해 왔다고 주장한다. 의존의 필요성은 청소년기 모든 소녀들에게 존재하는 것이며, 자아는 타인과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가운데 형성되기 때문에 이들에게 관계의 상실은 자아의 상실과 동등한 것으로 경험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전 연구들은 이런 측면을 인식하지도, 반영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소녀들과 여성들에 대한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져서 평가 기준이 소년과 남자뿐만 아니라 소녀와 여성에 대한 연구로부터 도출될 때까지는 성차에 대한 모든 논의를 보류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동안 자아, 발달, 관계에 대한 연구들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자아와 타자를 상호 연관되고 상호 의존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셋째, 길리간은 인지에 대한 개념들이 추상적 규칙에 근거하고 있는 피아제 이론에 너무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청소년기에 대한 재고찰 필요성을 찾고 있다. 피아제 인지 발달에 대한 개념은 수학과 과학적 사고력 성장에 적합했기 때문에, 1950년대 스푸트니크(sputnik) 발사 이후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학교 교육 과정에서 수학과 과학 과목들만 강조되었고, 역사, 문학, 예술 같은 과목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되어 교양 교육과 인본주의적 교육이 쇠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피아제 이론은 인본주의 교육에 아무런 이론적 근거도 제공해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학교 교육 정상화를 위해서는 이런 교양 교육과 인본주의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 길리간의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길리가은, 심리학자들이 그 동안 바달에 대해 몰역사적 접근을 함으로서 개별화, 분리, 자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 발달을 분리와 동일시하고, 독립을 성숙과 동일시하는 것은 세대 간 급진적 단절을 상정하고 있으며, 인간 경험은 근본적으로 역사와 시간으로부터 단절된 것이라는 견해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초기 아동기부터 청소년기까지 부모와 자식 관계는 불평등 관계에서 평등한 관계로 선형적으로 진ㅂ해 가는 흐름과 부모에 대한 사랑과 친밀감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불연속적으로 강화되어 가는 두 가지 흐름으로 구성된다는 피프(Pipp)의 연구 결과는 길리간으로 하여금 두 가지 발달 흐름 중 평등과 독립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는 데 특별한 관심과 주읠를 기울이게 하였다. 기존 발달 심리학은 애착에서 분리로 나아가는 것을 발달로 규정하고, 청소년기 아동들과 부모간의 연결 지속을 의존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분리와 독립만을 강조하고 애착과 상호 의존성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길리간은 이런 측면에서 상호 의존과 연결, 애착과 친밀감을 강조하는 발달 흐름을 밝혀 줄 수 있는 청소년기 소녀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길리간은 위와 같은 필요성에 근거해 청소년기 도덕성 발달을 추적하기 위해 먼저 청소년기 소년과 소녀의 상이한 경험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길리간은 청소년기 소녀들의 경험을 설명하는데 있어 애착과 분리 문제가 핵심적 관점으로 대두한다고 보았다. 청소년 심리에 대한 연구에서 배제되었던 소녀 집단은 반복적으로 청소년기에서 벗어나는데 문제를 가진 것으로 기술되고 있기 때문에 청소년기 발달 이론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소녀들의 경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길리간은 콜버그 발달 이론의 근본적 가정, 즉 발달을 의존에서 독립으로, 즉 인간 관계에 대한 의존에서 자율적 자아로 발달한다고 정의하고 있는 선형적 발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길리간은 초기 발달 이론에서 선형적 진보를 애착에서 자율성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청소년기 소녀들이 인간관계를 이탈하는 것에 저항하고 관계에 애착을 보이는 것을 발달이 아닌 후퇴로 규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단절과 분리를 성숙한 자아 표시로 보고 있는 선형적 도덕 발달론은 의존에서 분리로 이동하는 것이 성숙한 자아를 형성한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년들은 이론 이동에 저항하면서 애착 관계를 게속 맺으려 했으며, 자신들의 관계를 지속하고자 했다. 길리간은 청소년기 소녀들이 의존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으로 정의하고, 분리에 대해 저항을 개별화에 대한 실패가 아니라 진보와 문명화에 대한 다른 해석으로 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해석은 선형적 진보를 더 좋은 형태로 발달한다고 정의하는 기존 해석에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런 해석에서 볼 때 관계에 애착을 보이고 분리에 저항하는 것은 더 발달된 형태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쁜 형태, 퇴보된 형태로 이동하는 것, 즉 발달이 아니라 후퇴, 고착이기 때문이다.
이와 상이한 관점에서 길리간은 발달을 잠재적 능력을 충분히 실현하고 펼치는 것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청소년기 소녀의 발달 양식을 후퇴가 아니라 발달이라고 낙관적으로 규정한다. 다시 말해, 청소년기 소녀들이 관계 이탈에 저항하고 관계에 애착을 보이는 것을 문제가 발생했다거나 발달이 안 되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의미에서 도덕적으로 발달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숙한 자아를 자율성보다는 관계 관점에서 정의해야 한다고 보았던 길리간의 청소년 발달에 대한 낙관적 견해는 청소녀기 소녀들에 대한 또 다른 연구를 통해 부정적 관점으로 전환된다. 길리간과 브라운의 연구에 따르면, 7세에서 10대 중반까지 소녀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견과 신념을 기탄없이 표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8세 이후 소녀들은 여성 행동을 가로막는 인습적 벽에 서서히 직면하면서 이에 도전하기 시작했지만, 자신들이 이전에 가졌던 솔직한 감정과 신념들을 표현하는 것을 억제해 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습적 벽이란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사회적 인습을 의미한다. 이런 인습에서 기대하는 착한 여성이 되기 위해서 여성은 항상 자신을 돌보지 못한 채 타인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배려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 시기의 용기 있고 발랄한 소녀들은 이런 인습에 저항할 수밖에 없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이런 인습에 영향으 받게되어 자신을 억제하려고 한다.
10~11세가 되면 소녀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강력한 감정들을 표현하지 못하게 하는 인습적 압력들과 투쟁해야 한다. 브라운과 길리간에 따르면 7~11세 소녀들의 관계에 대한 인식 가운데 강력한 감정의 표출과 불일치가 있다고 한다.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와 그런 감정을 표출해서는 안 된다는 압력 사이의 갈등이 있다는 것이다. 소녀들은 자발적으로 말하지 않고 관계를 위해서 침묵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도록 하고 침묵을 지키고 비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대단히 억압적인 관계 모델을 수용하도록 강요된다. 그리하여 소녀들은 관계를 위해 관계 밖에 머물러야만 한다.
이것은 타인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과 신념들을 억제하여 착한 여자가 됨으로써 자신의 목소리를 포기하고 자신을 관계로부터 배제시킨다는 것을 뜻하낟. 이들에 따르면 여기서 여성 심리의 균열과 투쟁이 시작된다고 한다. 이 시기 소녀들은 스스로 관계 이탈에 대해 저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관계에서 분리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길리간과 브라운은 10~11세를 기점으로 소녀들이 이처럼 관계를 위해 관계 밖에 머물러야 하는 모순적 관계, 즉 진퇴양난의 곤경에 처한다고 본다.
이처럼 관계적 곤경에 처한 소녀들에게 관계 안에서 정직하게 행동한다는 것은 어리석게 생각된다. 이런 경우 정직하다는 것은 이기적임, 무례함, 혹은 심지어 못된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분리되고 위선적 행동을 하는 여아들이 선생님이나 부모로부터 사랑과 칭찬을 받는 반면, 솔직하게 행동하는 여아들은 오히려 관계에서 배제되고 소외되고 고립되기 쉽다. 그리하여 청소년기 여아들은 관계에서 배제당하지 않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생존 전략을 다양한 형태의 단절과 분리를 통해 실천한다. 바로 관계를 위해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감추고 침묵하게 된다.
길리간은 청소년기 이전 소녀들에 대한 이런 관찰을 통해 확립했던 발달 과정에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즉 세 가지 수준들과 두 과도기를 추적하는 이런 계열들은 더 어린 소녀들에 대한 관찰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길리간은 여기서 왜 이런 발달 계열이 아동기에 대한 연구를 반영하고 있지 못한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길리간의 주장을 종합해 볼 때, 기존의 선형적 성인 여성 발달 계열에 따르면 분명히 아동기보다는 청소년기 소녀들이 도덕적으로 더 성숙하고 자신과 타인에 대한 배려를 통해 진실의 도덕성, 즉 비폭력적 도덕성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런데 청소년기 소녀들은 오히려 관계의 문제, 즉 관계를 위해 관계로부터 자신을 배제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이 관계로부터 이탈하는 것에 저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길리간의 초기 발달 이론에 따르면 이런 발달적 특성을 보이는 청소년기는 도덕적 발달 단계에서 2수준(선함과 자기 희생)에 해당한다. 이에 비해 청소년기 이전 어린 소녀들은 자신들의 감정과 신념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부당한 것에 저항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청소년기 주변에서 청소년기 목소리의 상실에 저항하고, 진정한 관계가 위선적 관계를 위해 포기되는 것에 저항하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오히려 청소년기 이전 소녀들은 청소년기 소녀들보다 더 발달된 3수준에 근접하는 도덕성을 보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결과는 기존 발달 계열에 역행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길리간은 기존 발달 계열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청소년기의 관계적 양상을 발달로 규정했던 기존 주장에서 벗어나 퇴보, 후퇴의 시기로 규정하였다.
길리간은 아동기에서 청소년기로 넘어가는 12세를 전후 해서 소녀들은 앞에서 설명한 관계적 곤경을 겪고 있다고 보았다. 길리간과 브라운은 이시기를 여성 심리와 여아 발달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중심부 또는 교차로라고 부른다. 이 교차로는 소녀와 여인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교차점이자 여성과 남성에세 모두 영향을 주는 여성 심리에서 하나의 분수령이라는 것이다.
길리간에 따르면, 이 교차로에서 여아들은 자신들을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이야기 하면서도 근본적으로 모순을 가진 관계적 위기로 묘사한다.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를 갖기 위하여 ‘천사 같은 여자’가 되어 자신의 목소리를 포기하고 침묵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관계 자체를 부정하거나 단절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중적 행위 특성을 길리간은 관계적 곤경에 처한 상황으로 해석하고 있다.
길리간은 아동기에서 청소년기에 이르는 이런 과정에서 나타난 관계적 위기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면서 소녀들이 발달과정에서 관계적 위기에 봉착하는 원인을 가부장적 사회 구조와 남성 중심 문화에서 찾는다. 길리간은 기존 전통적 가부장적 질서가 여성을 ‘집 안의 천사(Angel in the house)’로 보게 한다고 주장하였다. 길리간에 따르면, 아동기에서 청소년기로 진입하면서 여아들은 이런 사회적 인습과 문화를 인식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가정 안에서 천사 역할을 수용하게 되어 자신의 목소리를 감추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여아들은 비이기적이면서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길리간에 따르면 여성들이 인간 관계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이타적으로 행위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목소리를 포기하고 인간 관계에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자기 자신의 소멸 또는 상실을 가져온다. 진실한 관계는 바로 자신과 타인이 함께 포함되고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며 자신이 배제된 관계는 이런 진실하지 못한 관계를 위해 침묵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스스로의 상실과 소멸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길리간은 ‘천사의 도덕’을 부도덕한 것으로 보고 여성이 도덕적으로 발달하기 위해서는 이런 천사의 도덕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길리간이 지향했던 도덕적 발달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미덕으로 여겨져 왔던 모성적 배려나 천사의 도덕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을 함께 배려하고, 관계 안에서 상호 작용하는 제3수준의 도덕성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길리간은 여성들에게 순종과 희생을 요구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때문에 여성들은 자기가 희생하는 것을 선하다고 간주하는 제2수준 이상으로 도덕 발달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소녀들은 교차로에서 관계적 위기에 직면해서야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고 시도한다. 바로 자신들의 경험을 계속 이야기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목소리를 내면, 관계에서 배제되고 소외된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렇지만 이들은 자신들에게 요구되는 관계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관계로서 오히려 자신들의 삶에 장애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관계보다 직업적 성공과 경제적 소득을 더 우선시하게 된다. 이 시기 소녀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때 관계가 자신의 미래에, 꿈과 희망에 방해가 된다고 보고 있다. 이 시기 소녀들은 미래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 배우자, 자녀, 애인들과의 관계를 들고 있다. 이런 관계들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모두 소비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관계에 지배당하기 전에 직업적 성공과 경제적 성취를 이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길리간은 이들 가운데 나름대로 성공하고 꿈을 이룬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좌절하고, 비난받고 낙담하는 여성들이 더 많다고 지적한다. 만약 소녀들이 실망이나 실패의 아픔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이나 직업 선택의 기회, 계급 ․ 인종 ․ 민족 등에 특수하게 작용하는 실질적 장애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녀들의 열망과 남성 중심적 고정 관념에 대한 저항은 반드시 현실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관계성을 여성의 본질적 특성으로 가정할 때 타인에 대한 배려를 포기하고 자신의 사회적 성공에 대한 열망을 추구하는 이런 여아들은 관계에서 분리되고, 관계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들이 이런 성공에 대한 열망과 희망을 갖게 된 것 자체가 기존의 사부장적 사회 구조에서 요구하는 관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안이었다는 차원에서 볼 때 이 또한 가부장적 사회 구조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앤드류(B. S. Andrew)는 여아들의 성공 열망을 슈퍼우먼(superwoman)에 대한 열망으로 개념화하여 길리간의 주장을 더욱 구체화했다. 앤드류는 친밀함과 관계성을 거부하는 성공 이념은 진정한 남성 이념이 아니라 진정한 남성에 대한 여성적 비전(vision)이기 때문에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성취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또한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소녀들이 여성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성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이념, 사고, 감정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슈퍼우먼의 이상은 가부장적 여성사의 이념이고 다른 사람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여성의 이념이다. 앤드류는 이런 슈퍼우먼 이상은 여성들에게 더 큰 문제를 가져다 준다고 본다. 왜냐하면 남성들은 아내와 가족한테 감정적, 신체적 배려를 받을 수 있지만 남자한테, 그리고 관계로부터 독립한 여성은 누구한테도 이런 배려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길리간은 위에서 살펴본 대로 청소년기 소녀들이 관계적 곤경에 직면해서 대처하는 방식 자체가 가부장적 사회 구조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어떤 방식이든 이런 관계적 위기에 대한 완전한 해답이 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길리간은 소녀들이 관계적 곤경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해결 방식을 시사해 주고 있다고 본다. 길리간은 이런 청소년기 소녀들의 발달론적 이야기들이 위험과 상실의 이야기가 아니라 힘과 활력의 이야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사람과 연결을 유지하려고 하고, 자기 자신의 사고와 감정을 유지하려는 소녀들의 적극적인 활동이야말로 쾌활하고 용기 있는 활동이라는 것이다.
길리간은 이런 활동이 관계적 위기와 심리학적 문제를 낳기도 하지만, 결코 소녀들의 결핍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를 소녀들의 결핍으로 보는 것은 이런 가부장적 사회 구조를 간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활동들은 궁극적으로 소녀와 여성들의 거낭한 발달을 지지해 줄 수 있는 사회적 ․ 문화적 변화의 필요성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런 여성들의 개인적 노력이 갖는 한계는 사회 구조적 요인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 구조적 변화가 선결 요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길리간의 이런 주장은 최근 논문과 책에서 나타난다. 길리간은 남성들이 여성한테서 분리되는 것과 여성들이 자신한테서 단절되는 것이 기존 가부장적 사회를 영속화하기 위한 필수적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동안 여성들이 냈던 목소리는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가부장적 목소리였기 때문에 이런 목소리를 위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포기하는 것이 인간 관계를 포기하고 선택과 관련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강요된 침묵의 소리, 즉 가부장적 소리를 거부하고 자신의 고유한 소리를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여아와 여성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새로운 심리 이론이 필요하며 여성 심리를 다루는 심리 이론은 불가피하게 여성의 소리와 경험을 억압함으로써만 유지 가능한 가부장적 질서에 도전한다는 것이다. 길리간은, 심리적 과정 및 분리와 단절을 거부함으로써 가부장적 질서에 도전할 수 있는 능력은 이제 정치적 행위가 된다고 본다.
가부장적 질서가 낳은 관계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길리간은 여성과 여아가 교차로에서 만나야 한다는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교차로에서 여성과 여아가 만난다는 것은 여성들에게는 여아에게 합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이를 통해 잃어버린 목소리와 힘을 되찾고 그들이 청소년기에 접어들 때 서로 공명하는 관계를 제공함으로써 여아들의 소리에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만남을 통해 여성과 여아가 함께 관계를 위해 관계를 포기하는 것에 저항한다면 이런 만남은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대한 잠재력을 지니게 됨으로써 심리적으로 좀더 건전한 세계, 좀더 타인을 배려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길리간은 이런 여아와 여성의 만남과 연대를 통해 가부장적 질서 때문에 잃어버린 여성의 목소리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배려 윤리의 관점에서 여성주의 윤리학의 관점으로 전환하는 조짐을 보여 준다.
길리간의 이런 관점은 여성적 배려 윤리를 극복하고 여성주의 배려 윤리를 고양하기 위해 여성적 배려 윤리(feminine ethic of care)와 여성주의적 배려 윤리(feminist ethic of care)를 구분하는 논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길리간의 관점이 배려 윤리에서 여성주의 윤리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성적 윤리로서 배려는 특별한 의무와 인간관계의 윤리로 비이기적이고 자기 희생적 행동을 요구한다. 여성적 윤리에서 배려는 길리간의 초기 발달 이론에서 제시하는 기준으로 보면 제2수준의 도덕성에 해당하며, 배려 윤리는 가부장적 사회 질서 안에서 나타나는 관계적 세계 윤리를 의미한다.
이에 반해 여성주의적 배려 윤리는 인간 삶에서 일차적이며 근본적이라 할 수 있는 연결(connection)에서 출발한다.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어 살고 있고 인간 삶은 수많은 미묘한 관계로 얽혀 있다. 따라서 여성주의 배려 윤리는 여성적 배려 윤리 안에서 관계성의 문제로 단절(disconnection)을 지적한다. 이런 여성주의 배려 윤리 관점에서 볼 때, 분리된 자아 개념과 자율성 개념은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여성주의 배려 윤리 관점에서 볼 때, 인간 활동 영역은 오직 사람들의 관계를 배려하고, 사적 세계를 돌보고 다른 사람과 연결되었다고 느낄 때에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길리간에 따르면 여성적 배려 윤리에서 배려로 규정하는 비이기적인 것(selfless)들은 실제로 관계를 상실하거나 관계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 버리는 것을 의미하고, 이런 관계의 상실은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고 내적 슬픔과 고립감을 갖게 만든다고 한다. 여기에 근거하여 길리간은 관계에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말하는 관계란 자신과 타인이 상호 연결되어 있고, 자신과 타인을 함께 배려하는 진정한 관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진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과의 심리적 분리를 중단하고 침묵 당한 소리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주의 배려 윤리는 가부장적 구조 안에 살면서 여성들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관계를 포기하는 것에 저항하는 소리가 된다.
길리간이 이처럼 두 윤리를 구분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길리간은 관계를 위해서 관계를 포기하고, 자신에 대한 배려를 이기적인 것으로, 비이기적이고 자기희생적인 것을 배려로 간주하는 여성적 배려 윤리는 부도덕한 윤리로서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길리간은 진정한 관계와 인간 사이의 연결을 강조하는 여성주의 배려 윤리를 제시하고 있다. 바로 여성주의 배려 윤리를 통해서 잃어버린 자신의 목소리와 관계를 회복하고 가부장적 사회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길리간은 이처럼 후기에 들어오면서, 여성이 자신의 고유한 소리를 내지 못하고 관계적 곤경에 처하게 된 원인이 가부장적 사회 질서에 있다고 처방하고, 이에 대한 대안의 하나로서 학교 교육을 통한 여성 간의 연대와 유대를 강화할 것을 제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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